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을 위한 사명 (Mission to Convert)

앨렌 오(H. Allen Orr)는 흥미로운 학자다. 르원틴의 제자의 제자인 그는 집단 유전학을 공부했고 진화론의 가장 흥미로운 주제인 종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다. 그는 집단유전학적 이론을 실제로 초파리유전학을 통한 실험으로 증명해내고 있으며 그의 책 <Speciation>은 이미 오래 전에 진화론을 공부하기 위한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그는 대중서를 한 권도 쓰지 않았는데 다행히 대중서에 대한 많은 서평을 쓴다. 이미 다니엘 데닛과는 한바탕 혈투를 벌인 바 있고, 그의 비판에선 도킨스도, 데닛도, 리들리도 핑커도 심지어 굴드도 자유롭지 않다. 르원틴이 사조라 그런가, 르원틴의 대중서에 대한 서평은 보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로 자신의 사조도 깔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여기저기 치고 박는 모습이 꼭 나를 보는 듯도 하고, 그가 서 있는 전통이나 학문을 바라보는 태도, 게다가 다양한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에게 서구의 진화학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신을 약간은 깰 수 있게 해준다. 앨렌 오와 같은 깊이 있는 학자가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지금의 나에게는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래디컬하고 깊이 있는 제대로 된 몇 안되는 학자임에 틀림 없다. 직역 및 의역이 좀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이 몇군데 있었다. 깊은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원문과 대조해 가면 읽으시기 바란다. 여하튼 약속 지켰다. 요즘 참 게을러져 있는데 다시 열정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엔 파리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나도 참 놀 땐 확실하게 노는 듯..그래서 내 말이 이승환 수령이 참 열심히 산다는 거다. 나처럼 게으른 놈이 학자된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약속 지켰다. 몇명이나 읽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니컬하고 래디컬한 학자의 어투는 최대한 그대로 살렸다. 오히려 영어로는 더 잔인한데 지보다 수십년은 선배일 도킨스에게 해대는 말은 거의 욕 수준이다. 미친놈. 제대로 미친 놈이다.

마음대로 퍼가시되 출처만 분명히 해주시길.


 

개종을 위한 사명 (Mission to Convert)

[footnote]이 글은 뉴욕타임즈 서평지에 실린 앨런 오의 서평을 번역한 것이다. 세 명의 생물학자가 쓴 과학과 종교에 관한 책에 대한 비평으로 리쳐드 도킨스의 The God Delusion(만들어진 신)>을 비롯해서 발생학자 루이스 월포트와 생물학자 조안 러프가든의 책이 등장하지만 주된 비평은 도킨스의 책에 집중되어 있다.[/footnote]

H. 앨렌 오 (H. Allen Orr), New York Review of Books, Volume 54, Number 1 · January 11, 2007

종교에 대한 과학자들의 관심은 파상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처음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1859년이었다. 그 다음은 1930~40년대에 물리학 이론으로는 우주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양자역학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과학자들이 ‘지적 설계’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종교에 관해 펜을 들기 시작했다.

지난 해 종교에 관한 대중서가 몇 몇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출판되었다. 다니얼 데닛은 ‘종교에 관한 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한 <주문을 깨며 Breaking the Spell (2006)>를 통해 서막을 알렸다. 데닛은 믿음의 전파와 관련된 진화이론과 심리학 및 경제이론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다루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별다른 결론엔 이르지 못했다. 지난 달엔 세 명의 저명한 과학자들-모두 생물학자들이다-이 믿음에 관한 책들[footnote]The God Delusion
by Richard Dawkins

Six Impossible Things Before Breakfast: The Evolutionary Origins of Belief
by Lewis Wolpert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 Reflections of an Evolutionary Biologist
by Joan Roughgarden[/footnote]을 발표했다. 옥스포드 대학교의 찰스 시모니 석좌 교수인 리쳐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방대한 논쟁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런던 대학교의 저명한 발생학자 루이스 월포트는 <아침식사 전엔 불가능한 여섯가지>라는 책을 통해 -조금 산만하긴 하지만 – 믿음의 생물학적 기반에 관한 그의 시선을 보여준다. 비록 책은 안간에게는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것들(예를 들어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린다와 같은)에 대한 인과적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다는 것에 집중하고는 있지만, 월포트의 이 책은 종교와 도덕적 믿음의 기원에 관해서도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월포트는 인과론적 사고가 도구 제작을 위해 필요한 적응이었다는, 조금은 이상한 생각을 방어하려 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종만이 ‘이 폭풍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께서 저주를 내리신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에 대한 월포트의 태도는 잠정적이지만, 그는 종교에서 진지함보다는 혼란스러움을 바라보는 무신론자다.

