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의 의미와 학풍이라는 것

치사하게 한국의 열악한 대학원생에 대한 처우를 미국이라는 부자나라와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두 나라가
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을 발전시켜온 역사가 다르고, 두 나라의 문화에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나라가 대학원에
투자하는 자금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대한민국에서의 좌우의 토론은 유럽식 시스템과 미국식 시스템 사이의 줄다리기로
시작되어 우왕좌왕하는 것이지만, 그 어떤 시스템도 직수입되어 제대로 적용되는 법은 없다. 언제나 상황에 맞게 또 우리의 현실에 맞게 무엇인가를 건설해 나갈 여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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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게 인문계 대학원생들의 교수들에 의한 폭력적 처우를 목도하면서 그보다는 더 배부른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처우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적어도 우리가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보다 얼마나 배부른 삶을 영위하고 있느냐는 자각을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자각이 없다면 우리의
외침은 배부른 부르주아 노조의 유희와 같은 파업 이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로 직시하면서 우리보다 빈곤한
이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목소리도 대중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도대체 대학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앞뒤 모두 자르고 대학의 경쟁력의 기원을
결론짓자면 그것은 단연코 대학의 연구능력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대학이 입시경쟁에 몰두함으로서 유도되는 것도 아니고, 인기
교수들이 속출함으로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되는 역사다. 언제나 우수한 대학들은
그들이 배출한 박사급 인력 혹은 그들이 흡수한 우수한 교수들, 혹은 그들이 발표한 연구의 파급효과로부터 유래되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독일의 대학들이 발생학을 중심으로 생물학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독특한 대학 제도에 있었다. 어느곳에나 부정부패가 존재하듯이 그들에게도 교수들 간의 정치적 암투가 있었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대학들엔 적어도 학풍이라는 학문의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대학이라는 제도가 우리의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대학이라는 제도의 상당
부분을 서구에 빚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전하던 시기에도 우리에겐 학풍이라는 것이 있었다.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와 같은 이야기가 불과 150여년 전의 일이다.

남미로부터 유입된 금과 은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성을
획득한 유럽이 중국으로부터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대학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학풍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대학이라는 제도는 이 당시 유럽에서 시작된 대학 제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나아가 학회라는 제도 역시 과학이
발달하면서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된 왕실학회를 시작으로 유럽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그 학회의 전통을 물려 받은 것이다.
서구로부터 대학이라는 제도를 이어 받은 것은 쪽팔린 일이 아니다. 어차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다는 두
축조차 우리의 것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 전통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헛된 역사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에게 수입된
이 제도를 어떻게 우리의 실정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느냐는 문제일 뿐이다.

일본에서 과학이 그리고 학문이 발전한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미 모투 기무라와 이마니시 긴지에 대한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듯이, 외부에서 유입된 제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단시간 내에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응시키는 방법은 수입된 제도들이
성공했던 핵심을 찾아 그것을 그대로 따라해 보는 것이다. 방점은 성공했던 그 핵심을 찾는 일에 있다. 서구에서 무엇을 시작했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그것을 베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공한 제도가 있다면 우선 그 제도를 따라해 보고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키면 그뿐이다. 우리가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실패한 것은 첫째, 우리가 유럽 대학의 전통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둘째, 그것을 우리의 현실에 맞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대학의 학풍은 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성공에는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부단한 노력과 대학의 연구자율성을 보장해주는 문화의 안정적인 기착에 있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교수들이 연구의 자율성을 떠들어도 더이상 말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첫째, 대한민국의 교수집단이 썩었고 실력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교수들이 대학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고 나면
더이상 공부하지 않는 우리네 고등학생들을 욕하는 교수들은 스스로를 반성할 줄 모르는 양아치에 불과하다. 내 보기엔 우리네
교수들은 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친 후론 놀고먹는 우리네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학생들은 스스로 등로금을 내며 대학에 다니기에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만, 국가의 녹 혹은 학생들의 피 같은
돈을 먹고 사는 교수들의 방종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대학에선 그 어떤 학풍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 본 교수들이 있었다면 내가 이런 욕지거리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외국물을 먹고 박사학위를 따왔다는 교수들이 하는
짓이라곤, 외국의 최신 유행을 주시했다가 최신서적 몇권을 번역하거나, 외국의 학자들이 진행중인 논쟁을 그대로 직수입하는 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직수입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외국에서 진행중인 논쟁의 내용이 아니라, 논쟁이라는 행위 혹은 문화 그
자체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국학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맞추어 진행중인 논쟁이 아니라, 학문하는 자세 혹은 그
문화인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인문학계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과학계도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문학과는 다르게 과학은 보편적이라는 탈출구를 가진 듯 하지만 과학이라는
제도에도 문화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제 한번 이공계의 연구실에 토론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보려는 시도를 해본
대학이 있는가? 아니면 학회라는 곳에서 양복을 입은 교수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는 대신, 모두가 편한 복장을 하고 교수와
대학원생의 구분 없이 자유로운 대화를 하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세미나 연사랍시고 불러 놓고 세미나가 끝나면
교수들끼리 우르르 몰려나가 술을 마시는 일 빼고, 그 세미나 연사의 지식과 경험을 대학원생들에게 통째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과학도 인문학보다는 덜하지만 해당 국가의 문화적 영향력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실험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이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해당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밤의 과학이다.

