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치학을 위한 잡담

1.
구체적인 정책과 사안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도 좋다. 오랜 기간 연구해온 김대호 소장의 내공에 필자는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 공부 받아들이고 해보려 한다. 양극화 해소라는 뉴민주당 선언의 프레임을 빈곤해소라는 프레임으로 대체하자는 김대호 소장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김대호 소장이 스스로를 정치인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는 단지 그의 프레임에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정치적 프레임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았을 때, 필자의 눈엔 양극화 해소를 주장할 상황이 다가왔음이 보였을 뿐이고,  김대호 소장이 보기엔 양극화라는 프레임은 헛발질일 가능성이 높은 부적절한 전략으로 보였던 듯 싶다. 정치적 프레임을 중심에 두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정치적이라는 겉치레를 잠시 뒤로 치워버리고, 양극화 해소와 빈곤 해소를 순순한 경제적 구도 속에 두면 어떻게 될까. 정치와 분리된 경제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요즘 유행하는 폴라니의 살림살이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무슨 일이 생길까. 둘 중 어떤 문제가 경제적 위기의 ‘근접인’이 될까. 아니 반대로 어떤 문제가 ‘궁극인’일까. 고민해볼 문제다. 필자의 눈엔 빈곤이라는 문제야말로 인류의 역사에서 보이는 궁극인 중 하나다. 단 한번도 빈곤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보지 못한 인류역사를 두고 봤을때 이 문제를 궁극인으로 상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양극화라는 현상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등장한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문제다. 따라서 양극화 문제는 생물학에서 생리학적 원인을 뜻하는 근접인에 가깝다. 결국 빈곤해소이야 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고, 양극화란 빈곤해소를 해결하기 위해 선결해야 하는 한가지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필자가 양극화 문제야말로 민주당의 프레임이어야 한다고 말했을까.

바로 철저히 정치적으로 프레임을 짜고자 하는 김대호 소장의 주장이 더욱 힘을 받기 위해서는, 빈곤해소보다는 양극화 해소를 강조하는 전략이 더 정치적으로 대중에게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여러가지 정황적 분석을 내놓았던 것이다. 필자가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그 글 속에서 그 주제까지를 다룰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에 대한 글들이 워낙 많고 다양해서 이미 김대호 소장과 필자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고도 남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해결책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할런지는 몰라도, 사실 김대호 소장이 그의 글에서 노렸던 것이 정치적 프레임에 관한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필자의 반론 또한 그 프레임에 관한 문제제기였다는 점에서 김대호 소장과 필자는 모두 정치적이었던 셈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몇가지 분석과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시작하자.

2.
양극화는 대한민국만이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양극화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파생상품인지도 모른다. 결국 자본주의가 너무나 잘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금융위기로 자본주의 위기론이 대유행이지만,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자본주의는 양극화라는 비가역적 균형상태를 세계 곳곳에 퍼뜨려 놓았으니 말이다.

실상 필자는 이런 거대담론에나 관심이 있는 먹물에 불과하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치운동을 하고 있는 김대호 소장과 나눌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근 필자가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은 중산층을 살리고 빈곤을 해소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도 되지 않을 케인스의 <일반이론>과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작들과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몇 가지 이차서적들 뿐이다. 읽으려고 쌓아 놓은 논문들도 죄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쪽의 담론들이나 김수행, 경제인류학 등등의 거대담론들 뿐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서민들의 실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없는 필자로서는 필자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그 느낌들만으로 김대호 소장이 발로 뛰고 있는 그 분야에 대해 담론을 펼쳐야만 하는 비겁한 처지이기 쉽상인 것이다. 여러모로 필자는 김대호 소장의 현장성을 따라갈 수 없으며, 또 지나치게 현학적인 성향 탓에 김대호 소장이 바람직하다 여기는 그런 현실담론에 적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미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데, 뒤로 미루자.

