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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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나

김우재

프랑스 혁명은 1787년에 시작되어 1789년을 기점으로 폭발하여 이후 1799년에 가서야 마무리된다. 1787년 미국 독립전쟁 참가로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 왕실이 특권층에게서 세금을 더 징수하는 법안을 제시하자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왕실에서 자유로웠던 프랑스의 특권층은 이에 저항하는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귀족반란이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혁명은 본격화된다. 프랑스 혁명은 수년 전에 패배를 겪었던 네덜란드 연합왕국, 벨기에, 스위스 등지의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합스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변화를 원하던 모든 이들이 혁명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에서 혁명주의자 클럽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 혁명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자코뱅주의자’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프랑스는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흔히 ‘혁명전쟁’이라 부르는 시기가 시작된다. 전쟁은 예견되었던 것으로 유럽의 왕실들은 프랑스 혁명이 진행될수록 자신들의 국가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전쟁이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국내 사정은 어려워졌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공안위원회’가 구성된다. 당통에 의해 시작된 온건파는 곧 로비스피에르의 급진적 혁명세력으로 교체되며 이들이 주도한 1793년 7월부터 1794년 9월까지의 ‘공포정치’ 중에 약 30만 명이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1만 7,000명이 공식 처형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재판도 못 받고 죽었다. 라부아지에는 로비스피에르에 의한 공안위원회가 집권했던 1794년 5월 8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과학자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라부아지에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와의 악연이다. 흔히 프랑스 혁명 중 산악당(The Mountain)의 상징으로만 잘 알려져 있는 마라는 자신의 업적이 뉴턴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의사이자 과학자였다.

장 폴 마라는 1743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770년대 런던에서 의사로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세를 타는데 그 전까지는 프랑스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름 없이 지내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영국에서 명성을 얻은 마라는 과학과 철학을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그의 첫 번째 책은 1771년에 저술한〈인간영혼론 Essay on the Human Soul>으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1773년 <인간영혼론>을 개정 증보한 <철학적 인간론 A Philosophical Essay on Man 혹은 the Principles and the Laws of the Influence of the Soul on the Body and the Body on the Soul>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1775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도 출판되었다. 당시의 암스테르담은 무역의 중심지로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책들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의사로서 관심을 가졌던 과학적 저술 이외에도 그는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적 인간론>이 인기를 얻은 다음해인 1774년 영국 유권자들을 상대로 전제정치를 고발한 〈노예제의 사슬 The Chains of Slavery〉을 출판하는데, 몇몇 학자에 따르면 그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귀족주의적’ 또는 ‘궁정적‘ 음모라는 개념을 밝혔다고 한다. 이 개념은 수많은 그의 위대한 연설과 논문에 일관된 중심주제가 된다. 런던에서 그는 매우 구체적인 질병에 관한 의학서적도 출판했다. 1775년에는 <Essay on Gleets 만성 요도염에 관한 에세이>가, 1776년에는 노안에 관한 저술인 <An Inquiry into a Singular Disease of Eyes 눈에 발생하는 희귀질병에 관한 탐구>가 출판된다. 이 저술들은 그가 1775년 의학박사 학위를 스코틀랜드에서 취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사로서의 훈련 과정 중에 저술된 것으로 짐작된다.

<철학적 인간론>은 그의 자연관을 잘 함축하고 있는 책이다. 정통적인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자로서 그는 신은 인간이라는 기계의 밖에 존재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육체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신이 자연을 조절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마라에게 육체란 정신의 기관으로서 일종의 기계였다.