이제 대학원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오자면 다시 학풍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대한민국엔 학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의
어느 과의 입시경쟁률이 치열하다는 이야기는 들을지 몰라도, 어느 대학의 어느 과는 어떤 학풍이 유지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일이 없다. 게다가 때로는 각 대학의 학풍이 충돌하면서 제대로된 진검승부가 펼쳐지기도 해야할 터인데 우리네
교수님들은 논쟁이라면 언제나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거나, 혹은 논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격투기를 벌이거나, 혹은 상대도 없는
허공에 대고 헛소리를 해대거나, 때로는 보기 민망하게 상대방의 태도나 나이에 대고 욕을 하는 지랄을 하기도 한다. 논쟁이란
논리와 논리가 마주치는 학자들의 진검승부이며, 학문 발전의 원동력이다. 대한민국에 학풍이라는 것이 생겼느냐의 여부는 훗날 진정한
논쟁이 이 땅에서 나타나기 시작할때에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학 제도가 이미 실패했고,
우리에게 학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외국에서 찾아온 세미나 연사나 외국
대학원생들에게 언제나 서울이라는 복잡한 공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장의 연설을 하곤 했었다. 나도 나름 애국자라서,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미학적으로 불유쾌한 서울의 건물들과 그 풍경을 불평하는 외국인들에게 열 뻗친 눈으로 쏘아 붙히곤 했던
것이다. 뉴욕과 같은 도시나 LA와 같은 도시를 서울과 비교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백년을 외부의 침공 없이 평화롭게
그리고 느긋하고 계획성있게 발전해온 그런 미국의 대도시들과 전후 50년도 안되는 시기에 급하게 급조해야만 했던 서울의 모습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시가 건설된 역사와 그 시간을 생각한다면 내 보기에, 서울이 뉴욕보다 백배는 낫다. 특히 밤이
되어도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걸으며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서울이, 밤만 되면 차 속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미국의 대도시들보다 백배는 낫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 이해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새로운 제도를 건설하는 일이다.
자기정당화는 적당히 해도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자기정당화를 넘어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함으로서 더욱 비약적인
도약을 감행 할 수 있게 된다.

학풍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공계 기피현상이라는 어줍잖은 현상때문에 나라가 비상을
건 일이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고등학교의 이과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과와
이과의 비율이 일치하는 현상이 내겐 더욱 기이해 보인다. 과학과 공학이라는 특히나 압축화되고 전문화된 분야의 전문가는 반드시
많을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공계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질이지 양이 아닌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호들갑을 떤 것은,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의 철학 속에서 이공계가 발전한 이 나라의 뼈아픈 과거에 있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
땅의 과학은 경제개발 논리로부터 수입되어 발전했다. 이 점에서 실학자들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동도서기라는 말로부터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생각이 겨우 도구였다는 슬픈 현실이다. 과학도 문화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문화를
수입한 주제에 과학이라는 문화를 수입하지 않으려했던 그 자존심에서 나는 알량함을 읽을 뿐이다. 과학을 수입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본주의와 서구의 인문학과 철학을 수입했던 것과 같은 사상적 식민성이 수입되는 것은 아니었을텐데도 우리의 선조들은 그리고
우리의 윗세대들은 때로는 그것을 조선의 정신을 잃는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였고 때로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학의 현주소다.