반면 조안 러프가든은 종교에 몸을 팔았다. 스탠포드 대학의 진화학자였다가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그녀는 <진화와 기독교적 믿음>이라는 책을 통해 두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먼저 그녀는 그녀의 동료 신자들에게 진화론-진화론이 무엇을 알아 냈고, 무엇을 추측하며, 무엇이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녀는 성경이 진화론의 발견에 맞게 사물에 관해 말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건 야심찬 시도인데 -이 책이 매우 얆다는 것을 고려하면- 러프가든 스스로 기술했듯이 “진화학자들이 발견하고 있는 것들은 실은 기독교적 자연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라는, 별다르게 책에서는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말 때문에 더욱 그렇다.

1.

이 책들 중,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탁월하다. 첫째, 이 책은 가장 야심찬 기획을 담고 있다. 월포트나 러프가든은 그들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가상의 독자들-합리주의자들과 신자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도킨스는 독자들을 개종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footnote]여기서 글의 제목이 나왔다. 도킨스는 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개종(Convert)시키고 싶어한다는 뜻이고, 도킨스에겐 그게 일종의 사명(Mission)처럼 보인다는 뜻이다.[/footnote] 그는 종교의 적이며 왜 종교가 사라져야만 하는지 설명하고 싶어한다. 둘째, 도킨스는 다른 저자들은 꿈도 못꿀 방식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 잡는데 성공했다. 그의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그는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다.

도킨스의 첫번째 저서 <이기적 유전자(1976)>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진화론에 대한 입문서인 이 책은 다윈의 자연선택과 같은 이기적인 과정이 어떻게 호혜와 같은 이타성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한 혁신적인 결론들을 격조 있게 설명해낸다. 무엇보다도 도킨스는 이런 종류의 생물학-일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을 놀라울 정도의 명쾌한 산문으로 펼쳐낸다(내 생각에 이 책은 지금까지 쓰여진 대중과학서적들 중 최고의 작품이다). 다위니즘에 관한 책을 발표하던 도킨스는 최근엔 방향을 틀어 좀 더 광범위한 주제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무지개를 넘어(1998)>와 <악마의 사도(2003)>에서 그는 자연 세계보다는 경이로운 세계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우리의 감각에 대해서라던가 과학과 종교의 긴장관계에 관해 탐구한다.

그의 새 책은 이러한 이전 주제들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도킨스는 그가 지닌 과학자로서의 배경이 종교에 관해서도 매우 강력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만들어진 신>을 통해 이러한 결론을 매우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종교란 진정 넌센스에 불과하며 나아가 인류에게 유해하고 매우 사악한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표적은 조직화된 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 듯 하다. 게다가 그는 조직화된 종교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종파 뿐 아니라 온건파까지 모두 공격한다. 그는 아이들을 종교적인 전통 속에서 키우는 것은 아동학대라고 주장한다.

도킨스의 책은 그가 ‘신 가설(God Hypothesis)’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기술로 시작된다. 이 가설은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초인 혹은 초자연적 지성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존재는 인격적일 수도 있고(기독교의 경우) 비인격적일 수도 있다(이신론의 경우). 도킨스는 신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단지 어떤 종류의 ‘신 가설’이라도 결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의 결론은 그런 방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록 그의 표적이 매우 광범위하지만, 도킨스는 주로 기독교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아마도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 종교가 과학과 각을 세워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킨스가 가장 잘 아는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성공회 신자로 교육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만들어진 신>의 처음 몇 장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룬다. 도킨스는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에 관한 전통적 철학 논증과 다윈 이전의 생물학적 설계 논증을 설명하고 있다. “왜 신이 거의 확실하게 없는 것인가?”라는 장에서는 이 책의 주요 논증을 소개하면서 철학자 행세를 하는데, ‘신 가설’은 “확률 법칙에 의해 배제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최후의 보잉747기 책략(Ultimate Boeing 747 gambit)’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기본적인 창조론자들의 논증을 그가 바꾼 것이다. 이 논증을 현명한 방법으로 약간 비틂으로서 그는 전통적인 창조론자들의 논증과는 반대 결론에 도달한다.

창조론자들의 논증은 대충 이렇다. 생명체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다. 가장 간단하다고 알려진 박테리아조차 무생물에게서는 찾아 볼 수도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유기체는 복제가 가능한 DNA와 같은 유전자를 지닌다. 하지만 DNA만으로는 유기체를 만들 수 없다. 유기체는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단백질을 가져야만 하고 세포막과 같이 세포의 안과 밖을 구분시켜주는 지질 성분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모든 부분은 매우 잘 배열되어 있어야만 한다(세포막은 밖에, DNA는 핵 안에 등등). 창조론자들은 이처럼 정교한 복잡성이 설계자의 마음 없이 자연 선택에 의해 출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생명이 스스로 출현했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현할 가능성은 쓰레기 폐기장에 토네이도가 불어 보잉747기가 조립될 가능성과 같다고. 이러한 가능성은 제로까지는 아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큼 의미심장하지도 않다.

