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과학과 철학의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일방향성

답신 2: 김영건

1.
나에겐 아직 “명료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한 덕목이겠지만, 얼마나 명료하고 분명해야 뜻이 전달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명료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일정한 스키마를 공유하는 이들 간의 대화에서 가끔 그 명료함은 건너뛸 수 있는 문제일 수 있다.

과학과 철학이라는 추상적인 대상과, 과학자와 철학자라는 구체적인 집단을 뭉뚱그려 논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나르는 철학과 역사학을 ‘과학으로부터’ 추방하고자 했다. 그것이 내가 ‘역설’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철학적인 이론이, 즉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두뇌의 사유만으로 얻어진 어떤 이론적 독단이 실험의학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베르나르로부터 실험의학은 이론적 독단으로부터 해방되는 세속화의 여정을 걷기 시작했다. 베르나르가 철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종교적 도그마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철학을 뜻한다. 그런 철학이 혹은 철학자가 과학에 ‘감놔라, 배놔라’하는 것을 베르나르는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최한기의 추측과 비슷하고, 혹은 베이컨의 경험론에 기반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방법론’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했던 철학 혹은 철학자들이란 ‘과학에 대하여 감놔라 배놔라’를 이야기하는 류가 될 것이다. 흔히 나는 철학자라 할 때 데리다나 지젝 등을 공부하는 이들과 과학철학자들을 뭉뚱그리는 버릇이 있는데, 이제부터 좀 명료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윗 글에서 내가 철학이라고 했을때 그건 김영건 선생님이 말한 다양한 종류의 철학들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명료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맥락에서, 나는 ‘과학철학자’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명료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다.

2.
그러니까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접할 때 당혹감을 금할 수 없다. 얼마전
최종덕 교수가 다윈탄생 150주년을 기념해서 국내 여러 철학자들을 인터뷰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리학으로 시작해서 과학철학자가 된 최종덕 교수는 최근에는 노장사상과 진화론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진행중인 것으로 안다. 그런 시도가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신과학운동의 비과학적이고 어처구니없음을 용기있게 폭로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종덕 교수는 적어도 과학과 철학의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는 소장학자라고 생각했고, 프리초프 카프라처럼 어설프게 과학과 철학을 융합하려는 시도나, 미내사처럼 사이비과학을 퍼뜨리는 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건강한 철학자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흐른 탓인지 모르지만, 최종덕 교수는 이제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현대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을 동양적 사유, 구체적으로는 ‘노장사상’이 제시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한 철학자의 ‘취향’이 과학이론의 토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르나르의 사유가 생각난 것이다.