고등학교 이과 학생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김구의 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은 국가가 발전하면서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경로다. 이공계의 힘은 양이 아닌 질에서 비롯된다. 이공계로 가는 학생들이 줄어든다면 국가로서는 환영해야만 하는 호조인 것이다.
그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질적으로 높은 교육을 받게 하면 그 뿐이다. 그런데 이 놈의 정책가들이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이라고
내세운 것이 이공계장학금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학부생들에게 지급되었다. 그리고 이공계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들은 고스란히 치의대로
빠져나갔다. 돈은 쓰임새가 중요한 법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예산을 집행하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 유행에 따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근시안적으로 이공계 학부생을 늘임으로서 이공계 기피현상을 제거하려 했던 탁상행정은 수조원의 예산을 날려버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학의 경쟁력은 대학원으로부터 나오고, 그 경쟁력은 학풍이라는 문화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대학교(University)라는 이름을 걸고 대학을 운영하려는 설립자라면 대학원을 지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어야만
한다. 쉽게 말하자면 대학원을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없는 대학은 대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대학원을
운영할 수 없는 모든 대학은 대학(college)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대학원에 가서 박사가 될 필요는
없지만, 대학교라는 이름에는 연구라는 목표가 걸려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엔 너무나 많은 쓸데없는 대학교가 많다. 어차피
현재의 초등학생들이 대학에 갈 무렵엔 그 대부분이 파산 할테지만, 지금부터라도 대학원생에 대한 처우개선을 통해 더이상의 양적
발전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질적 혁신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공계 장학금은 실패한 정책이고 더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 돈을 결혼한 대학원생과 박사과정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전문직 연구원들에게 돌려야 한다. 모두가 박사를 통해
학문적 성취를 달성하려는 국가는 결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기반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문제는 대학원이라는 곳에 학문에 대한 그 어떤 목표도 없는 떨거지들이 너무나 많다는 데에 있다. 그들이 갉아먹는 예산이
학문적 성취를 목표로 하는 다른 이들의 발전을 저해한다.

학부생들에게 지원되는 징학금은 반드시 대학원생들과 전문직
연구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연구실이 전적으로 대학원생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전문화된 연구원들의 존재는 해당 연구실의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문제는 대한민국 이공계의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일용직 근로자들 정도의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그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없고, 또 그들 중에서 전문화된 기술자들이 등장할 수 없다면 절대 과학이 발전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지원은 학부생들에게 헛되게 지급된 이공계 장학금을 회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입학하면서부터
의대진학을 준비하는 이공계 학부생들에게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 대한민국엔 의사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렇게 강력한 이익집단으로
포섭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 돈은 비록 학문적 성취감은 없지만,
대학원생들과 연구실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는 연구원들에게 지급되어야 옳다. 그들이 불행하다면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가지 더 우리가 성취해야만 하는 일은 대학원생의 숫자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처럼 돈이 없어서 포스트닥이 해야 하는
일을 대학원생이 해야 하는 실정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엔 대학원생이 너무나 많다. 차라리 대학원생의 선발을 엄격하게 하고,
그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 훨씬 발전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과학은 양적으로 발전하는 학문이 아니다.
질적인 발전이 훨씬 경제적이고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이에 수반되어야 할 여러가지 제도적 측면이 더 있지만 우선 이 정도로로도
많은 것들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학풍을 건설하는 것이다. 학풍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학교가 변해야 한다. 대학교의 변화는 학풍을 향한 걸음이어야만 한다. 학풍은 학문에 목숨을 건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학문에 목숨을 건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을 엄격하게 가려내고 지원할 제도적 장치와 예산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은 그리 가난하지 않다. 이공계 장학금 따위의 돈이 급조될 수 있다면 꾸준히 오랜 기간 뛰어난 소수의 대학원생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연구원들에게 투자하는 것으로 변화가 달성될 수 있다. 그렇게 발전이 이루어지면 과학자들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그들의
위상이 높아지면 많은 고등학생들이 다시금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공계 기피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 의외로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문제는 관성에 처박힌 이 땅의 교수집단과 행정편의주의에 사로잡힌 이 땅의 행정관료들이 이런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데에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애국지사들은 이 땅을 떠나거나 마음으로부터 지워버리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아무리 그 첫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우리의 역사다.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는 좋은 역사적 교훈을 배운 셈이다. 문제는 그 교훈을 어떻게 우리의 일상으로 체득화한 후 새로운 제도를
건설하느냐에 있다.