도킨스의 이에 대한 반박은 그 논증을 논증 자체에 적용시키는, 즉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유도의 기술과 같은 방법이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 생명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적인 수단을 배제하고 신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적인 설명보다 더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설계자인 신은 조직화된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설계할 수 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설계한 그 무언가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복잡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

간단히 말해서, 복잡한 대상만이 간단한 어떤 것을 설계할 수 있다. 정보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없다. 결국 설계자 신은 스스로 만든 생명체보다 훨씬 더 복잡해야 하고, 결국 그 설계자 신은 더더욱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논증이 -도킨스의 생각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신 가설’은 맞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확률이 낮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종교의 효용성에 관한 도킨스의 생각이 적혀 있다. 놀랄 것도 없이 그는 종교로부터 별다른 효용성을 찾지 못하고 있고, 특히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이며 종교가 사라진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란 우리가 지닌 도덕성의 원천도 아니요, 종교인들이 비종교인들보다 더 도덕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들이 더욱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신론자들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위협에 대한 다양한 예들로 우리를 즐겁게 하면서, 매우 종교적인 지역에서 나타나는 높은 범죄율에 관한 최근의 통계를 인용하기도 한다. 도킨스는 이러한 증거들로부터 종교에 의해 격앙되는 폭력과 테러리즘을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를 탓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극단주의는 점잖아 보이는 종교의 왜곡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신앙 없이도 도덕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방어하면서 그 자신이 만든 새로운 십계명을 제안한다(예를 들어 “네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입하지 말라”나 “너 스스로의 성생활을 즐겨라(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같은 식이다.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종교에 관해 논하고 있는 도킨스는 유니테리언과 낙태클리닉 폭파범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뎌 보인다. 좀 더 분명하지 않은 것은 신에 관한 질문에 대해 도킨스가 어떤 반대 의견조차도 (특히 그의 동료인 진화생물학자들로부터 나온)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처럼 종교와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소위 The Neville Chamberlain School에 속한 진화학자들에 관해 꿍꿍이가 있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도킨스는 그들이 솔직하지 못한 죄를 저지르고 있고, 정치를 하고 있으며 종교에 대해 온정적인 과학자들에게 수여하는 템플턴 재단의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도킨스가 유일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몇몇 과학자들이 그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킨스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는 나조차도 실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열성적으로 그의 운동에 동참해야만 하는 과학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만들어진 신>은 내가 보기엔 지나치게 왜곡된 부분이 많다. 비록 내가 한 때 도킨스를 전문적인 무신론자라고 부른적이 있지만, 그의 새책을 읽은 후론 그는 아마츄어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결론 내리고 싶어졌다. 나는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존재한다고 여기지도 않으며 도킨스의 결론도 일반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책은 사건을 확신하게 하는 데에 실패했다.

2.

<만들어진 신>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도킨스가 종교에 관한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진지하게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신에 관해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도킨스가 ‘종교적 사고’의 자격에 관해 매우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도킨스는 믿음을 그냥 간단히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에 관해 참을 수가 없는 도킨스는 아주 정교한 믿음의 표현조차 궤변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예를 들어 그는 신학자들의 꼼꼼한 추론을 견딜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단순한 종교는 야만적이고(그래서 심각하게 고려할 이유가 없고), 고등종교는 논리적이지 않다면(그래서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고) 결국 모든 종교는 심각하게 고려할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은 그 반대자들에게 당당하게 다가서지 못하게 된다. 독자들은 도킨스의 책에서 기독교나 유대교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고(그는 어거스틴이 이미 5세기초에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종교적 명제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논쟁의 역사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며(그런 논쟁들이 일상생활에 관한 통속적인 주장과 같은 것일까?), 교회와 과학 상호간의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한 역사도 읽을 수 없을 것이고(도대체 그는 교회가 비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의 등장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알고나 있을까?), 종교적 태도에 관한 아주 단순한 이해를 위한 어떤 시도도 찾아 보지 못할 것이다(도킨스는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그들 스스로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고 믿는 것일까?).

