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그 정치평론가의 엉뚱함에 대해

독백은 말 그대로 독백이다. 무려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채 그 대단한 ‘실천’을 행하는 정치평론에서는 과학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비과학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초월적 논증’이 어느정도는 끼어들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평론가가, 대답하라고 던져준 글보다는 ‘독백’이라고 뻔히 밝혀놓은 무지막지하게 초월적인(?) 글에 성을 내는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태도를 르상티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더라.
대답을 바란 글도 아니므로 그다지 길게 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읽고 답을 다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 것 같지도, 길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간단히 답한다. 하지만 이런걸 왜 해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념을 그대로 둔 채로 근거를 확보하는 일이다”라는 나의 말을, 무려 칸트의 초월적 논증까지 휘둘러 가며 글을 쓴 사람은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여유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독백> 이전의 글에는 “순수하게 연역적인 논증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익한 동시에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의 전제는 대부분 귀납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걸 머리를 잘 굴려서 대입해 보면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유사역사학에 대한 유비논증은 훌륭했는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를 거기에 끼워맞추게 되면, 최장집이니 이상이니 하는 정치평론가들도 모두 그 범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이 나은 방법일 듯 한데, 왜냐하면 상황이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더 이상 과학이니 뭐니 하는 말을 자신의 정치평론과 대비해가면서 그 대단한 ‘정치평론질’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특히 내가 초파리를 다루는 연구실에서 나와 이런 글 따위를 쓰고 있을 때는 모두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셈이다. 현실은 더럽게 복잡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확실한 해답은 없다. 나는 그런 것을 말하려고 했는데, 여전히 그 정치평론가에게는 내가 과학자라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과학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요구하는 모양인데, 내가 그동안 쏟아낸 글들을 모두 링크하거나 언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는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필요하면 가져다 읽으면 된다. 그 정치평론가는 항상 논쟁의 방식을 비판을 원하는 ‘해당 글’의 논리적 구조 내에만 한정시키려고 하는데, 논쟁이란 좀 전방위적이어야 멋진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문화이론가를 비판하기 위해 그의 논문을 죄다 주워 읽고 심지어 라깡의 에크리와 김석의 에크리까지 틈틈히 주워읽고 있는 형편인데 말이다. 글 하나하나에 필요한 모든 말들을 써야만 한다면 도대체 글은 끝간데 없이 길어지기만 할 것이고, 그것은 좋은 논쟁의 방식이 아니다. 상대를 알아야 싸우는 것 아닌가. 그 정치평론가는 그런걸 알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언제나 저런 방식으로 싸운다. 실은 그래서 별로 배울 게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과학도들의 주장은, 흔히 “그것은 과학이 아닌 다른 학문이다.”라거나 “그것은 과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지적 활동이다.”라는 차원을 넘어 “그것은 이성적이지 못한 주장이며 사이비다.”란 주장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낱말의 다의성을 활용한 폭력적인 질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네,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래서요?”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전 글에서 <초월적 논증>이라는 글의 맥락에서 ‘초월적 논증’과 대비되어 사용된 ‘과학적 사고’가 잘못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지, 당신들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깡논쟁의 여파가 아직도 그 정치평론가에게는 진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니 그 르상티망이 좀 사그라질때까지 참아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이런 문단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도 ‘과학’이란 말을 ‘학문적인 활동 일반’이란 말과 비슷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사실 ‘과학적인 세계인식’이란 단어에서도 ‘과학’이란 말은 거의 그 비슷하게 쓰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용어사용을 그대로 가지고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인문학적 사유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야바위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변별단어들이 등장하면, ‘과학’이란 용어의 의미는 당연히 훨씬 더 축소되어야 한다. 맥락에 따른 낱말의 다의성을 무시한 채 같은 말을 여기저기 갖다 붙여서 전개되는 논증(?)만큼 혼란스러운 것은 없다.
만약 <초월적 논증>이라는 글에서 사용된 ‘과학’이라는 개념이 ‘비센샤프트’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면 논쟁은 필요 없다. 나는 ‘과학적 사고’ 혹은 ‘과학적 세계인식’이라는 말에서 해당 정치평론가가 평소에 논쟁하고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을 떠올리게 된 것이고, 이러한 태도는 그 정치평론가의 그간의 글들과 논쟁지점을 잘 알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을 잘 고려해보면, ‘과학적 사고’와 ‘과학적 세계인식’이라는 말은 통속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그 정치평론가가 평소에 쓰던 용법으로 사용되었던 아무런 상관 없이, 내 비판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그게 아니라 그의 지인이 즐겨 쓴다는 ‘비센샤프트’적인 의미의 과학으로 사용한 것이라면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말면 된다. 맥락이 그렇다면 내 비판의 촛점은 흐려지고 논쟁 따위는 필요도 없게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해당 정치평론가가 ‘비센샤프트적 사고’와 ‘비센샤프트적 세계인식’은 무엇인지 밝혀주면 되는 일이다. 그런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 문단은 <독백>이 자신에 대한 비판글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듯 한데, 내가 <독백>이라는 이름을 붙힌 이유는 그것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쓸데 없는 글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독백>을 쓰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정치평론가의 윗 글을 읽고, 이 글을 쓰는데도 30분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에너지 낭비다. 아, 참고로 나는 그다지 논증(?)적이지 않은 글들은 ‘로맨틱 바이올로지’라는 카테고리로 포스팅을 하니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덧붙힘) 게다가 <독백>이라는 글의 진짜 제목은 <말도 안되는 말>이었고, 그건 내가 하는 말도 말도 안된다는 걸 의도했다는 걸 이야기해주면 좀 사정이 나아지려는가 잘 모르겠다. 꽤나 다의적인 명제 아닌가? 분석의 소재도 되고, 자아 비판의 도구도 되고 말이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독백에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제목까지 달아 놓았는데, 그걸 참 진지하게 품평해주니 일단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