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대한 황석영의 배신

나는 황석영 개인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시대가 달라지면 그 상황성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젊은 시절엔 진보소리좀 들었다는 이들의 사상이 현재의 보수와 맞아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 한번 이야기했다가 호되게 질책을 받았던 “어차피 나이늘면 두뇌가 보수화되는 게 자연의 순리”라는 말에는 일종의 생물학적 진리가 녹아 있다. 뇌의 가소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었을 때 최대한 두뇌를 열어두고 시대를 초월해서 옳바를 가치들로 두뇌를 꽉꽉 채워두는 것은 진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만 하는 지적 훈련이 되는 셈이다. 황석영이 변절이라면 신자유주의에 놀아난 김대중의 변절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던 노무현의 그것은 변절을 넘어 매국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을 치유하는 신약은 어쩌면 두뇌가소성을 죽을때까지 유지시킬 수 있는 그런 약일지도 모른다. 진보의 변절은 흔한 일이다. 그렇다고 변절조차 하지 않는, 이미 젊은 시절에 두뇌를 닫아버린 보수들의 사상은 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나마 전원책의 따뜻한 휴머니즘, 두뇌가 아니라 가슴으로 말하는 보수에게서 어떤 희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알타이 문화 연합론 대 한-몽 국가연합론

한-몽 국가연합론은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아이디어 수준의 구상이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그리고 경제적 이슈만이 정권탈환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이명박처럼 ‘큰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혹할 수 있는 소설 수준의 구상일 뿐이었다. 남한 면적의 17배에 이르는 영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300만이 채 되지 않는 인구를 지닌 몽고는  5000천만에 이르는 인구를 지니고도 협소한 영토에 사는 대한민국에게 좋은 표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그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학술적 논의도 찾아 볼수 없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이명박조차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를 달만큼 국제적/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한국-몽골 국가연합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반대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선 실현 가능하다.”

-국가연합의 필요성은 있다고 보나.

“그럴 필요성이 있다. 몽골과 함께하는 것은 한국으로선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러 여건이 맞다면 몽골도 원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두 나라의 연합이 수월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몽골의 인구가 28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몽골 인구가 1000만을 넘으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인구 4800만의 한국은 280만의 몽골과 충분히 연합할 수 있다.”

신동아, 2007, “정의를 위하여” 블로그에서 재인용

이러한 시도에는 박근혜 측도 예외는 아니어서, 몽고의 녹화를 통해 경제적 협력관계를 맺고 기후변화협약에도 공동대응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역시 문제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던 간도처럼 몽고가 지리적으로 우리와 인접해 있지 않다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몽고가 강한 반중감정을 가지고 있고, 한국기업들이 몽고에 상당수 진출해 있다는 점 등은 적어도 몽고와 한국간에 긴밀한 협조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기는 한다.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나조차도, 몽고라는 광활한 땅을 한번쯤 밟아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이야 예전부터 있었고, 한-몽 연합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왠지 구미를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연합 대 문화연합

이명박이 스스로에게 지적소유권이 있다고 이야기한 ‘한-몽 국가 연합’은 경제적 국가 연합의 형태다. 몽고의 인구가 300만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국가연합이 가능하다고 이명박이 분석하는 이유도, 경제원조로 인해 한국이 입을 피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틀 속에서 한-몽 연합의 경제적인 측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를 경제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선출했고,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음이 드러났으며, 돈 이외의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그런 인물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명박의 ‘한-몽 국가연합’은 경제공동체로서의 국가간 연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 도대체 왜 한국과 몽고만이 유럽연합과 같은 식의 국가연합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견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 국가연합을 거론하려면, 한-몽 연합을 논할 일이 아니라, 말그대로 동아시아 경제권을 아우르는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한-몽 연합에 설사 성공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 이후에 중국-일본 연합이 탄생해서 우리를 소외시켜버리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경제연합으로서의 한-몽 연합이 대운하처럼 국민들을 감정적으로 호도하려는 술책에 다름 아닌 이유다. 그리고 명박은 대운하를 선택했다. 아마 명박이 대운하 대신 ‘한-몽 연합’을 들고 나왔다면 그는 허경영 취급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명박은 처세술에 능하다.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황석영의 착각은, 명박의 이러한 경제연합, 게다가 진지한 고려도 아닌 선거용 정책에 불과한 이런 시도를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하다. 그의 문학계 지인들 중 일부가 몽고에 있는데, 그런 경로로 황석영이 알타이문화연합에 대해 생각하게 된 듯하다. 하지만 황석영의 문화연합은 명박의 경제연합과 맞는 코드가 아니다. 명박은 몽고가 알타이어족이라는 이유에서 우리와 동질성을 가지며, 따라서 연합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사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박의 머리는, 뭐 좀 센세이션한 일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맴돌다가 측근 중의 한명이 던진 떡밥을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황석영은 정말 진지하게 “몽고+2한국”의 통일 구상에 들어간 듯 싶다. 그의 진정한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여기에서 활짝 피어난다.