또한 최종덕 교수와 강신익 교수의 대담에서, 현대분자생물학의 환원론이 ‘나쁜’것으로 매도되고, 듣보잡에 말도 안되는 사이비 과학으로 대중을 현혹중인 이상한 생물학자의 예를 들면서 ‘전일론’적인 과학이 현대과학의 ‘사악한’ 행보를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곤 헛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최종덕 교수와 강신익 교수의 환원주의에 대한 악감정과, 전일론에 대한 취향이 현대과학의 방향타를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철학자들이 과학의 방향에까지 개입하려는 시도에서 나는 국내 과학학자들의 의도를 읽게 된다. 이런 학풍 속에서는 과학과 철학의 건강한 대화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3.
기본적으로 나는 과학과 철학이 상호영향을 주고 받는 것에는 비가역적인 일방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철학이 종언을 고하고 그 자리를 과학이 물려받은 이후로, 과학자들은 철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보를 이뤄왔다. 물론 과학자들이 측정량을 가지고 이론을 건설하는 과정에 일정한 지침서가 개입할 수 있고, 그 지침서의 확립에 철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지침서에 미치는 영향은 철학에 의한 인과작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은 더욱 범주가 넓은 것에 의함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철학은 언제나 과학적 발견들에 귀를 기울이며 (박이문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응전’해 왔고, 과학은 철학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않았다. 이 상황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철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과학자들에게 철학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하는 쪽은 철학자들이다. 과학자들은 아무짓도 하지 않고 그저 연구하는 것만으로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지만, 철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내가 발견한 것은 이런 일방향성이다. 그리고 나는 베르나르의 말처럼 과학의 발전에 있어 철학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거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비록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나, 중성자의 발견에서 일본의 과학자가 공자의 ‘중용’을 읽고 이미 중성자를 예측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나돌지만, 과학적 발견의 과정은 다양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맥클린톡은 옥수수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즉, 철학이 과학적 발견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 반례들을 잘 알지 못한다. 인지신경과학 분야에서 철학자들이 마치 과학자인척 행세하고 있지만, 그건 인지과학이 재생산가능한 측정량과, 확고한 이론틀 속에 우뚝 서지 못하고, 철학적인 이론들로 논쟁을 거듭했던 시기의 일이었고, 더구나 그 분야가 인식론을 전공하던 철학자들에게 흥미있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 일방향성은 철학자들에게는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4.
이런 와중에 철학자들이 못마땅한 과학을 통제하기 위해 택한 분야는 윤리학이었다. 과학자의 윤리강령이라던가, 우생학이나 생명공학, 그리고 유전자 조작식품등과 관련된 윤리적 논의는 철학자들이 가장 신나게 과학에 딴지를 걸 수 있는 분야가 되었다. 특히 과학계에서 보이는 비윤리적인 속임수들과, 현대과학의 폐해가 부각될때마다 철학자들은 윤리학으로 과학을 통제해야 하는 것처럼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견해는 일종의 인문학적 제어론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최종덕 교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강조하며 ‘철학으로 과학하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이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과학적 진보에 미칠 수 있는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자와 철학자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둘로 좁혀진다. 하나는 과학적 발견과 성과물들이 윤리학과 충돌하는 지점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대과학의 성과들을 가지고 철학을 건설하는 지점이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시도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원주의와 같은 ‘나쁜’ 방법론에 빠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군다나 철학이 윤리학을 포함한다는 이유로 더 윤리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가진 것도 아니며, 윤리학이 어떤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답인 것 같지도 않다. 결국 국내의 생명윤리학자들은 ‘과학자 윤리강령’ 따위의 무의미한 일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 이 문제는 우선 철학이 과학을 제어할 수 없다는 철학자들의 깨달음과 더불어, 과학을 경제적 논리로부터 해방시켜 좀 더 많은 과학자들이 철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로부터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대한민국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을 제어하려 들 것이고, 과학자들은 귀를 막은 멍청이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오늘 날씨는 참 맑습니다. 기분 좋은 하루 ^_^

    둔하게도 이 글에 와서야 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현대의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도 지식도 없었기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올려주신 여러 글들의 맥락으로 살펴볼때 다윈의 진화론 이후에(물론 그 이전에도 그랬을지 모르나) 정치적 수단으로 쓰여진 과학이론들이 있었고, 이를테면 우생학을 근거로한 유태인의 학살 등, 세계 대전 이후에 엉뚱하게도 그러한 비난을 과학이 받아야 했었거나 혹은 진화론 등이 보수의 질서를 흐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나보군요. 그 공격 수단이 바로 철학이었을지도 모르구요. 그래서 쌤이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라는 글을 쓰셨던 것 같구요. 이어지는 철학 자폐증, 끌로드 베르나르의 글까지 그 연장선상에 있는듯하네요.

    철학계는 관성을 가지고 계속 그러한 행동을 지속해왔을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가장 이야기거리가 많은 분야가 과학이라는 곳이여서 그랬을 수도 있구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려 드는 것이 학문이라면 당연히 그랬거니 싶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철학은 자신의 행위를 계속 했다는 것이 되고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을겁니다. 다만 쌤께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은 여기부터인 것같습니다. 도가 지나쳐 철학을 따라가면 과학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과학의 발전의 길을 철학이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제가 이해한 것들이 맞는다면 그것은 철학과 과학 그 학문 자체의 영역이나 방법 문제가 아니라 그 학문을 이용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그 사람들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나 만일 맞다면 저도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네요. 마치 한편의 무협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절벽에 떨어져 고서를 찾았는데 계속 읽다보니 하늘을 날고 검을 들어 산을 자를 수 있더라라는 시나리오군요.