3.
경제적 양극화가 세계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각국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양극화 뿐 아니라 제3세계와 선진국간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생기는 양극화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문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장하준 교수에 의해 잘 분석되어 있으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양극화는 전자의 것이니 후자는 그냥 필자의 현학적 관심사로 미뤄놓으려 한다. 이 자리는 거대담론을 위한 자리는 아니다. 김흥종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전세계적 양극화는 197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소위 영·미식 경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소득계층 간 격차의 확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네덜란드, 일본, 호주,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68년에 비해 1992년 지니계수가 5포인트 상승하였으며 영국에서는 1978년을 기준으로 1990년 소득지니계수는 무려 10포인트 상승하였다. 소득 불평등도가 가장 낮다는 노르딕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스웨덴은 1990년에 비해 1997년에 지니계수 3포인트 상승하였으며, 핀란드는 1993년에 비해 2000년에 5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양극화 현상은 전 세계적인 추세, 김흥종, 정직한 시민 5,6월호> 및 자세한 논의는 한국응용경제학회의 논문 참고(대부분의 논의들은 앞의 에세이에 요약되어 있다)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경기회복과 고성장이 이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경기회복과 고성장으로는 소득계층 간에 양극화 현상이 없어질 것이라고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의 호황기동안 빈곤계층이 감소하고 소득 수렴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나, 1990년대 들어와서는 경기 호황기에도 빈곤계층은 확산되었다. 또한 경제위기를 겪은 국가에서 양극화가 빨리 진행됨으로써 양극화는 해당국가의 경제 및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다.

 <양극화 현상은 전 세계적인 추세, 김흥종, 정직한 시민 5,6월호>

김흥종 교수의 논문을 다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해결책과 정책에 관심이 있고, 또 이를 성장으로 해결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술책에 분노하는 이들은 김흥종 교수의 논문과 자유기업원 김필헌의 2007년 보고서를 참고하면 된다. 다만 빈곤을 공적부조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나, 빈곤계층에 대한 직접적 지원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역사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사례들에서도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고, 단기적 처방에 불과하며 양극화 해소에는 더더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결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빈곤문제는 양극화 해소를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양극화 문제는 빈곤 해소를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만 바라보았을 때, 양극화 문제는 빈곤문제보다 더  궁극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필자와 같은 먹물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김대호 소장과 논쟁을 할 자격이 없다. 김대호 소장은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정치에서 찾고 있고, 또 철저히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략적인 문제들을 짚어나가고 있다. 필자가 한번 글을 섞으려 했던 것은 그 전략적 문제에 있어 양극화라는 프레임이 더욱 서민들에게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필자는 김대호 소장의 정치적 활동을 지지하지만, 또 필자가 이처럼 위선적인 먹물이기 때문에 둘 사이엔 반성적 태도의 공유기반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4.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김대호 소장은 숨기고 있겠지만, 그의 꿈이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렇다. 필자의 꿈은 사회주의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전지구적 지역주의, 씨족사회로의 회귀, 나아가 <시대정신> 따위의 영화가 그리는 공상적 사회에까지 이른다. 그것이 극렬 아나키스트인 필자의 정치적 지향점이다. 하지만 김대호 소장이나 필자나 모두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고, 이 체제 속에서 사는 서민들의 삶을 위해 글을 쓰고, 또 가슴으로 그들을 껴안으려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때로는 그 이상을 거대담론으로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고, 또 때로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 정책과 사회현안을 짚어야만 하는 딜레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정치인들도 처음엔 정치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이상을 실천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정치인의 세계에서 국민이란 쉽게 잊혀지고 만다. 하지만 그리 쉽게 잊고 지낼 수는 없다. 정치인에게 국민의 정서란 무시할 수 없는 직접적 견제의 수단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재정권 이후 정치인들에게서는 ‘보통사람’이라느니, ‘문민정부’라느니,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가 유행할 수 밖에 없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의 구조적 모순은 남아 있었지만, 정치의 본래 의미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국민들에게서 나왔고 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성장에 갈증나는 국민들이지만 지하철표가 얼마인지 모르는 정몽준보다 노무현을 선택할 정도의 ‘진정성’이 우리에겐 있다. 아니 전인류에게 보편적인 그 공감의 태도는 일종의 도덕감정으로, 미러뉴런에 의한 신경생물학적 기반으로, 측은지심으로, 사회적 공감대와 집단지성으로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
정치인들이 국민에 대한 봉사보다 정치 그 자체에 집착하는 오류를 보여주듯이, 지식인들도 사회정의르 지키려는 그들의 본래적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이념과 이론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어떤 사회적/정치적 체제에 관한 거대이론인 이념에 매몰될 경우, 지식인들은 쉽게 현실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괴리된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오류에 빠져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욱 심하다. 비록 그들에게 민중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 민중은 그들의 이념을 위해 희생되곤 한다. 이념이 민중을 잡아 먹는 시대, 우린 그 역사를 두 눈으로 목도했었다. 이론이 측정량을 지배하던 시대, 과학은 건강하지 않았다.