책은 4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 1장은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그가 정통했던 해부학적 지식을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육체가 정신의 기관으로서 일종의 기계라는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제 2장은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부분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 자체로는 죽은 것이다. 육체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은 영혼으로 영혼은 보이지 않는 용수철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인간을 지적이게 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모두 영혼의 작용이다. 제 2장은 엘베시우스(Hevetius)에 대한 반박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엘베시우스(1715-1771)는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프랑스 철학자로 인식은 모두 감각에 의거한다고 생각했을 뿐만이 아니라, 유물론의 입장에서 종교나 교회를 비판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수 있는 능력이 똑같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에서 그는 루소의 교육서 〈에밀 Émile〉을 논박했고 〈인간론 De L’homme〉(1772)을 저술하여 교육을 통해 인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마라의 반박이 집중된 곳은 엘베시우스가 유물론의 입장에서 감각만으로 인간의 인식을 설명하려 했던 부분이었다. 데카르트주의자로서 마라에게 육체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기계였다. 따라서 제 3장에서 그는 잠과 꿈이라는 현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에게, 육체가 영혼에게 미치는 영향을 증명하고자 했다. 마라 자신의 잠과 꿈을 근거로 상세히 기술 된 제 3장을 통해 그는 구시대의 병약한 영혼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이들처럼 병든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를 즐기며 반대로 건강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이들은 부드럽고 건전한 문화를 즐긴다고 주장했다. 건전한 영혼을 가진 이들이 특히 선호하는 향기는 재스민과 장미향이다. 제 4장은 육체와 영혼이 상호작용하는 작동 방식을 다룬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는 그 어떤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양자는 자연계에서 구분되는 독특한 존재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존재함이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그 관계가 일시적이지 않다면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독특한 관계는 제 3의 인자 혹은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중간자는 육체와 같이 완전한 물질도 아니고 영혼처럼 완전한 비물질도 아닌 어떤 중간적인 존재로 신경물질에 활성을 부여하며 두뇌에 그 대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마라는 이러한 중간자를 “신경액 (nerve fluids)”라고 불렀다. 신경액이라 불리는 이 신비로운 체액은 섬유질과 육체의 각 기관들과 결합하여 움직이며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마라는 유물론적 철학으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엘베시우스를 반박하면서 생리학으로 심신의 연결문제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주장한 신경액이라는 미지의 중간자를 송과선으로 대체함으로서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바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데카르트의 저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들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책 <철학적 인간론>은 데카르트 철학의 변주였고 마라 또한 철저한 데카르트주의자였다. 마라의 책 <철학적 인간론>은 볼테르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당한다. 볼테르는 이 책의 스타일을 조롱했고 마라의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수사학적 웅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볼테르의 비판은 마라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마라는 1777년 대륙으로 돌아온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막내동생인 아르투아 백작(후에 샤를 10세가 됨)의 사병들을 담당하는 의사로 임명된 그는 주로 성공한 과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그는 과학논문을 쓰고 주로 불, 전기, 빛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전기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파리에 머무르던 이 시기에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태양 현미경(Solar Microscope)”을 이용한 실험결과를 <Discoveries on fire, electricity and light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1779)이라는 짧은 에세이로 출판한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그가 태양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불액 (igneous fluid)“이라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짧은 팜플렛에는 그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도움으로 직접 수행한 66가지의 실험이 소개되어 있고 7개의 삽화가 곁들여져 있다. 실제로 마라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많은 서신을 교류했고 프랭클린의 전기와 관련된 실험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프랑스 과학학술원 French Academy of Science>의 관심을 받았고 허가도 얻었지만 학술원은 마라가 정립하고자 한 이론 자체는 거부했으며 이러한 학술원의 무시가 마라와 학술원 사이의 관계악화의 불씨가 된다. 그는 혁명 전까지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 자격을 얻지 못했고 이에 대해 자신이 순교자가 된 기분으로 과학을 하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관심은 의학과 과학 그리고 정치에 고루 분배되어 있었는데 이는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을 저술한 시기에 분야가 완전히 다른 저술인 <Plan of Criminal Legislation 형법 입안>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미 런던 시절에서부터 <노예제의 사슬>을 저술하며 정치와 사회에 큰 관심을 보이던 개혁적인 마라가 곧 일어날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불과 전기 그리고 빛에 관한 그의 관심은 이시기 <Physical Research on Fire 불에 관한 물리적 연구>(1780), <Physical Research on Electricity 전기에 관한 물리적 연구>(1782), <Medical electricity 전기의 의학적 사용>(1783)으로 이어지고 <전기의 의학적 사용>은 1783년 왕립 과학학술원(Royal Academy of Sciences in Rouen)에서 주는 상을 수상한다. 이시기에 출판된 책들의 대부분은 마라 자신이 직접 돈을 대고 출판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빛에 관한 책으로 그는 강사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많은 강의를 했다. <빛에 관한 물리적 연구>는 독일어로도 출판되었고 괴테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중상류계층과 귀족계층 환자들을 치료해 개업의로서도 기반을 쌓은 그는 1783년 그는 의사직을 그만두었는데 그동안의 노력으로 쌓은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집중하겠다는 야심이 그런 결정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알려진다.

