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라. 우리의 말을!

조정환이택광촛불 논쟁에 냉소를 보낸 이유는, 그들이 구사하는 전문용어들의 난해함이나 현학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토론이 결국 생산적인 담론을 생산해낼 수 있던 없던 간에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진지함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 치열하게 그들이 배운 것들을 이용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내용이던, 어떤 주제로든간에 진지함이 서린 논쟁들은 장려할 만한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서로 연관된 두 종류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조금 광범위한 첫번째 문제는 ‘과학의 세속화’를 통해 내가 제기해 온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과학의 세속화’를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건강한 대한민국의 인문학 논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비판이 구체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둘째로 대한민국의 특수성, 혹은 인문학이라는 학문이 다루어야만 하는-그것이 인문학을 통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던 뭐던 간에- 문화상대주의적 측면에 관한 것이다. 학문식민지라는 말보다 이론식민지라는 말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이러한 문제를 인문학자들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한 우리의 인문학은 50년 후, 또는 100년 후 중국의 화풍에 종속되어 진경산수화를 기다려야했던 그 과거의 전철이라 평가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의 적용, 이론의 건설

17세기 과학혁명의 시기는 분명 케플러처럼 원운동에 대한 관념을 관측을 바탕으로 타원으로 대체한 용기있는 과학자의 존재와, 티코 브라헤처럼 엄청난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선사한 경험주의에 충실했던 과학자의 존재, 그리고 이러한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최초로 근대과학을 종합한 뉴턴이라는 거인의 존재로 인해 완성된 것이다. 유럽이라는 지역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역사학을 발명했고, 이로 인해 과학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까지 소급되는 지적우월주의 속에서 우리가 교육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이라는 지식체계를 정의하고자 할 때, 단순히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그것은 현대의 자연과학이 인문학 및 사회과학과 구별되는 지점을 포착하기 어렵게 된다. 이는 르네상스 이전에도 언제나 존재하던 자연철학의 전통마져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시켜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합리성이라는 지적 태도가 과학이라면 종교적 신비주의를 제외한 모든 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자연과학은 그러한 합리성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음을 안다. 과학의 역사를 최대한 고대로 소급시키고자 했던 서구 지식인들의 시도는 백인들의 민족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속을 이유가 없다. 자연과학이라는 지식체계가 그렇게나 어려운 것이고, 유럽이라는 체계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초단기간에 과학을 흡수한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다. 비록 과학을 둘러싼 문화적 배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배경이 의미하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과학자라는 부류의 지식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동아시아의 특수성으로 인해 등장하는 어려움일 뿐이고, 이러한 인식조차 이미 동아시아의 문화 속에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17세기에 이미 과학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는 특수한 성격이 폭발하기 위해서는 19세기까지 2세기 가량의 기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 기간동안 뉴턴 물리학의 점진적인 발전과, 화학과 생물학 일부 분야에서의 전진이 있었지만, 우리는 당시의 과학에서 자연철학과는 뚜렷이 구분되기 힘든 어떤 측면을 마주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과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 체계가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이 기간동안 과학이 스스로와의 전쟁을 치뤄왔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학이 자연철학과 뚜렷하게 구분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첫째, 과학의 특성이 자연현상에 대한 정량화를 위한 도구들이 정교해지기 시작한 것이 19세기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고 둘째, 그러한 정량화된 데이터가 존재하기 이전의 과학은 몇몇 거대 이론들이 모든 관찰과 측정결과들을 독재하는 세속화 이전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속화는 종교로부터 과학이 탈출하는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와 과학의 갈등관계가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이 정교화된 결정적인 이유가 종교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례로, 19세기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 나아가 20세기 초까지도 화학이나 물리학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과 과학자로 산다는 것이 그다지 모순적인 일은 아니었다. 비록 생물학에서 다윈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와의 정면충돌이 가시화되기는 했지만, 다윈이 서 있던 학문전통에서 비껴 있었던 생리학자들을 비롯한 생리화학의 전통 속에서 철저한 기독교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프리스틀리는 목사였고, 월러스조차 종교적 영성주의에 빠진 학자였다.