17 thoughts on “대학교의 의미와 학풍이라는 것

  1. 핑백: 시퍼렁어네
  2. 공학도 학부생 입장으로써;; 참 암울하군요;;

  3. 잘 읽었습니다. 제 관점에서 본 이야기를 덧 붙이겠습니다.

    제가 다닌 한동대학교에 장점이 있었다면, 교수와 학생들이 스스로 ‘변방-지방’이라고 생각하면서 ‘중심-서울’을 동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많은 ‘지방’ 대학생들이 끊임없이 ‘학벌세탁’, 그러니까 ‘편입’을 모색하고 있더라구요.) 오히려 스스로 너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현실과의 괴리가 심해진 자부심이 많아서 문제였다면 문제였죠. 그런데 그러면서 저희 만의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 같긴 같더군요. (교수의 연구 실적과 학문적 방향, 이라는 학풍은 미미 하지만 말입니다, 워낙에 ‘실용 대학교’를 지향하는 학교다 보니깐..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각자 대학이 어딜 따라하거나 동경하지 말고 자신만의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목소리.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갖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과 부딪히게, 논쟁을 하게 마련이지요. 너도 나도 목소리가 똑같은데 무슨 논쟁이 있고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선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교수들이 여럿 포진한 성공회 대학교가 학풍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유일 사립 공과대학교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 포항공대에도 학풍이 있지 않나 묻고 싶네요. (전 전혀 모르지만, 만약에 포항공대가 엠아이티와 끊임없이 비교를 스스로 하고 있다면, 그것 만큼 비극도 없겠네요.)

    제 생각으론 건물 몇 개 더 짓고, 돈을 더 끌어 들인다고 해서 대학교가 발전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돈 경쟁으로는 돈 많은 미국 대학을 따라 잡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으로 승부를 봐야지요. 엄청난 권력을 지닌 알렉산더와, 유일하게 맞짱 뜬 것이 디오게네스가 아니었습니까? 영화 < 물랑루즈>에서 니콜 키드만을 꼬신 것은 돈 많고 명예로운 공작이 아니라 시인이 아니었더랬습니까? (옆으로 새는 군요.)

    고려대학교는 이건희에게 철학 박사 학위를 주면서, 학교 안에 스타벅스와 TGIF를 끌어 들이면서, 영어 강의를 늘리면서 ‘민족고대’라는 학풍(?)을 다 날려 버린 셈이지요. 차라리 반대로 가면서 소비지향적이 되어 가는 신촌 앞을 욕하고 연대를(흔히 연고대, 를 경쟁관계로 놓기에 예로써 끌어 들였습니다..) 욕했으면, 고대는 고대만의 뭔가가 되었겠지요.

    * 공개 처리 하려다, 학교 이름이 이래저래 거론되어 덧글 보는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감정 자극을 할까봐 비밀글로 남겨 둡니다.