1784년에는 뉴턴의 광학에 관한 일종의 비판서인 <Elementary Notions in Optics 광학에 대한 소고>를 출판했고 1787년에는 익명으로 뉴턴의 광학을 번역해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이니셜만이 기록된 상태로 출판되었는데 마라 자신이 그의 정치적 적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의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라의 마지막 과학 저술은 1788에 출판된 <Academical Essays or New Discoveries on Light 빛에 관한 학술적 에세이 혹은 새로운 발견>이다. 이 저술 또한 뉴턴의 광학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관한 주장을 담고 있다.

마라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고 런던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스로 금의환향하면서 프랑스 과학학술원에서 자신을 회원으로 받아줄 것이라 기대했던 듯하다. 그의 이러한 소망은 1779년부터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78년까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라부아지에는 마라의 책 <Physical Researches on Fire 불에 관한 물리적 연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마라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이 될 자격이 없는 애송이라고 말했다. 마라의 독일어판 책에 찬사를 보냈던 괴테는 프랑스아카데미의 거절을 과학적 독재라고 표현했지만 마라가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했던 것은 마라의 표현처럼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나 정치적 이해도 아니고 괴테의 표현처럼 과학적 독재만도 아니었다. 당시의 프랑스 과학계에서 뉴턴은 예전처럼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뉴턴의 고전역학을 중심으로 프랑스 과학이 재정립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라, 라부아지에, 데카르트, 뉴턴

뉴턴 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었을 당시 데카르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프랑스 학계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위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고 국제정치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학술 교류는 말브랑슈 (Nicolas Malebranche, 1638-1715)를 시작으로 모퍼티 (Pierre-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 클레로 (Alexi Clairaut, 1713-1765), 볼테르 (Voltaire, 1694-1778) 등의 급진적 뉴턴주의자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볼테르가 영국에서의 망명 생활 뒤 프랑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뉴턴 소개에 힘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뉴턴철학의 요소들 É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은 프랑스에서 일반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뉴턴에 관해 씌어진 최초의 책이었다고 한다. 마라의 초기저작이 볼테르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당하는 것은 볼테르가 프랑스에 뉴턴을 수입한 장본인이고 당시 뉴턴주의자들과 데카르트주의자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볼테르의 애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은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모퍼티 ‘최소작용의 원리’를 천명하며 뉴턴 철학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전파된 뉴턴의 과학은 다양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논쟁은 지구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vortex) 이론에 의하면 지구는 대체로 구형이지만 적도 지방이 극지방에 비해 보다 평평해야만 한다. 반면 뉴턴의 이론은 적도 지방보다는 극지방이 평평하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일종의 국가적 논쟁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730년대를 통해 극지방과 적도지방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일련의 지구 측정 탐사를 계획했고 이런 일련의 탐사 작업의 결과 뉴턴의 이론이 확증된다. 달의 운동과 핼리 혜성의 운동에 관한 것도 뉴턴 역학의 유효성을 둘러싸고 벌였던 대표적인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는 장 달랑베르 (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오일러 (Leonhard Euler, 1707-1783), 라그랑주(Joséph Louis Lagrange, 1736-1813) 등이 당대의 천재적인 학자들이 참가했고 삼체문제를 비롯한 천체역학의 계산 테크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뉴턴의 이론이 프랑스에 수입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직이 바로 프랑스 과학학술원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했던 프랑스의 과학 학술원은 이시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마라가 활동했던 시기가 바로 뉴턴의 이론이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기였고 프랑스 과학학술원에는 뉴턴주의자들이 이미 데카르트주의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라부아지에도 -완전한 뉴턴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뉴턴의 기계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는 라부아지에의 적이었던 영국의 프리스틀리도 마찬가지였다. 뉴턴의 과학은 당시의 프랑스 과학자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마라는 그 유행에서 많이 비껴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라부아지에가 프리스틀리와 논쟁을 벌이기는 했으나 둘은 모두 뉴턴주의자였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눈에 데카르트의 송과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라의 <철학적 인간론>이나, 뉴턴의 광학을 비판하는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이 받아들여질리 없었다. <노예제의 사슬>과 같은 책을 저술한 마라의 정치적 성향도 이러한 학술원의 거부에 일조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놓고 볼 때 마라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한 것은 단순히 마라에 대한 개인적/정치적 억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라의 의사/ 과학자로서의 경력은 유행에 크게 뒤쳐져 있었고 이미 성공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마라는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었고 그 주범으로 라부아지에를 꼽았다는 것이다. 마라가 실제로 1788년의 저술을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한 열정을 접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이 회원에 선출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아니면 때마침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그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성향이 동조해 과학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마라가 친구들에게 프랑스 과학학술원이 자신을 음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보아 과학자로서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그의 자괴감이 컸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 원한이 모두 라부아지에에게 집중되어 마라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를 단두대에 올린 것이 과연 사실일까. 20여년을 과학자로 성공하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력했던 인물이 실패했다면 그 원한이 깊을 만도 하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단순히 마라의 원한으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직접 적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직후 <Offering to the Country 조국에 제안하는 글>을 발표했고 1789년 9월부터는〈The Friend of the People 민중의 친구〉라는 신문의 편집 일을 맡으면서 가장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의 유력한 대변자로 떠오르게 된다. 신문을 통해 그는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을 민중의 적으로 선언했고 이러한 정치적 글 속에는 라부아지에를 자신들의 적으로 선언하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라부아지에 개인에 관한 것이었는지 프랑스 과학학술원에 대한 분노가 라부아지에를 통해 표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관계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는가?