대신에 도킨스는 이 책을 매우 거만하게도 전문서도 교양서도 아닌 어중간하게 써버렸다. 도킨스의 지적 체계는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의 저자 더글라스 아담스나, 유명한 대중적 과학자인 칼 세이건의 그것과 닮아 있고, 이 두 저자는 실제로 그의 책에 매우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윌리엄 제임스나 루드비히 비크겐슈타인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이다. 이 둘은 모두 다윈이 죽은 이후에 태어났고, 아담스나 세이건보다 훨씬 심각하게 믿음에 관한 문제로 씨름했던 사람들이다. 도킨스는 “예수에게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어머니는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처녀였을까? 비록 이러한 점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질문이 여전히 확연하게 과학적 질문이라는 것이다”와 같이 지적으로 매우 진부하게 들리는 질문들에만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도킨스의 책에 공허하게 남아 있는 종교에 관한 이런 부분들은 분명 무언가에 의해 채워져야 하지만, 그의 책은 별 상관 없는 인용구, 그가 받은 편지들, 혹은 대부분 일화들로 채워져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가 인간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논하는 곳에서조차 그는 죽음에 임박한 친구를 보며 기쁨을 느낀다는 Abbott  of Ampleforth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논의를 방해하고 있다. 또한 그는 왜 네덜란드처럼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드문지에 관해 논하고 있고(그의 생각엔 종교적 선입견 때문이다), 어떤 간호사가 도킨스에게 신자들이 비신자들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라던가, 교황 피우스 10세가 추기경과 주교들에게 연옥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날수(각각 200일과 50일)를 허락해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모든 것과 이후 4페이지에 걸쳐 보이는 도킨스의 모습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독자들을 위해 인용구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을 이해시키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 인용구로 논증을 대신하는 모습이다.

3.

<만들어진 신>에 광범위한 논증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도킨스는 그런 걸 잘 못하는 것 같다. 특히 그는 철학적인 추론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난관에 봉착하곤 한다. 가장 분명한 것은 그가 이미 결론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도킨스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논증이라도 그가 원하는 결론에 이를 수만 있다면 사용하고, 다양한 논증들의 효용성은 그 논증들이 이끄는 결론에 의해서만 판단된다.

가장 중요한 예는 그가 이 책에서 지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꼽는 부분,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반박하는 그가 스스로 만든 반대 논증이다. 신에 관한 논증을 살펴보면서 도킨스는 이러한 논증을 반박하는 기초적인 논증을 소개하는데 기존의 증거들은 텅비어 있고, 모호하며, 유치하고 해로울 만치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궁극의 보잉747 논증’으로 돌아와서는 그는 갑자기 비평에 무관심해져서는 그의 논증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이라고 못박는다. 아니 도대체 왜 신에 관한 일련의 현명한 철학적 논증들만 비판에 노출되어야 하고 신에 관한 반대 논증들은 그 비판을 피해갈 뿐 아니라 압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의 논증들은 도킨스가 경멸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후자의 논증은 그가 선호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킨스가 스스로 자신의 책의 핵심 논증이라고 제시한 이 논증이 그가 까댄 신 증명 논증의 어떤 철학적 증거와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궁극적 보잉 747 논증’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그의 건강한 회의주의적 사고를 이용했어야 한다. 게다가 도킨스의 논증이 적어도 두 가지 잠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창조론자가 될 필요도 없다. 첫째, 다른 이들도 지적했듯이, 비록 그가 옳다면, 설계 가설은 당연히 틀린 것이고 그 대안인 자연주의적 가설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과학적 가설이 데이터가 아닌 철학적 논증에 의해 확증되었는가? 둘째, 누군가가  과학자로써 어떤 가설에서 ‘논점 선취(question-begging)[footnote]begging the question, 미증명된 가정 근거의 오류 혹은 논점 회피 혹은 논점 선취라고도 한다.

미증명된 가정 근거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는 어떤 전체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정하고 논증하는 것이다.

http://www.rathinker.co.kr/skeptic/begging.html 를 참고할 것.[/footnote]의 오류’를 발견했다는 사실-도킨스가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라고 물었던 것처럼-만으로 그 가설에 진리로서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결론이 모든 것이 어떤 초월적인 정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비참한 우주적 사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분명한 논점 선취의 오류다. 우리가 만족함을 찾는 설명들은 설명 그 자체에 관해서보다 우리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도킨스는 왜 물질과 자연법칙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그의 엄청난 가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일까? 왜 그것은 논점선취의 오류가 아닐까?

종교가 선행을 장려한다는 생각에 관해 도킨스가 논하는 부분에서는 이중 잣대로 인해 논점이 모호해지고 있다. 도킨스는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사는 주들이 오히려 더 높은 범죄율로 고통받고 있다는 통계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인 스탈린과 그 동지들이 범죄율을 잘 통제했다는 제안에 대한 그의 반응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는 사악한 지도자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양 진영의 불법의 정도를 집계하고 잇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다고? 바로 45페이지 전에 우리는 그러고 있었다.