    모르겠습니다. 뭔가 막히고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팬을 잠시 놓아두고 세상을 돌아보고 사람을 보고 돌아오면 뭔가 새로운 방향이 보인다고도 하던데 저는 택도 없는 수준이라 그런 말의 끝자락도 구경 못했네요. 과연 과학이 지금 그런 막막함에 부딪혔나요?

    ==========
    p.s.
    요 몇일전부터 주저리가 길어지는데 그냥 듣보잡이 지껄인다 생각하셔도 좋고, 배우려는 학생의 부족함이 많이 들어나는 말이라 생각해주시면 매우 송구할듯합니다. 여하튼 오늘도 잘 배우고 갑니다. 재밌어요 ^^

  2. 철학도, 형이상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에 반대할 부분은 단 한글자도 없습니다
    과학철학자들, 영미권에서 공부한 윤리학 전공자들이(이렇게 봐도 되지요?) 그런 쓸 데 없는 일을 하고 있군요. 과학을 속속들이 다 아는 듯, 저와 같은 형이상학, 심지어 유럽철학자들 전체를 무슨 점장이 취급하는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군요. 쯧쯧..
    철학과 폭파시키자 주장하실만했다 생각되는군요.

    “현대과학의 성과들을 가지고 철학을 건설”해야한다고 저는 배웠는데, 좀 다르게 가르치는 데도 있나 봅니다.

    좀 사족인데.. 베르그송이 베르나르를 기반으로 철학을 세웠다는 말씀은 조금 과장은 같아요. 뭐 맥락이 있어서 맞춰서 쓰신 거겠지만.. 좀 걸쳐 있는 사람으로서는 과하다 싶어서요.

    저 같은 과학무지렁이도 읽고 철학할 수 있게 과학의 성과를 잘 풀어서 가르쳐주는 역할을 해 주세요.
    그럼.

  3. 좌측의 트위터 Follow me를 우측으로 옮겨 주실 순 없는지요..?
    글 읽는데, 살짝 방해가 되네요.

  4. 글의 기본적인 맥락에는 동의합니다. 저 역시 생물학과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어설픈 과학철학이나 어설픈 의철학이나 어설픈 생명윤리학이나 어설픈 의료윤리학의 담론들은 아주 질색인 사람에 속하니 말입니다(여기서 ‘어설픈’이란 현실이나 실재와 괴리된, 학문을 위한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단 이런 학문들은 재미부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담론들의 의미 추구 자체까지 전혀 무가치하거나 몰가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명기해 놓아야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정작 드리고 싶은 얘기는 최종덕 교수님이나 강신익 교수님에 대한 우재 님의 오해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따지고 들겠다는 의도 따윈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근래 몇 년 간 최 교수님의 사상적 궤적을 지켜보며 나름 영향을 받아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강신익 교수님의 제자로서 어쩔 수 없이 몇 자 남기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일단 무엇보다도 동영상 몇 개 보시고 나서 두 분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자라 해서 스승을 덮어놓고 추종하는 그런 덜떨어진 부류는 아니므로 일단 그 전제 하에 주제넘게 변호의 발언을 해 보자면, 철학으로 과학을 하든 윤리로 의학을 하든 이건 두 분에겐 일종의 레토릭인 것이지 두 분이 스스로 과학자연하거나 의학자연 하는 분들은 아닙니다. 물론 학계에도 인맥이란 것이 있듯이 두 분 모두 우재 님이 이미 비판하신 송상용 선생님과 관련이 있음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서 이 팩트 자체가 두 분에 대한 일방적인 낙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로 강 교수님만 해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과학 사기극’에 대해 국내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비판을 하셨던 분이다 보니 흔히 대중에겐 생명윤리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교수님 본인은 국내 생명윤리학계의 전반적인 풍토에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두 분이 철학적으로 전일론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신과학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일종의 신비주의적 전일론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죠. 다만 두 분이 예전부터 면역학이나 신경학 분야 등을 천착해 온 결과, 이로부터 생명 현상이란 단순히 환원주의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귀결에 이르렀던 것뿐입니다. 저 역시도 (직업상) 의사이다 보니 생명현상을 DNA 그 자체로 보려는 크레이그 벤터 같은 인간 말종에게 무한한 거부감을 갖고 있고요. 이러한 면에선 한국에서 철저하게 유전자 결정론자로 오해받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양반이 훨씬 더 생명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 물론 오해는 없으시길. 전 도킨스를 오독하고 있는 국내 상황이 싫다는 것이지 도킨스의 관점이 맘에 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