과학의 세속화는 정량화된 데이터에 승복하지 않고, 이미정립된 이론의 틀 속으로 모든 데이터들을 포섭시키고자 했던 과학이론의 독재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과학의 분과다양성으로 인해 이러한 변화들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분야에 각각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스며들어가기는 했지만, 과학의 컨센서스는 19세기 수많은 도구들이 자연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사태를 경험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론이 측정량에 승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우리가 현대에 살면서 과학이라는 체계를 다른 지식체계와 구분짓고자 할 때, 그것이 양화된 데이터(측정량)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양화된 데이터들은 재생산 가능해야 한다는 점, 나아가 이러한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이 이론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며, 그 연결에 있어 이론의 우위가 점점 약화되어 간다는 것만을 기억하면 된다. 과학은 양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과학의 이론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현대의 과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형이상학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과학의 세속화가 이론이 측정량에 승복해 온 스스로와의 투쟁이었음을 되새겨 볼때, 우리는 어떤 사회적 사건에 대한 분석에 있어 이론이 가지는 위치가 과연 인문학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분석해 볼 수 있다. 촛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그 현상을 어떤 이론(예를 들어 아우또노미아, 다중, 혹은 구조주의 및 미학이론 등등)의 틀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이론을 촛불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 과연 우리는 촛불이라는 사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가진 촛불에 대한 분석이 충분해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어떤 이론의 틀을 막바로 적용시켜도 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촛불은 다중의 봉기라는 식으로 규정짓는 것은 촛불에 대한 모욕이고, 지적 불성실함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론 식민지인 대한민국의 불행한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론의 식민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특성상, 그것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가진 복잡성으로 인해 실험이 가능한 자연과학처럼 정교한 측정량이 존재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인문사회과학의 단점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축복일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논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감정으로 발산되고, 어떤 생산적인 논의의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가 보여주는 분석의 틀 속에서 우리는 인문사회과학도 역사와 치열한 사고를 통해 어떤 단단한 분석의 틀을 가질 수 있음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문사회과학이 지나치게 양화된 데이터를 추구하는 것은 그 학문의 성격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음에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가능한 곳에서 그러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불성실함이지만, 모든 곳에서 그런 시도가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가 본것은 프랑스의 촛불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촛불도 아니다. 우리가 본 것은 대한민국의 촛불이다. 효순이 미선이 사태를 시발점으로 대한민국의 밤을 밝힌 촛불이라는 현상은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적 특수성을 상징짓는 초유의 사태였다. 천안문 사태를 분석함에 있어 러시아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을 분석했던 이론적 틀을 가져다 대는 것이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내부의 일련의 사태들로부터 천안문 사태를 기술하는 것과 전자의 방법 중 무엇이 더 적절한지에 관한 논의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에 대한 조정환-이택광의 논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라는 문화적으로 특수한 그들만의 상황 속에서 도출된 이론을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적 특수성에 적용시키려는 지적 불성실함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탈리아의 상황이 대한민국의 상황과 어떤 측면에서 비슷할지도 모른다. 허나 당시의 이탈리아에 촛불소녀가 있었는가? 그들에게 웰빙과 중첩된 이런 우파적 성향의 촛불이 있었는가? 그들의 문제의식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벌어졌던 운동권의 흥망을 포괄할 수 있는가? 그들의 이론 속에는 촛불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총련에 대한 반감을 느끼는 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분석이 있는가? 만약 아니라면 답은 분명하다.

