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소로행(君子小路行): 상식의 좁은 길

http://heterosis.egloos.com/773167 원문


2004년 11월 13일, 프리고진 강독을 마치고, (hwp)

군자소로행 君子小路行: 상식의 좁은 길

호불호 好不好의 외침은 쉽다. 제 아무리 탄탄한 기반위에 쌓인 이론과 사상일지라도 호불호의 외침은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쉬운 길에 대항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어쩌면 침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침묵의 합리성’은 상황 선택적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합리적인 선택은 없다. 모든 선택은 환경문맥에 의해 합리성을 획득한다. 

상식은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한 솔직한 느낌이다. 우리의 경험은 진화적 역사 속에서 적응되어온 마음을 거쳐 해석되고 발현된다. 진화를 다양성의 증가로 본다면 마음의 다양성은 일상경험 속에 존재하는 상식을 위협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적 다양성은 무작위적 발산이 아니다. 다양성은 진화적 제한 속에서만 기능한다. 우리의 마음은 진화심리학만큼의 공통점과 행동유전학만큼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스펙트럼이다. 진화적 다양성은 차이와 유사를 넘어서는 어떤 개념이다. 그 개념은 상황적 맥락의 고려를 포함한다. 그러나 호불호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규범으로 모든 상황적 가능성을 무시한다. 규범에 지배되는 호불호는 따라서 상식의 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식적 삶이란 호불호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호불호를 넘어서는 가장 상식적인 방법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결론을 가지고 어떤 사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그 결론이 도출된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과학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이 왜 나쁜지, 왜 과학이 아닌지에 대한 근거가 분석적으로 제시될 때 ‘창조과학은 나쁘다’라는 명제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근거의 제시는 판단을 요구한다. 판단은 우리의 적응된 마음과 환경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판단을 진화적 역사라는 모호한 실체에 넘겨버리는 것은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다. 적어도 이러한 방법론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인간의 마음을 완벽한 합리적 존재로 가정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고전역학의 세계관과 닿아 있는 이러한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추구는 마음의 역사성을 발견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화론은 모든 세계관에 역사성을 부여하면서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사상이다.

서구사상의 종착지라고까지 말해지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중반까지 이어지는 시대정신의 일부였다. 물론 이러한 시대정신 속에서도 다양성은 존재한다.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물리화학적 정당화를 시도한 이론가 중 한명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저술들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생물학에서는 윌리암 해밀턴, 리쳐드 도킨스로 이어지는 가장 환원적이고 분석적인 유전자 선택설이 등장했다. 시대정신은 전 지구적이고 전 인류적인 어떤 보편적 실체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시대정신은 가끔 지역을 뛰어넘어 기능하기도 하지만 모듈단위로 묶여 전파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역사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는 ‘시대정신속의 다양성’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만을 인정하도록 하자. 언젠가 이에 대한 글을 쓰게 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프리고진은 브뤼셀의 열역학 그룹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형성했다. 클라우지우스로부터 시작되는 열역학의 학문적 전통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혁명기에도 이들과 통합되지 않은 채로 다른 세계관 속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열역학적 세계관과 물리학적 세계관은 ‘시간패러독스’로 불리는 문제에서 충돌한다. 시간패러독스란 시간의 화살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과거와 미래는 서로 같은 역할을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가 시간패러독스의 핵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종종 ‘시간은 환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전에 이미 다윈은 생물 종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감명 받은 통계역학의 건설자 볼츠만은 자신의 이론 속에서 시간의 화살을 정당화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이론은 이미 시간 대칭적인 틀 속에서 짜여진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볼츠만은 자신의 이론 속에서 시간비가역성을 발견할 수 없었고 푸앵카레와 로슈미트 등의 반론에 부딪혀 자살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이론과 세계관사이의 갈등 때문에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쇠약증으로 인한 자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볼츠만은 물리학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지 못했다. 프리고진을 사로잡은 문제는 볼츠만에게 갈등을 유발한 바로 그 문제, 시간의 비가역성문제였다. 프리고진은 평생을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기 위해 살았다. 열역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그에게, 게다가 문사철을 포함한 폭넓은 관심분야를 가진 그에게 이러한 상이한 세계관은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프리고진은 자신이 발견한 소산구조 dissipative structure를 기초로 비평형열역학을 건설했다. 이제 대중에게 너무나 친숙한 자기조직화 self-organization이나 창발성 emergence, 카오스 chaos등의 개념의 건설자 중 한명인 프리고진은, 그러나 많은 인문학자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던한 사상가가 아니다. 프리고진은 프리초프 카프라처럼 새로운 물리학의 결론을 동양철학에 끼워 맞추지 않는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질문 “추상화가와 우수한 이론 물리학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상화가는 가능한 한 독창적인 경향이 있어야 하지만, 우수한 이론 물리학자는 가능한 한 보수적이라야만 한다. <확실성의 종말, 제 7장 자연과의 대화>

‘보수’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는 여러분과 내가 공감하며 진저리를 치는 대한민국의 그러한 보수가 아니다. 