첫째, 마라가 학술원의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어야 했다면 그것은 라부아지에가 아니라 자끄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 1746-1823)이어야 했을 것이다. 샤를은 발명가이자 화학자였고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소기구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습도계(濕度計)와 반사측각기를 비롯하여 몇 개의 발명품들을 개발했고, 그라버산드 헬리오스탯(Gravesand heliostat)과 파런하이트 공기량계를 개선했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 실험을 확인하기도 했다. 화학자로서 그는 이상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한다는 “Charles’ Law 샤를의 법칙”을 발견해 정식화했고(V1/T1=V2/T2) 이는 현재 “보일-샤를의 법칙”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바로 그 법칙의 원형이다. 샤를의 법칙은 1802년 게이 뤼삭(Joseph Louis Gay-Lussac)에 의해 정식화된 열과 기체부피에 관한 법칙의 기초가 된다. 샤를은 1793년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샤를은 마라보다 세살 어린 동년배였다. 마라가 프랑스에 돌아와 태양 현미경을 설계하고 이를 통해 발견한 불액의 존재를 발표한 시기가 1779년이었다. 이 출판은 학술원의 관심을 끌었지만 마라의 빛에 대한 이론은 뉴턴의 광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학술원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 당시 마라의 태양현미경과 불액의 발견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인물이 바로 샤를이었다. 샤를은 마라의 불액이라는 것이 단순히 몸 주위에서 데워진 뜨거운 공기가 빛을 굴절시키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샤를은 따로 메가스코프를 개발한 발명가이기도 했고 이를 통해 마라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샤를은 대중강연을 통해 마라의 실험을 조롱했고 마라가 그 강연에 참석해 둘의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실제로 마라는 샤를을 무대 위의 마술사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평하며 그에 대한 악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만약 마라의 학술원에 대한 감정이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를 처형시킬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면 마라가 혁명의 중심에서 정치적 권력을 얻어가던 당시 샤를 또한 단두대에서 처형당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해에 학술원의 회원으로 무사히 선출되었고 혁명 중에도 처형 받지 않았다.

둘째, 마라가 ‘민중의 친구’를 통해 1789년부터 라부아지에를 적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처형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게 된 계기는 학술원의 일과는 거리가 먼 ‘Paris Wall 파리 장벽’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과학적 활동 못지않게 정치적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 당시의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는 공중보건, 대포제작, 학교교육을 위한 위원회뿐만 아니라 심지어 병원, 교도소 시설 개량을 위해 설치된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블루아 근처의 영지에서 모범적인 농장을 운영하여 과학적 영농법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했고, 1785년 농업개선을 위한 정부 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여러 가지 영농법을 추천한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입안했다. 한편 오를레앙 지방에서는 저축은행, 보험협회, 운하·창고제도, 조세개혁 등의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790년에는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위원회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 중에도 활발히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1789년 삼부회가 재개되자 라부아지에는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위원들의 강령을 초안했고, 파리 코뮌(자치사회)위원으로 온건파정당에 가입했다. 그 후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행정관으로 국가재정과 농업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하나의 딱지가 붙어 다녔다. 라부아지에는 전직 세금징수관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관리직이기는 했으나 라부아지에는 페르메 제네랄레(farmer’s general)의 멤버였다. 한명의 세금징수관 밑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징수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둬들였다. 세금징수관들은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왕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일쑤였으며 당연히 프랑스 국민들로 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페르메의 전 멤버의 딸이었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라부아지에의 처형은 그의 이 딱지로 인해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실제로 그와 장인의 전력은 혁명 기간 중 라부아지에를 권력으로부터 의심을 사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감시와 함께 공격이 계속되었다.