우리의 이론을 건설하라. 인문사회과학자는 아니지만, 효순미선 사건으로부터 탄핵 및 광우병 사태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그래서 문화적으로 매우 특수한 그러한 사건들이다. 이러한 특수한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에게 학문적 주체성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학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이론가들의 책을 번역하고 달달 외우는 데 그치는 앵무새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만의 이론이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와 결합된 촛불에 대해 진중권 식으로 단순히 감상을 늘어놓지 말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철저히 분석하고 네그리의 <다중>이나 <아오또노미아>와 같은 이론서를 집필하는 학자가 등장해야 한다. 촛불이라는 사건에 <다중>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이라는 사건을 통해 건설한 <촛불론>을 통해 <다중>을 분석할 계기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론을 부수기 위해 측정량을 건설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자연과학에 비해, 인문사회과학에서의 이론 건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촛불과 같은 문호적 특수성을 지닌 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을 분석하는 이론을 건설하는 일에는 게으른 학자들의 불성실함일 뿐이다. 나는 촛불에 관한 논쟁이 더욱 격렬하게 이 땅에 퍼져나가길 기원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주체저이고 성실한 학자가 있어, 대한민국사와 조선사를 아우르고 촛불을 철저히 분석한 후에야 <촛불론>을 집필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후에야 우리의 인문사회과학이 문화적 특수성을 등한시한채 외국의 이론 식민지로부터 벗어났다는, 그래서 우리의 인문학도 진정 세속화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미 누군가 건설해 놓은 이론에 다리 한짝 걸치는 것은 얼마나 쉽고 안일한 일인가 말이다.


추신: marishin님이 추천해주신 링크를 읽고 나는 이택광의 주장을 이해할수 있었다. 논쟁도 그런 용어들로 이루어졌었다면참 좋았을 것이다.

뒤늦은 또 하나의 추신: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넘어>라는 글이 있더라. 꽤나 도움이 된다. 뭐 내부에서의 비판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22 thoughts on “말을 하라. 우리의 말을!

  1. 핑백: Curious Minds
  2. 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반지성주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들의 현학적인 어휘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웃기는 일입니다. 필요도 없이 ‘로두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적불성실함이지, 반지성주의라는 말로 정당화될 설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예 대놓고, 다중론이네, 중간계급론이네, 이제는 로두스론에 데모스론까지 이론의 난장혈투극일 뿐, 저런 건 제대로 된 논쟁이 아닙니다. 라깡, 바디우, 랑시에르 지젝 따위의 대리전일 뿐입니다. 촛불은 어디가고, 대리전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멋지신 인문사회과학자들이십니다. 암울한 대한민국입니다.

  3. 장미와 주판의 김영민 -> 이택광 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김영민은 대한민국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피상적으로 빠르게 거쳐왔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심층근대화’가 오늘의 철학적 화두라고 주장한다. 심층근대화는 대한민국 사회의 근대화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의미하며, 질적 차원의 근대화를 자체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인문학적 노력을 말한다.

    라는 김영민이 이택광의 링크에 걸린 이유는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영민에 대한 강유원의 까탈스러운 반응도 알기 힘든 노릇이고. 원래 학자들이라는 게 이리도 으르렁 거리는 것인가 보다. 나도 그렇다.

  4. A.C 그레이엄의 책 < 도의 논쟁자들>이 번역되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니 < 도의 논쟁자들>이라는 책은 한참전에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앵거스 그레이엄의 것인지는 몰랐다. 헐…http://heterosis.tistory.com/30 이 글에 나오는 그 그레이엄인 것이다…살 책은 많되 이역만리여라..

  5. 학술저널 담비 http://www.dambee.net/ 누군가 착한 자본이 있어 후원을 해주었다면 좋은 시도가 되었을 테다. 착한자본, 겉보기라도 그런 것이 없는 곳이다 이 땅은..

  6.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인문학 공부가 잘못 되어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 ‘보잘 것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권위자의 목소리’보다 저평가하는 인식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이 공부에까지 미치면 권위자의 이론만 달달 외우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이론이란 추론의 계기 내지는 참고자료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거기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나저나 자연과학 역시 과연 우리의 말을 하고 있을지 약간 의심은 드네요. … 개인적으로 한글로 된 대학 교재가 드물다는 건 ‘우리 스스로의 학문’을 학계가 제대로 하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우리나라엔 한글로 된 양질의 과학 교재가 드물거든요. 학자로서 영어 실력을 높이고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읽을만한 능력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마는 그렇다고 교재까지 영미권의 그것을 써야 한다는 건 좀 불합리해보입니다.