북한이 없는 통일

하지만 매우 미안하게도 “경제 대 문화”라는 명박과 황석영의 차이 외에도, 그 둘간에는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알사람은 이미 알아 챘겠지만, 명박의 ‘한-몽 국가연합’엔 북한이 없다. 황석영은 궁극적으로 북한과의 통일과, 이러한 통일국가의 발전을 위해 알타이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명박의 계획엔 북한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지식인으로서 황석영은 지나치게 안일한 사고를 했다. 단순히 명박에게서 알타이문화연합과 같은 방식의 사고가 엿보였다고 해서, 이를 심각하고 깊게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명박에겐 북한이라는 대상조차 경제적 이익으로 환원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우리네 진지한 진보지식인들이 ‘통일’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했을 때, 명박은 그런 고민에 동참한 사람이 아니다. 황석영의 통일이 민족사적 관점에서 제기된 지식인의 진지한 성찰이라면, 그는 착각했다. 명박에겐 아예 통일에 대한 비젼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 운좋게도 이런 일이 잘 진행된다고 해도, 명박은 몽고를 먹고는 뒤돌아설 것이다. 황석영은 그제서야 “이 인간에게 북한은 안중에도 없었구나”라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결론

소설가가 소설 같은 구상에 뛰어든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 같은 구상이라 해도, 스스로가 지닌 공적 지위를 감안했을 때, 심각한 고민 없이 몽고라는 공통분모만을 보고 가볍게 명박을 믿어버린 그의 태도엔 문제가 좀 있다. 치열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박의 한-몽 연합에 북한은 없다라는 사실을 황석영 같은 지식인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 같은 구상에 동참한다는 것이, 뼈아픈 지난 60여년의 분단을 딛고 통일을 위해 달려온 우리 진보지식인들의 고뇌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것도 그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통일해야 할 대상은 몽고가 아니라 북한이다. 몽고 및 간도 문제는 그 후에 논해도 늦지 않다. 만일 황석영의 두뇌가 여전히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정말 되새겨 볼 일이다. 북한과의 통일을 위한 교두보인 그의 소설가적 순진무구한 알타이문화연합론이 자본에 찌든 명박의 한-몽 국가연합과 어디가 같은지를 말이다.

첨언

문화연합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도대체 같은 어족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 얼마나 문화적인 동질성이 존재하는가. 게다가 일본을 제외하고는 가장 악랄하게 이 땅을 침탈했던 이들과 문화적인 연합을 맺는다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과 우리 간의 역사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결국 꿈꾸는 것이 말갈을 부리던 발해의 그 모습이렸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더욱 안될 일이지 않는가. 인구가 300만 밖에 안된다고 타국가를 노예로 부린다는 사고를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모든 것을 넘어 나는 도대체 문학을 한다는 자들만 이처럼 지식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열불이 나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이들이 지식인이 되면 결국 그들의 사상도 소설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비판을 받기 싫으면, 좀 제대로 행동하라. 아니면 확 뒤집어 버릴라니까. 영화비평이나 지껄이는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7 thoughts on “통일에 대한 황석영의 배신

  1. 케인스는 자신이 변덕스럽다며 조롱하는 이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정보가 변하면 결론을 수정 합니다. 귀하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라고 말합니다…

    쥔장님의 글을 읽고 문득 떠오르는 케인스의 일화 입니다
    결국 역사만이 그의 진실을 알겠죠……

  2. 그래서 케인스가 위대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이론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 그걸 이해하는 것이 학자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3. 핑백: Season ii. Was
  4. 핑백: The Blograp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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