철학과 관련된 도킨스의 문제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실패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를 구성하는 엄청난 문제들-명료함의 경계에 놓여있거나 명료하게 만들기 가장 어려운 궁극적 의미에 관한 문제들-에 관한 도킨스의 사고는 그저 흑백 논리일 뿐이다. 누군가 종교에 관한 난해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도킨스는 거의 즉각적으로 종교를 우익 근본주의자들이나 성서적 문자주의로만 인식한다. 다른 좀더 미묘한 가능성들-이신론의 다양한 면모라던가, 신비주의, 특정 종교와는 상관없는 영성주의 등-은 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도킨스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진지한 방법으로 걱정할 만큼 상상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다윈을 의심하는 이들에 대한 도킨스의 주된 비판은 그들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눈보다 못한 기관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은 진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도킨스에겐 진화의 놀라운 경로를 상상할 수 없는 자들일 뿐이다. 어떤 경우던 상상을 실패하는 것으로부터 고통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의 일부는 그 누군가가 스스로의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이해하할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임스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인물들이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도킨스가 회피했던 가능성-실수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훨씬 재미있는-을 이해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종교에 관해 더 치열하게 투쟁했다고 결론-도킨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내리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4.

이런 철학적 문제들을 제쳐두더라도 종교는 세계의 유해한 권력일 뿐이라는 도킨스의 주요한 경험적 주장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만들어진 신>을 통해 도킨스는 우리에게 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공포들-전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 테러리즘의 성횡, 아이들의 마음을 닫는 일, 비관습적인 성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한 탄압-을 상기시킨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들을 보며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우리 모두 동의한다. 종교는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무엇과 비교해서 나쁘다는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도킨스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종교의 결과를 검정하는 것은 여러 종류의 다른 비교를 포함해야 할지도 모른다. 종교의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 신자와 무신자의 행동, 등등. 도킨스각 각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태도는 대체로 종교의 효용성을 무신론의 이론성과 비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무신론 모두를 효용성의 측면에서 혹은 이론성의 측면에서 비교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 둘을 모두 이론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도킨스가 이런 작업을 제쳐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모두를 효용성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좀 더 수월한 일이다. 그리고 적어도 종교와 무신론의 제도를 고려해보았을 때, 역사적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무신론도 천사의 한쪽 날개로부터 등장한 것이라고 기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footnote]무신론이라는 제도도 결국 사악한 종교의 반대편, 즉 천사처럼 선한 얼굴을 지닌 채 세상에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스탈린이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신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footnote]. 도킨스는 (1) 20세기가 세속화의 실험이 진행된 시기라는 점과 (2) 그 결과가 세속적인 사악함,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욱 사악한 그런 것이었다는 양면적인 사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도킨스의 난관은 부분적으로 그의 세계관이 빅토리아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이들이 눈치 챘듯이 오늘날의 토마스 헉슬리다. 그리고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는 제도적 무신론의 잔인함을 목도해 왔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미 발생한 이 범죄를 모른 채 하려고 한다. 그것이 무신론에 의해 고무되었다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의 잔인함이 그의 무신론으로부터 자극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비록 이 말이 부분적으로 진실이라 해도, 종교적 제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던 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교회가 나찌와 무시무시한 협상을 했던 이유가 그 종교성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어쨌든 간에, 신부와 수녀들에 대한 스탈린의 고문(십자가형을 포함)과 학살이나, 마오쩌둥이 카톨릭을 박해하고 남아 있던 모든 불교를 조사했던 것은 그들의 무신론과는 연관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기독교의 제도나 공산주의도 이러한 조치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도킨스는 그들의 죄가 지닌 심각성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있는 듯 하고, 이러한 심각성은 보통 교의에 헌신하는 종류의 이념적 행위 때문에 발생한다.

교회에 다니는 요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부도덕하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럴지도 모른다. 게다가 C.S 루이스는 가장 널리 읽혔을 대중적 신학책인 <Mere Christianity>를 통해 그럴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음서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루이스는 고통받은 영혼들이 불균형적으로 교회에 끌려 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따라서 합당한 대비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동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종교를 찾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도킨스의 대안적인 논리 아래에서는, 의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더 아프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의학의 죄악을 상징할 뿐이다[footnote]의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 환자(=교회에 다니는 신자) vs 그렇지 않은 사람(=무신자) -> 병원에 가는 사람이 평균적으로 더 아픈 사람이라는 말(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더 부도덕하다는 말) ->의학은 나쁜 것(종교가 부도덕하다는 것) 의 비유다.[/footnote](<만들어진 신>에서는 도킨스가 루이스의 논증을 읽었다는 증거가 없다).