  7. 자연과학은 인문학과 그 학문의 성격이 다릅니다. 인문학은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문화에 좌우되는 것이며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을 추구하지만, 자연과학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물론 윌슨의 형이상학에 불과한 통섭을 수입하는 경우, 그건 인문학의 경우와 같은 식민적 근성입니다. 제가 과학이라고 말할때는 학술저널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말하는 겁니다. 대중과학서가 아니라.

  8.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인문학에서 우리나라의 ‘특수성’만을 따져서 해괴망측한 이론들이 쏟아지는 상황도 경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론 구축에 대해서 제대로 비평하고 검증하고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은 충분한지가 먼저 걱정되는군요.

  9. 라깡의 해괴망측한 이론이 권위를 갖는 이뉴는 대단히 정치적인 겁니다. 인문사회과학의 이론은 자연과학처럼 실험으로 테스트하는 종류의 엄밀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특히 현재 조정환-이택광을 비롯해 국내의 진보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처럼 문학비평과 미학이 주를 이루는 그런 바닥에서, 이론이라는 것의 엄밀성은 텍스트주해와 해석, 다독 및 독해력 그런 것으로 승부가 갈릴 뿐입니다. 그런 거라면 우리네 학자들에게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안해서 그렇지.

  10. 번역본이 더 좋은게, 원전 한문이 다 인용되어 있다는..

  11. 앵거스 그레이엄은 정말 좋은 학자인듯. 난 언제 저런 깊이를 갖게 될지..아마도 불가능할 듯.

  12. 존경합니다… 제가 무식해서 뭔가 첨언을 할 게 없군요. 어쨌든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만 (지금은 아예 안 함-_-)

  13. 사람이 좀 놀때도 있고 캥기면 공부할 때도 있고, 또 놀다가 땡기면 공부하고 그런 것이니 걱정 마시길. 지금 보고 있는 “사육”시리즈도 훌륭한 공부일지 모름. ^^

  14. 이택광씨는 뭔 말을 하면 라깡이 그랬어, 지젝이 그랬어 하고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조정환씨는 네그리가 그랬어 하면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그분이 최근에 낸 미네르바의 촛불 이라는 책의 미덕은 바로 꼼꼼한 현장 답사기입니다. 두 분이 도매금으로 넘어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15. 제가 저 책들을 읽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 될 듯 한데, 현장답사가 부족하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분석(분석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이 네그리의 ‘다중’이나 ‘아우또노미아’라는 이론 틀 속에서 투영 된 것이라면, 여전히 ‘측정량이 이론에 지배되는’ 독재시대로부터 세속화로 진행된 과학의 건강한 진행과정을 논한 제 논증에는 틀린 이야기가 없습니다. 특히 인문학에서 미리 이론을 전제하고 관찰이 선행되는 경우가 잦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진정으로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동떨어진 ‘촛불’에 관한 지식인의 치열한 고뇌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둘을 도매급으로 엮을지 어떨지는 제가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일 그 책에서 이탈리아에서 네그리의 이론이 등장했던 배경과 촉불의 배경, 이 둘의 맥락을 꼼꼼히 분석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고민이 있었다면 다음번엔 조정환에게서 새로운 이론을 기대해 볼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이론 식민지인 대한민국의 불행한 실체”를 질타하신 부분에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다만, 한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신경세포 하나를 연구하면 신경학, 신경세포 두개 이상의 관계부터는 심리학의 영역”이란 말도 있습니다. 김우재님께서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그으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인문”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요? 인문사회과학이란 용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김우재님께서 말씀하시는 “인문사회과학”이 “인문학”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요.

  17. 인문학과 인문사회과학을 가끔 혼용해 병기합니다. 모호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사이를 넘나드는 학자들을 보면 헷갈리곤 합니다. 참고로 저는 신경세포 두개는 심리학의 영역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8. 핑백: Jong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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