지식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건 정말 장려해야할 일이지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지식인들의 이념과 이론에 대한 옹호가 현실정치에 발을 딛을 때, 바로 그 때 시작된다. 김대호 소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왈가왈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글과 이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정치적으로 피력하고자 하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지식인 모두 한번 비판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해보자는 말이다. 우리에게 민중은, 서민은, 중산층은, 빈공계층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직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론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혹시 우리는 자신만의 이론과 이념의 독단 속에서, 마음대로 그들의 생활을 재단하고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 지식인들은 뇌만 남고 가슴은 텅비어버린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노정태가 반지성주의라 비꼰 김규항의 책상물림 비판이라던가, 강준만의 지식인과 생활에 대한 고민은 바로 우리가 잊고 산 그 지점에 대한 성찰은 아닐까. 적어도 정치를 하겠다 할 때에 있어서는, 지식인들은 한번쯤 스스로의 이념과 이론을 탈탈 털고 가슴에 난로하나를 장착하는 게 더욱 필요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빈곤해소를 이야기하는 김대호 소장의 가슴이야 누구보다 따뜻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적 행보가 아름답기를 바라기에 이런 허접스런 글로 논쟁같지도 않은 논쟁, 마무리지으려 한다. 요 며칠, 김대호 소장의 글을 다시 읽고, 수 많은 논문들을 읽으며, 심지어 진화경제학에서 답을 구하려 노력하던 필자는 <체인지>라는 일본드라마 한편을 보곤 그 모든 시도를 접어버렸다. 기무라 카구야의 전작 <히어로>나 <춤추는 대수사선>도 그렇지만, 가끔 일본드라마들엔 사람을 울리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가슴이다. 혹시 필자도 주제넘게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정치적 글쓰기를 한다는 핑계로 그 가슴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밤이다. 필자의 허접스러운 글에 반응해준 분들과 김대호 소장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체인지>를 보러 돌아가야겠다. 휴지 한장 쯤 필요할 듯 싶다.

4 thoughts on “생활정치학을 위한 잡담

  1. 2. “양극화… 결국 자본주의가 너무나 잘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중국이 개방된 이후 더이상 자본주의 피라미드 하부로 들어갈 식민지는 많지 않아보이고,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 하에서 결국 양극화 심화를 피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전 가끔 출산률이 감소해서 국가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우려섞인 뉴스가 나올 때마다 섬뜻합니다.
    신생아들을 식민지로 바라보는 시선과 식민지를 지배할 계층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두가지가 모두 느껴져서요.

    4. 개인들의 힘 vs. 시스템의 힘
    개인이 모이면 기차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기에 개인의 각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참 고단한 길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설 대안 시스템은 아직인가요, 궁금합니다.

  2. 태클은 아니구요….< 춤추는 대수사선>은 오다 유지…..에요 ^^;

  3. 그 문장에서 < 춤추는~>은 타쿠야의 수식어가 아닙니다. 제가 오다 유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헷갈릴까요. ㅋ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