어쨌든간에 도킨스의 시도가 의미있는 것이었는지를 질문해 볼 바닥은 있다. TS 엘리엇이 관찰했듯이, 종교가 없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좋은 일인지를 묻는 것은 누구의 대답이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서양의 역사는 우리가 사는 현대를 유대-기독교적 전통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그 전통에 의해 다듬어져 왔다. 하지만 도킨스가 실패하는 깊은 지점이 여기 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 나은 세계라는 것도 결국 우리의 종교적 유산에 의해 조건지워진다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의 십계명을 통해 증명해 보였듯이 도킨스를 포함한 서양에 서는 우리 모두가 의미하는 더나은 세계란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각과 열정을 표현하고 그들의 능력을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발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에서는 더 나은 세계가 아니다. 거기서 더 나은 세계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개개인의 차이와 열망들을 억제하는 것이 세계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윤리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판단은 어디선가 시작한다는 점이고, 우리의 그 지점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당연히 그가 시도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림에 대해 칭반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도킨스에겐 그의 도덕적 비젼이 뿌리를 두고 있는, 그가 그토록 사악하다고 지적하는 전통에 대한 지적인 정직성이 요구된다.

5.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도킨스가 이 책을 도대체 왜 썼냐는 점이다. 왜 그는 종교에 관해 뭔가 중요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무엇이 그에게 이런 주제로 책을 쓸 정도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것일까? <만들어진 신>은 확실히 도킨스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작품이다. 그 속의 논증들은 버트란드 러셀의 더 유명한 책을 읽은 뛰어난 학생이 광신자들의 비디오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쓴 책 처럼 보인다. 도킨스는 신과 발레 그리고 금융시장에 대한 그의 관점에 대해 일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주제에 관해 책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킨스가 신에 관해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견 분명하다. 그는 진화생물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한 다위니즘은 초창기부터 종교와 껄끄러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도킨스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런 사건이 매우 국소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진화론에 대해 “그래서 뭐?”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위니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복잡한 원인을 가지는데, 이런 원인들에는 무시, 공포, 정치 및 새로운 것에 의한 엄청난 충격등이 해당한다. 핵심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과 윌리암 제임스의 말처럼 “가시 세계는 좀 더 영적인 우주의 일부다”라는 믿음 사이의 갈등이 필연적이었다는 데에는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우리와 도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일부일 뿐이었지 아주 근원적이지도 않았던 그런 역사의 반향 속에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footnote]다위니즘이 종교와 충돌하게 되는 것에는 복잡한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빅토리아 시대의 일부 상류층과 관련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형성된 우발적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앨렌 오의 생각에 진화론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상충할 수 밖에 없단 것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오류일 뿐이다.[/footnote]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진화생물학은 종교에 관한 설교로부터 그 어떤 특별한 고상한 지위도 향유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이 진화생물학자는 종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고 실제로 한다. 최소한 어떤 경우에 ‘주님은 매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신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성경의 문자주의적 접근에 대한 거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로부터 수백만년 전에 진화해 나왔다는 자연의 사실들이 있고 이러한 사실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킨스의 책은 너무 나갔다. 이유는 당연히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그 자체로 진화생물학 책도 일반 과학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가 주장하는 신에 관한 어떤 주장들도 어떤 실험이나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저 도킨스의 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서로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이 없었다고 결론내려서는 안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의해 제안된 것처럼 이 둘은 완전히 다르고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침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footnote]굴드의 NOMA에 대해서도 앨렌 오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을 기약한다.[/footnote]. 합법적인 과학과 인증된 종교 사이의 불일치는 언제나 있었고 또 계속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들은 인식론적(과학과 종교는 단순하게 전자는 유물론을 전제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채로 주장을 펼치는 것인가?) 영역과, 윤리학의 영역(우리는 의학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를 어디서 정해야 하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을 포함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렵고 과학자들과 종교사상가들 사이의 광범위한 토론이 장점이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토론이 가치 있으려면 토론은 도킨스가 하려고 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정교한 논의들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8 thoughts on “개종을 위한 사명 (Mission to Convert)

  1. 파이어아벤트의 < 킬링 타임>이 번역된 듯 하다. 정병훈 선생은 두어번 만나 본 바로는 영어도 참 깔끔하시고 < 방법에의 도전>의 번역상태로 봐도 믿을 만한 번역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킬링 타임은 꽤나 재미있다고 하니 사서들 보시길. 참고로 도대체 왜 < 이성이여 안녕>이 먼저 번역되지 않은 것인지 이 땅의 지적 게으름은 내 게으름보다 더하다.

  2. 잘 봤습니다. 그나저나 넘겨주신 바톤은 엄두가.. ㅡㅜ;;

  3. 글쓰기도 연습이니 연습하시오!!! 그나저나 나 통계학좀 갈켜줘요. 나중에라도 좋으니 약속은 하십시다. 넹? 굽신굽신

  4. statistical physics != statistics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은 알려드릴 수 있지만, 저도 통계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

  5. 오의 공격력은 참 막강하군요. 저도 이택광 선생에게 어제 좀 비슷한 투로 투덜대 보려다 대실패. ㄲㄲ

    칸트 < 순수이성비판>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규범적 인식론에서는 불요한 것으로 간주해서 잘라버리는 순수이성의 선취가 역시 문제가 된다는.. ㄲㄲ

  6. 막강한게 아니라 겁이 없는 듯..이택광이라는 분의 블로그는 오늘 처음 우연히 봤는데 ‘촛불’이 네그리와 라깡 라디우 등등에 의해 각색중이더군요. 참 웃김..