파리 장벽이란 파리를 드나드는 상품들에 관세를 메기기 위한 조치로 라부아지에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는 파리 주위에 커다란 장벽을 설치하면 주류나 담배의 밀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3백만 리브루를 들여 레독스라는 건축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이 제안은 시민들로부터 엄청나게 적대적인 반응을 유도했다. 거리에는 파리 장벽을 반대하는 문구들이 도배되었다. 시민의 삶에 적대적이었던 라부아지에의 이런 제안은 개혁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던 마라의 극렬한 반대를 유도했다. 1792년 마라는 글을 통해 라부아지에의 귀족적 성향을 비판했고 그의 부정을 폭로한다. 마라의 라부아지에에 대한 비판이 비록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마라가 샤를을 처형하지 않은 것이나 파리 장벽 사건을 계기로 라부아지에에 대한 공격의 수위가 상승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악연은 사적인 감정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큰 듯하다.

셋째, 마라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마라는 복잡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1793년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인에 의해 욕실에서 암살당했다. 마라는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자주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중요한 점은 그의 죽음 뒤에도 라부아지에의 사형 집행이 중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혁명이 지난 2년 후인 1791년에 국민의회가 징수인 조합의 폐지를 보고하고 이후 2년의 여유를 주어 조합재정을 청산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세금징수관들은 이 작업을 매우 느리게 진행시켜 2년이 다 지나도록 청산하지 않았다. 이 불필요한 지연과 또 다른 이유에 의해 그들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1793년 11월에 한 의원이 이들의 체포를 요구했다. 국민의회는 관례에 따라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모든 세금징수관들의 체포를 명령한다. 문제의 한 의원이 마라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마라는 1793년의 7월 13일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1793년 말 체포된 세금징수관들은 1794년 5월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이 났고, 라부아지에는 장인을 비롯한 27명의 다른 세금징수관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5월 8일 오후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라부아지에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재판 중에 라부아지에가 프랑스에 커다란 과학적 공헌을 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탄원이 있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라부아지에가 진행시키고 있는 중요한 실험이 완료될 수 있도록 판결을 일주일 지연시켜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고도 하나 집행관이었던 꼬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로 탄원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마라가 살아 있었어도 라부아지에는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의 처형은 마라의 고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관이라는 직업적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라가 살아 있었으면 라부아지에가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마라는 당통을 동지로 생각했고 당통은 관용파로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와는 정치적인 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안위원회는 1794년 봄 좌파세력(에베르파)과 우파세력(조르주 당통의 추종자들인 관용파)을 모두 제거했다.

이상의 사실들을 조합해 보았을 때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첫째, 마라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째, 그의 죽음을 프랑스 과학학술원에 대한 상징적 가해로 보기도 어렵다. 라부아지에가 학술원의 중심인물이기는 했으나 그는 학술원의 대표도 아니었으며 학술원의 회원들 중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인물은 라부아지에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라그랑쥬도, 라플라스도, 샤를도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프랑스 과학에 대한 탄압인가?