  4. 못난 글 아니구만요. ^^ 저같아도 그 아랫글을 쓴 넘한테는 좀 쓴소리와 욕을 번갈아가면 했을 듯 합니다. 그런넘들은 좀 같잖아서…

  5. 좋은 의견입니다. 성공회대에 관해서는 공부가 좀 필요할 듯 합니다. 확실히 좌파학교인것 맞지요. ^^ 전 성공회대를 아주 사랑합니다. ㅋㅋ 포항에는 학풍따위 없습니다. 그런건 기대 안하는 게 좋아요. 성공회대라..공부를 좀 해보고 본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리해야 겠습니다.

  6. 대한민국 대학의 학풍 부재에 대해서는 저도 좀 아쉬워요. 외국의 명문들을 TV에서 기획다큐프로그램에서 보면 각각 묘하게 그 대학만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그 분위기가 더욱 대학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도 하고, 열망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그에비해 우리나라는 뭐랄까… 대학의 분위기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 성향의 비빔밥같은 느낌이랄까요?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느낌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젊은이들의 성향이 그대로 담기는 듯 해요.암튼 그렇습디다.
    매년 오르는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졸업도 하기전에 거의 대다수가 빚쟁이 신세가 되는 현실속에서 < 학풍>이라는 클래식컬하면서도 중요한 과제에 몰두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의문이기도 하구요. 저는 뒤로 돈 못갚는 채무자들에 목숨 버리게 할 만큼의 무서운 협박을 해대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광고때리는 사채업자들 만큼이나, 백년지대계를 수단으로 해서 장삿속을 채우는 사립재단들의 정신자세가 참 짜증납니다.

    세계여행을 즐기는 미국사는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서울 야경만한 곳이 없다구요. ^^

  7.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 완전히 공감합니다. 제 생각에도 몇몇 학교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학풍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8. 평상시 가졌던 생각을 정리하셔서 추천 때립니다. 대학교가 크게 배우라고 대학교인데… 크게 배울 생각도 없으면서 대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고, 80%가 넘는 사람들이 대학물을 먹는다는 것도 너무나 웃기고…

    지원같은거 없을 때에도 자기가 좋다고 남들 반대 무시하며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냅두고, 당근이나 써서 이공계로 애들 불러들이는 정책이 못마땅해서 정부에 항의 투서 비슷한 것도 몇 번 보냈었습니다.

    당근에 끌려서 이공계 지원했다가, 현실을 보고 놀라서 다들 의대/치의대로 가거나 고시 준비해서 공무원하거나 변리사해서 돈벌겠다고 나가더군요-_-;; (도대체가 이공대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애들이 변리사를 해서 퍽이나 잘 하겠습니다=_=;;) 이공대 문제를 제대로 겪어 보지도 못한 애들이 공무원 해서 참…제도 제대로 바꾸구요.(프로젝트 관리만 정상적으로 되면 원이 없겠습니다. 이건 대학원 들어오자마자 배우는 것이 불법회계야-_-;; 썅)

    나라 돈 빼다가 공부시켜놨더니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의사/치의사 (그것도 돈되는 과만 한다죠)로 빠져나가는 노무 시키들을 함부로 욕하지도 못하는게…그렇게 흐르도록 되어 있으니까…

    답답하긴 하지만…앞으로라도 잘하면 되는데…이노무 나라에는 ‘철학’이 없어서…언제나 잘 할려는지…

    예~전에 교육제도와 관련해서 쓴 글이 있지만 오래전에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과 분노로 쓴 글이라 트랙백은 부끄러워서 관둘랍니다-_-;;

  9. 좋은 내용인 것같아, 담아 두고 싶어서 복사해갑니다.
    출처는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10. 참 가슴아프지만 속 시원합니다. 학풍을 가진 대학으로, 공부할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 오고싶어하는 곳으로 대학이 변해야하고, 교수들 집단이 변해야하고, 국가의 정책의지도 변해야 한다는 걸 백번 공감합니다. 어줍잖은 생각이지만 님이 가진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당국자가 정책집행자들이 하루빨리 생겨나기를 기원해봅니다.
    저는 님이 한탄해마지않는 대학, 어문계 전공 대학을 졸업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 치열함에 마음속으로부터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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