프리고진은 말년에 <확실성의 종말>을 저술하면서 고전역학,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 그리고 대폭발 이론 모두에서 시간의 비가역성을 증명하려는 야심에 찬 시도를 기획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보수’의 의미가 드러난다. 프리고진이 속해 있던 학문적 전통은 비록 열역학이었지만 그의 세계관은 카오스 이론의 선구자들이나 복잡계 이론의 선구자들과 동질의 것이었다. 프리고진은 기상학자 로렌츠로부터 시작된 카오스 이론가들의 그룹 속에서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리학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 분명히 못 박을 수는 없지만 카오스 이론과 복잡계 이론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과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로렌츠를 비롯한 물리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소외된 일단의 과학자들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계 이론이 탄생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프리고진의 위치는 매우 미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그가 속한 브뤼셀의 열역학 그룹은 적어도 물리학에서 비주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물리학적 전통을 자신의 발견 속에서 정당화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프리고진은 이러한 갈등을 가능한 한 보수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제임스 글레익의 말에 따르면 종교집단과 비슷했던 초기 카오스 연구자들과는 다르게 프리고진은 물리학의 전통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 언급했던 ‘침묵의 합리성이 상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단적인 예다. 어떤 때에 침묵은 비합리적이다.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에 이르는 모든 이론에서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고자 했던 프리고진의 노력이 현재 모두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너무 과도한 욕심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그 방식이다. 이미 위에서 그러한 방식을 ‘보수’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미 앞에서 이에 대한 해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많은 이들의 오해를 덜기 위해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를 어설프게나마 규정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프리고진이 말하는 ‘보수’는 다음과 같은 말들과 맥락이 일치한다. 

정정당당함, 용기, 성실, 그리고 좁은 길.

프리고진의 ‘보수’는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다. 프리고진은 가치와 사실이 충돌하는 갈등구조 속에서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쉬운 길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았다.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일상적 삶 속에서 경험하는 상식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아무리 정교한 물리학적 이론이라고 해도 이러한 상식적 삶과 갈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일상적 경험에 충실한 과학자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간의 화살을 확립하게 되면 자연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의 화살이 우주의 모든 부분에 공통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통일성이 나타난다. 당신의 미래가 바로 나의 미래에 해당하고, 태양의 미래는 다른 별들의 미래에 해당한다. 다양성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안에 들어 있는 어느 정도 열적 평형에 가까이 있고, 분자 수준의 무질서 상태에 있는 기체의 혼합물인 공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방안에는 나의 집사람이 마련해 준 아름다운 꽃꽂이도 있다. 꽃꽂이는 시간에 따른, 비가역적인, 비평형 과정의 덕분으로 평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도로 조직화된 대상이다. 이 같은 시간의 긍정적인 역할을 고려하지 못하는 자연 법칙은 절대로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확실성의 종말, 제 1장 에피쿠로스의 딜레마>

그는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일상과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합치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은 보수와 진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그 문맥 속에서의 보수와 진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 샛길이다. 프리고진은 이러한 좁은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소외를 가져온 두 가지 개념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좁은 길이다. 새로움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법칙에 지배되는 세상의 개념과,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으로 상징되는 아무것도 이해할 것이 없는 괴상하고 인과성도 없는 세상의 개념 사이에 있는 좁은 길을 찾는 것이다. <확실성의 종말, 제 9장 좁은 길>

프리고진이 제시하는 이러한 좁은 길을 창조성과 집단적 노력, 즉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갈등이 아니다. 창조성은 집단적 노력이라는 구속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문제의 답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엄정한 기준과 요구 조건을 만족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구속 조건이 창조성을 배제하는 것이며 오히려 창조성에게는 도전이 된다. <확실성의 종말, 제 9장 좁은 길>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프리고진은 시간의 화살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물리적 개념과 수학적 도구를 개발한다. 그의 말처럼 “시간 패러독스는 단순히 상식에 호소하거나 동력학 법칙의 임시방편적인 수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리고진의 결론은 현재 우리의 학문풍토를 돌아보았을 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이런 좁은 길을 걸어온 프리고진마저도 왜곡 해석하는 가벼운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학문방법이 프리고진이 강조하는 좁은 길과는 완벽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프리고진의 전일적 세계관이 구미에 맞는다는 이유로 프리고진을 자신들의 숭배자로 만드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보수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일상경험 속에서 기능하는 상식이 발산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최한기와 그를 왜곡하는 현대 최한기 숭배자들의 구도와 똑같은지 모르겠다. 사상의 창시자와 이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발산도 상식의 좁은 길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예수와 바울, 화이트헤드와 국내의 신학자들, 도킨스와 로버트 엉거, 굴드와 국내의 과학사회학자들 등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일상을 포기하고 관념의 유희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홉스의 말처럼 “진정한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제까지의 저술가들의 정의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이 소홀하게 규정되어 있으면 정정하며 또는 자신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홉스 리바이어던, 제 4장 언어에 대하여>” 상식은 좁은 길이고 발산하기 쉬운 혼돈의 가장자리 속에 있다. 그러나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명이 안정성을 획득하듯이 상식은 살아 있으면서 역동적인 안정성을 획득한다. 한 과학자가 발견한 사실과 이로부터 유도되는 사상적 결론이 이처럼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이제 프리고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개념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좁은 길’이다. 프리고진이 말하는 좁은 길이라는 화두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엄청나다. 좁은 길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이념이나 호불호에 구속받지 않고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과학과 타분야의 갈등을 다룰 때에는 이념과 종교에 구애 받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과정 속에 기능하는 철학이다. 이것이 상황윤리학이 말하는 윤리학의 좁은 길이고, 환경문맥을 고려하는 제한된 합리성이 추구하는 것이다. 

상식적 삶은 좁은 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좁은 길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창조적 소수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식의 자기 정당화나 우월의식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프리메이슨과 음모론이 상식은 아니다.

이제 프리고진을 잠시 놓아주는 이 길에서 우리는 혜강정신을 관통하는 상식이 좁게 나 있는 길임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렵고 고달픈 작업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업을 쉽게 일탈한다. 이것은 과학정신도 아니고 합리적 이성도 아니며 광신은 더더욱 아니다. 이제 그것을 ‘상식의 좁은 길’이라고 부르자. 우리가 혜강과 프리고진을 통해 얻은 것의 총합은 ‘상식의 좁은 길’이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