많은 과학사가들은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과학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겼다. 물론 공포정치 기간인 1793년 과학 학술원도 다른 모든 유사한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폐쇄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과학학술원은 왕에 의해 세워진 조직이었다. 대혁명의 기간에 왕권에 의해 세워진 기관들이 폐쇄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대혁명의 기간에 물리학이나 수학에 대한 집중이 생물학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에 자연사 박물관이 설립되었고 비교해부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며 이후 프랑스의 실험생리학 전통이 자리 잡게 된다. 자연사는 대혁명 기간에 정립된 교육 시스템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당시의 교육시스템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지식을 식물학(botany)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원시인류가 자연에 접하면서 약초와 식용식물을 구분하는 섬세한 관찰을 통해 이루어낸 가장 원초적이지만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사에 대한 교육은 원시인류가 과학적 방법을 알아간 방법을 답습하며 학생들을 자연과 친숙하게 하는 좋은 시작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사에 대한 강조는 대혁명 이후 퀴비에가 자연사 박물관에 자리를 잡고 프랑스에서 자연사 연구의 학풍을 세우는 기반이 된다.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에 대한 강조에서 디드로, 콩도르세 등의 낭만주의적 유기체론을 차용하며 생물학적 학풍도 강조하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생겨났지만 이것을 과학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전문 교육 기관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1794년 전문 기술교육을 목적으로 창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뉴턴주의 과학과 수리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교 당시 400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는 당대 일류의 과학자들이 교수진이 되어 학생들에게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라플라스,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라그랑주, 베르톨렛, 결정학자 아위 (René Just Haüy, 1743-1822) 등이 모두 당시 이 새롭게 창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들이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배출하면서 그 동안 수리과학과는 다른 전통 속에서 성장해온 경험과학 분야를 수학화 시키고 뉴턴 과학을 고도로 발전시키며 푸아송 , 푸리에, 게이뤼삭 등의 과학자를 배출하는 산실로 자리 잡는다.

라부아지에를 단두대로 밀어 넣은 것은 그가 가진 과학적 업적을 누군가가 질투해서도 아니고, 공안위원회의 과학에 대한 탄압도 아니었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아버지가 사준 귀족의 지위를 이용해 36살의 나이로 세금 징수원이 되었다.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모은다는 구실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를 단두대로 밀어 넣은 것은 세금 징수원이라는 그의 과거행적 때문이었다. 이회창의 아들이 가진 병역문제가 대통령 선거의 변수로 작용했듯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복잡한 정치구도 속에서 한때는 혁명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원이었다는 과거의 전력으로 인해 민중의 적으로 몰려 처형된 것이다. 이는 당시 함께 처형된 인물들 중 전직 세금징수원이었던 그의 장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함께 처형된 이들 중 과학자는 없었다.

세금징수원의 죽음

많은 과학 교과서나 학생용 과학사 서적들은 라부아지에라는 천재적 과학자가 억울하게 단두대에서 처형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조금 고급서적이라고 불리는 저작들은 유치하게도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원한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흥미 위주의 과학사 서술을 시도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추적해 보면 당시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그는 과학자로서 처벌된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원으로 얻은 부에 대해 처벌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처형이라는 방법이 잔인하기는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능력 때문에 그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교육학적으로도 나쁘다. 그렇다면 유능했던 친일파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와 함께 처형된 27명 모두가 억울해야 할 것이다. 좁은 소견으로 추적해 본 역사는 라부아지에가 온당 받을만한 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특히 마라와의 원한 관계에 의한 처형이라는 에피소드는 성립될 수 없다. 이 점은 위에서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 죽은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원으로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대과학자의 비극적인 죽음도 아니었고 프랑스 과학에 대한 탄압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유를 평등을 갈망하던 민중들의 분노와 대혁명을 이끌었던 정치인들 간의 권력 투쟁 속에서 그렇게 죽었을 뿐이다.

참고문헌

1. Jean-Paul Marat The People’s Friend, Ernest Belfort Bax, London, 1900, 이 책은

http://www.marxists.org/archive/bax/1900/marat/index.htm 에서 볼 수 있다.

2. Jean Paul Marat: His Life http://seni.club.fr/life_of_marat.html

3. The Great Asymmetry, Stephen Jay Gould, Science, 1998: Vol. 279. no. 5352, pp. 812 – 813.

4. Science in the French Revolution, Charles Coulston Gillispie, PNAS 1959 45: 677-684

5.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Crisis of Science, http://www.bookrags.com/research/the-french-revolution-and-the-crisi-scit-041234/

6. Science, Education and the French Revolution, L. Pearce Williams, Isis, Vol. 44, No. 4. (Dec., 1953), pp. 311-330.

7.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자료들은 엠파스의 백과사전을 이용했다.

8.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라가 주고받은 편지는 http://franklinpapers.org/franklin/framedNames.jsp?ssn=001-56-0180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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