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역치로서의 감정

http://heterosis.egloos.com/775674 원문


생물학의 용어엔 ‘역치(theshold value)’라는 것이 있다. 역치란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졌을 때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극 강도를 뜻한다. 역치라는 현상은 19세기의 심리학자인 Ernst Weber에 의해 발견되어 공식화되었는데, 이를 베버의 법칙 (Weber’s Law)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R2 – R1)/R1 = ΔR/R 1 = K
R1 : 처음 자극의 세기, R2 : 나중 자극의 세기, K : 베버상수

베버는 지각심리학에서 거의 최초로 매우 중요한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공식을 진술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상대적으로 동등한 자극의 증가는 동등한 감각의 증가와 비례한다(equal relative increments of stimuli are proportional to equal increments of sensation).”

예를 들어보자. 피실험자에게 100의 강도로 빛을 비추고 이후 점차로 빛의 강도를 늘렸을 때 110의 강도에서 피실험자가 빛이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고 해보자. 이 경우 베버 상수는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110-100) /100 = 10/100= 0.1

이러한 경우 베버의 법칙은 피실험자에게 매우 밝거나 어두운 빛이 주어지지 않는한 그가 0.1의 베버상수로 자극의 변화를 감지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이경우 피실험자에게 500의 강도로 빛이 쪼여진다면 피실험자는 500 X 0.1= 50의 강도, 즉 550의 빛이 왔을 때 빛이 강해졌다고 느끼리라는 것이다. 

위에서 역치란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위의 예에서 역치는 “(주어진 자극 X 베버상수) + 초기자극”로 기술할 수 있고 결국 베버의 법칙은 자극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최소 변화량은 처음 자극의 세기에 비례한다는 말이 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역치가 클수록 둔감하고, 역치가 작을수록 예민하다.

베버의 실험에서 우리의 감각기가 보여주는 재미있는 현상은 첫째, 역치 이하의 자극에서는 감각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과 둘째, 역치 이상의 자극을 주어도 자극에 대한 반응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점이다(사실 단일 세포에서는 두번째 이야기가 성립하지만 세포의 수가 늘어나는 조직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 점은 논외로 하자. 생물학 체계에서 역치반응은 그 유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거의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생화학 교과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백질에 대한 설명이다. 생화학이 유전학과 만나기 이전의 전통에서 생화학자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생체재료는 유기체에 풍부한 단백질이었다. 유전물질인 핵산은 단백질에 비해 양이 매우 적으므로 유용한 재료가 아니다. 이러한 단백질에 대한 관심은 곧 효소반응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사실 생화학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단밸질에 관한 설명 중 대부분이 효소반응에 관한 것이다. 효소의 반응도 개개의 효소에 관해서는 역치반응을 따른다. 

또한 최근에 시스템 생물학에서 발견한 유전자와 전사인자들간의 되먹임 구조에서도 일정강도 이상의 외부자극에 대해서만 전사가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회로가 발견되었다. 생명시스템에서 역치란 적합한 외부자극에 대해 필요한 만큼 반응하기 위해 진화한 체계로 볼 수 있다. 즉 환경은 변화무쌍하므로 변화하는 환경 모두에 일정하게 반응하는 개체는 자신에게 매우 해롭거나 매우 이로울 환경에만 반응하는 개체에 비해 경쟁에서 불리할 것이고, 이러한 선호도가 단백질에서 신경계까지의 수준에서 역치반응을 진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치에 대한 설명은 이정도로 하고 역치를 온도로 비유해보자.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그면 인체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지만, 매우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물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이 베버의 법칙이 예측하는 바이다. 이 말을 우리의 일상생활로 돌려 비유해보자면 뜨뜻 미지근한 유머나 대화는 우리의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반면 썰렁한 농담이나 화끈한 농담은 좌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농담이나 유머와 같이 주로 우리에게 역치반응을 유도하는 이러한 자극들은 인간의 감정에 관여하는 것 같다. 