  7. 잘 읽었습니다. “어거스틴이 15세기에..”는 “15세기 전에…”를 잘못 타이핑하신 건 아닌지요? 사소한 오타들은 별 문제 안되지만, 시기가 좀 차이가 나서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신랄하게 글을 쓸 수 있는 문화는 언제쯤 ‘제대로’ 자리가 잡힐까요. 기본적으로 모든 논평은 그래야 되는데 말입니다.

  8.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그냥 중세쯤이라고 생각해서 15세기라고 썼는데 다시 보니 5세기네요. 워낙 무식한 이공계생이라 그렇습니다. 이런 문화는 이황과 서경덕이라는 엄청난 나이 차이를 가진 이들 사이에도 원래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제 대한민국에선 불가능한 그런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논쟁이라뇨…이 땅엔 패싸움, 개싸움, 욕, 혹은 상호비방이나 겉치레 비판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9. 한국에는 아예 서평논문이라는 게 있는데, 사실 앨런 오의 이 서평은 잘 쓰기는 했지만 논문 수준은 안됩니다. 논지는 분명하고 까댈건 잘 까는데 앨런 오도 당당하려면 지 스스로한테 부끄럽지 않을 대중서 한권 쯤 써줘야겠죠. 아마 준비중일듯. 내 기대가 맞다면 까대는 것만 할 사람은 아님.

  10. 종교에 관해 논하고 있는 도킨스는 유니테리언과 낙태클리닉 폭파범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뎌 보인다.

    이건 미국 문화(?)같은걸 좀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유니테리언 교도가 낙태 반대운동을 하면서 낙태클리닉 같은 곳을 테러하기도 하나요?

  11. 자세히 설명하려다 관뒀습니다. 조금 인터넷을 뒤져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12. < 킬링타임> 지금 주문 하겠습니다..ㅋㅋ 추천 감사합니다.
    < 방법에의 도전>, < 리오리엔트>를 읽고 나서 < 만들어진 신> 볼 때 느꼈던 왠지 모를 불편함을 시원하게 보여주네요.
    종교관에서도 도킨스보다는 굴드가 더 끌리네요..

  13. 아웅, 전에 봤다가 ‘길구나…쩝’ 하고 제껴뒀다가 지식의 대통합 서평 읽기 전에 먼저 읽습니다.
    햐..오씨 좀 살벌하시군요. (블로고스피어에서 유명 블로거 까대면서 유명해진 몇몇이 생각났지만, 까대도 오씨처럼 까대면 할 말도 별로 없을 듯-_-

  14.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다위니즘이 종교와 충돌하게 되는 것에는 복잡한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빅토리아 시대의 일부 상류층과 관련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형성된 우발적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앨렌 오의 생각에 진화론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상충할 수 밖에 없단 것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오류일 뿐이다

    라는 7번 주가 흥미롭군요.

    이런 내용에 대해서 볼 수 있는 웹 페이지나 책이 있을까요?

  15. 저는 앨런 오의 비판이 공허해보이고 별로로 보이는군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쪽이 훨씬 화끈해보이고 타당해보이네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그저 리처드 도킨스의 말에 불과하다는 데는 동의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는 훌륭해보이네요.그전에는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수 없이 종교란 어쩔수 없는거야 하고 넘어간것을 이제는 과감히 종교는 없어져야 하는거야 하고 문제제기해서 방향을 환기시켜주는데 좋은 역활을 했다고 보니까요.

  16. 우웅..정말 날카로운…글을 꼼꼼히 다 읽었다는 의미…그냥 대충 이정도면 공부하시리라 믿으며..정치적 논의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기억들을 조합한 건데 재조합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 합니다.

    http://www.victorianweb.org/science/science&religion.html

    한글로 된 대강의 엿보기는..

    http://blog.hani.co.kr/blog_lib/contents_view.html?BLOG_ID=wateroo&log_no=20583

    근데 정말 “하얀 로냐프강”의 저자 되시는?

  17. 그저 취향일 뿐입니다. 꿈돼지 님의 말도 상황에 따라선 틀린 말은 아닐지 모릅니다. 문제는 저런 식으로 종교가 사라진 적이 없다는 건데..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으로는 좀 유치하다는 뭐 그런.