    다음으로, 두 분이 비판한 것은 과학적 환원론이 아니라 철학적 환원주의입니다. 이런 건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개념적 구분법이라 할 수 있는데 설마 두 분이 과학적 환원론 자체를 거부야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두 분은 과학적 환원을 자연과학의 존립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보고 계시죠. 두 분의 비판 대상은 알고 보면 두 분이 전부터 거듭 비판해 오셨던 윌슨의 <통섭>식 환원주의 ‘독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환원론이라는 방법론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제 허심탄회하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직업적 과학자 중에서 우재 님 수준의 과학적 성찰을 보이는 과학자가 도대체 몇이나 된다고 보십니까? 제가 보기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제 주변의 의학자들만 해도 비록 요즘은 지노믹스니 프로테오믹스니 뭐니 해서 ‘옴’ 수준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실험실 논리 이외의 것은 보려 하지 않아요. 거기다 대고 아무리 진화가 어쩌고 환원주의가 어쩌고 떠들어 봐야 관심도 없을 뿐더러 우이독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 우재 님 말씀마따나 과학자연하는 과학학자들이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나오는 건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 같은 사회에서 레지스탕스 전력까지 갖고 있었던 자크 모노 같은 과학자 및 사상가를 기대하는 건 여전히 무리라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아들 같은 양반이 기초의학의 대부로 존경받는 사회에서 뭘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기본부터가 돼먹지 않은 사회인데?

  5.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겻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찾아보려다가 동영상을 다 못듣고 귀찮아서 말았는데, 최-강 두분 대담에 등장했던 ‘바람직한 생물학자’라던 무슨 세포생물학자(이름이 기억안남), 에 대해 강선생님께 좀 여쭤봐주시기 바랍니다. 진지하게 그 사이비 과학자를 과학자라고 생각하고 있는건지. 그 후에 이야기 합시다. 그게 저에겐 가장 충격이었으니까요.

  6. 항상 과학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철학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고대 그리스로 부터, 지금의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은 철학을 뒤흔들었습니다. 지동설이 검증되면서 인간 중심적인 철학이 영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혹은 양자역학은 기존의 철학 개념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새로운 철학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철학과 과학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철학보다 먼저 검증된 과학이 나오고, 그 과학이 새로운 철학을 낳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과거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져왔으니까요.
    아직 하찮은 중학생이라 옮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지적 바랍니다.

  7. 글잘쓰시네요 생물학도 잘하실지는 알지만 글쓰는걸 보니 생물학을 잘한다고해도 정말 아.. 박사과정 하신분꼐 이런말은 무뢰죠 근데 문과도 재주가있는거같아요 그런데..문과뇌랑 과학뇌랑 좀 다른거같은데

  8. 왠지 독일 이데올로기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테제가 떠오르네요.
    물론, 조금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딱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단순한 가역반응이 아닌 조응/제약 관계인 듯.
    요새는 자기 분야도 아닌 주제에 대해서 식자연하면서 떠들어대는 과학철학자들이 많으니 원…
    인문학과 과학 양쪽에 걸쳐있다보니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건지…
    생각해보면 고대 자연철학은 실증이 어려운 부분을 나름 인과적인 논증을 통해 도출한 가설로 채운 것이었고, 이젠 이미 그런 인식론이나 존재론적인 문제들을 넘어서서 과학이 제 발로 설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과학에 대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주문하는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철학이 과학에 작용할수 있는 부분은 가치론과 윤리학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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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ll Model 2010/07/20

    원래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단정짓고, 전통적인 철학의 범주 안에만 가두려는 발상은 반동적일 수 있다. 오히려 필요한 태도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태를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철학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것처럼 해당 주제를 철학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태도가 철학의 종말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