인간의 사고에 있어 감정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진화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버릇이다. 인간의 두뇌는 변연계를 포함한 피질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반드시 변연계가 감정을 모두 총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감정이 변연계에 의해 즉각적으로 사고과정 없이 통제된다. 두뇌의 진화가 불연속적이지는 않으므로 변연계는 진화사에서 뒤늦게 등장한 대뇌피질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이는 두뇌의 총체적 기능이 인류의 생존과 생식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는 적응적 관점을 고려해본다면 명확하다. 두뇌의 총체적 기능이 고려되는 한, 변연계와 대뇌피질계는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즉, 인간의 사고과정은 감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이 점은 따로 논증이 필요하지 않은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뇌의 기능을 뜨뜻미진근한 농담과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극으로서의 타인의 말에 반응하는 방식이 베버의 법칙을 따르고, 이러한 자극이 주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며, 이렇게 촉발된 반응이 마치 경운기의 시동을 거는 것처럼 작동한다면, 우리가 타인과 일정한 수준으로 지속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감정을 동반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내가 이글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점이다. 어떤 형태의 논쟁이던 일정 수준 이상의 상호작용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초의 자극이 필요하며, 이러한 자극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강하게 나는 이러한 논쟁에 과학적 논쟁까지도 포함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사고의 극한을 보여준다는 과학적 논쟁에서도 감정은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개입이 과학적 논쟁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현상이다. 왜 감정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반드시 그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몰아부쳐야만 하는가? 이성적 합리성이라는 괴물이 근대 확실성 추구의 정신속에 등장한 서구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오늘날, 감정의 개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비합리적이 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만약 과학적 논쟁에 이처럼 감정의 불씨가 작동한 예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묻는 이가 과학사에 정통하지는 않더라도 맛을 았다면 충분한 예들을 스스로 찾으리라고 믿지만) 수많은 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여줄 수 있다. 물리학사에 정통하지 못한 나로서도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에 감정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장담할 물리학자는 없을 듯하고,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거부한 이유 중에 감정적 요소는 전혀 없었다고 선언할 물리학자는 없으리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물학의 논쟁사에서도 신념 혹은 이념과 결부된 감정이 논쟁에 개입하는 일은 허다한 것이다. 좌파진영의 생물학자들이나 자유주의 진영의 생물학자들 모두가 그러한 감정과 밀착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념은 분명 감정적 요소가 짙게 풍겨나오는 개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념으로 인한 살생과 갈등이 종교라는 감정적 요소로 충천된 제도로부터 발생한 그것보다 결코 적지 않을리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가지의 이야기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구 감정적으로 논쟁을 해도 괜찮다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베버의 법칙이 예측하는 두번째 결과를 사용해야만 한다. 역치이상의 자극은 항상 동일한 반응을 유도한다. 감정이 과학적 논쟁과 같이 엄격한 논쟁의 틈에도 개입하고 있다지만, 감정의 역할은 그 논쟁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안정화시키고 지속시키는 한에 족해야 한다. 그 이상의 감정이 분출되어도 반응은 증가하지도 않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감소해 버릴지도 모른다. 지나친 에너지의 소모로 스스로 고갈되어 버리거나 폭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 자극 이상의 감정이 논쟁에 부여된 이후에는 그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이후의 논쟁은 논쟁 본유의 것으로 알려진 여러 상식들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이처럼 일정 자극 이상의 감정이 제공된 이후 근거를 제시하고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논쟁은 감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다. 즉 감정에 의해 촉발된 반응의 정도가 “유지”되는 데에 이러한 (말하자면) 합리적, 혹은 이성적 사고가 필수적일 수 있다. 실제로 생물학적 반응에서도 역치이상의 반응이후에는 정상적인 경로를 따르는 반응들이 지속되어야만 이후의 반응에 교란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역치 이후의 변화된 새로운 정상상태는 역치 이전의 정상상태의 연장이다. 즉, 감정과 이성(이 말을 사용하기는 싫지만)의 적절한 비율이 정상상태라면 감정의 폭발적인 촉발로 야기된 정상상태의 상전이는 다시 획득된 새로운 정상상태로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성되는 비율은 각자 다를지라도 자극이 일어나는 순간과 비교하면 역치이전과 이후의 유사점이 훨씬 클 것이다.

도대체 이런 글을 왜 쓰느냐면, 인터넷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누구나 쉽게 오기가 끓어오르게 마련이고, 지기 싫다는 자존심으로 욕설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 게시판이 개판이 되는 광경을 누구가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런 세테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설명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적절한 논쟁의 자극제로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뭔가 고개를 끄떡거리진는 않겠는가 하는 희망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욕지거리를 하고 게시판을 더럽히는 일부 초딩들과, 짐짓 과학적 논쟁이랍시고 점잖은 빼며 제대로된 논쟁은 시작하지도 못하는 경건주의자들의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세상은, 적어도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에서도 적어도 인터넷과 정치판과 교수사회는 표준분포가 아니라 Power Law를 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가운데가 없다. 가운데는 양비론이라는 이유로 배척된다. 양비론의 탈을 쓴 중립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중립들도 있다. 이념과 종교에 물들지 않고, 과학의 대중화나, 대중의 과학화가 아닌 과학의 과학화를 외치는 제정신 박힌 중립들도 때로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내가 꼭 그런 중립이라는 말은 아니고. 그런 중립들은 “상황윤리”라는 말을 잘 안다.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 이념과 종교를 탈피해 적어도 무엇인가 윤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끄집어 내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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