  18. 종교란게 뭐 일개 책하나로 사라질 만큼 가변운것은 아니지요. 앞으로도 종교의 대중적인 수명은 충분히 길것으로 저도 봅니다. 뭐 취향이라는데 동감하고 저는 앨런 오의 비판이 좀 많이 유치해보입니다.

  19. 저한테는 읽기 버거운 내용이라, 좀 더 열심히 읽긴 했습니다.

    그 소설의 저자는 아니에요~ 별명에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바꿔야 하나, 이거.

    링크해주신 글들은 잘 읽겠습니다!

  20. 저도 번역을 하고 나서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다른 서평들을 봤을 때 이 책에 대해서는 뭔가 독한 감정이 좀 있었던 듯 합니다.

  21. 장문의 글을 꼼꼼이 읽었는데 허무해 지네요. 도킨스의 참신한 주장에 대해 정면 반박이 아니고 소소한 잘못을 물고 늘어지는 찌질찌질한 글로 보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망상이다. 그것은 신으로 부터 유래하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는 문화적 전승인 밈(meme)일 뿐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정면을로 반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 논증으로서 도킨스의 기본 주장을 폐기할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는 것이 오히려 안타깝게 보입니다. 도킨스는 ‘신성한 종교’를 망상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종교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앨런 오의 비판은 제대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촛점을 흐리는 것일 뿐입니다.

  22.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을 이해하신 것이 맞다면 그렇게 안보일수도 있었을텐데..

  23. 쿨게이의 의미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열정이 거짓에 기반하지 않고 진실에 기반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에 관용하지 않으려 노력 합니다.

  24. 좋은 자세라 생각합니다. 항상 정의의 편에 서실 수 있기를(진심으로) 응원합니다.

  25. 저도 공감합니다. 반박을 하고 싶음 제대로 해야죠. 저렇게 전체 글에서 일부분만 가지고 찌질되서야~~
    그야 말로 전형적인 찌질.
    첨부터 나오는 거만타령은 무신론자에 대한 대표적인 양대찌질론 1.너희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
    -그럼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라는건가? 상처를 안주고 말하는 법을 갈쳐줘봐. 많은 무신론자들이 최대한 노력을 해봤는데 그래도 다 상처타령이던데??
    남의 입을 너무 쉽게 날로 막으려는거 아냐?-
    2. 너희들은 너무 거만해. 관용이 없어.
    – 어이크 1번방법의 아류 또 등장하네.
    흔히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 넌 너무 똑똑한 척해. 넌 너무 거만해. 하여튼 난 그거랑 상관없어 버럭

    앨런 오의 첫 초식부터 저따위군요.

  26. 도킨스를 읽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글이내요. 사실 종교라는 것이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제공하니까요. 무엇보다도, 종교라는 것과 종교적인 것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와 과학은 다른 것이지만, 종교적인 것은 과학에도 영향을 끼치니까요. 김우재님과 같은 분들이야 안 그렇겠습니다만,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종교에 투영하던 영적인 번뇌를 과학에데 투영하려 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은 때로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황된 것을 과학에게 바라곤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종교적’인 것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마치 메트릭스에서 몰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인가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는 것처럼요.

    사실 제가 바라보는 종교의 폐해는 영적인 고민을 간단하게 종교에 아웃소싱하려는 태도입니다. 저는 영적인 것이 삶과 죽음의 모순에 대한 번뇌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물음을 다시 풀어내면 삶이 ‘나는 누구인가?’라면, 죽음이란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것으로 확장할 수도 있는 것 같내요. 사실 예수나 석가나 이러한 영적인 고민을 스스로 위대하고 고독한 영적인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교회와 경전을 통해서 이러한 고민을 간단하게 아웃소싱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 점에서 과학은 좀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러한 고민을 해소하려 드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과학에 대한 소비자로써 이러한 고민을 구매하려고 들지요. 전 이점에서 신도들과 소비자들의 태도의 차이가 없어 보여요.

    길어졌는데요. 좀 뜸금 없는 이야기였내요.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7. 앨랜 오의 비평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의 주장은 종교를 믿지 말자 내지는 종교를 없애자 라고 생각되는데, 그 주장이 실효를 얻기에는 글의 논리적 타당성이 너무 빈약하죠. 축구(신) 좋아하는 사람에게 피파(교회)에서 저지른 비리들을 줄줄 읇어주면서 월드컵(종교)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느낌이랄까요.(물론 월드컵 하지 말고 클럽 축구만 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축구를 버리는 건 아니라는… ^^;)

    그런 관계로 이기적 유전자는 재미있게 봤지만 만들어진 신은 매우 지루한 책이었어요.(게다가 두껍기까지 -_-;) 단, 앨랜 오의 비평이 좀 유치하다는 것에도 또 동감.

  28. 핑백: 쓰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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