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불필요한 과학전쟁

‘과학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2001년의 과학철학회 대토론회 자료집을 들춰보게 된다. 물론 과학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홍성욱이나 이상욱, 이영희, 김명진 등 과학사회학 혹은 과학철학 계열의 학자들의 일련의 글들을 통해 이 논쟁을 접하게 될 것이다. 

김동원의 이 글은 2001년 과학전쟁 대토론회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의 지적에서 현재 우리는 몇걸음이나 더 나아갔는지 돌아보고자 오래된 글을 옮긴다. 2001년이다. 10년이 지났다.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불필요한 과학전쟁

김 동 원 (한국과학기술원)

우리나라에서 현 시점에 과연 ‘과학전쟁’에 관한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필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토론의 주체가 되어야 할 두 당사자, 즉 과학자 그룹과 스트롱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일부 과학사회학자그룹이 모두 이러한 토론을 벌이고 그것을 소화할 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과학자 그룹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가 서구의 근대 과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소화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 남짓하다. 이렇게 도입된 기간이 매우 짧을 뿐 아니라 그 도입과정 역시 왜곡된 면이 많았다. 구한말 막연하게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알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배워야할 지 아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 결과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했고, 겨우 체계적으로 인력을 키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일본의 강점으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 35년 동안 한국인으로 대학교육 이상을 받은 과학자, 공학자의 수는 매우 적었다. 박성래-김근배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략 400여명 (박사학위 소지자 11명 포함)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이 소수의 인력도 식민지 지배라는 기형적 상황 때문에 과학을 “우리나라”에 뿌리내리는 데에 크게 공헌하지 못했고, 해방후의 혼란으로 이들마저도 남, 북, 그리고 외국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나라(남한)의 경우 서양의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과학기술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하고 과학이 우리 생활에 보다 가깝게 다가온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잘 훈련받은 과학기술인력의 수요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과학기술의 사회적 중요도 역시 함께 높아졌다. 그리고 이 때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과학기술자들이 최신 과학기술을 가지고 돌아와서 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이 과학활동을 하는 태도, 과학의 본질에 관한 생각, 그리고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식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현재 우리나라 과학자 거의 전부가 “2차대전 이후”에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2차대전 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미국에서 발전한” “현대과학”만을 과학의 전부로 알고, 그렇게 경험했으며, 또 후학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보다 훨씬 더 긴 세월동안 지속되어 온 다른 성격의 과학활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오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내놓은 이론의 철학적 의미나 종교적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반면, 2차대전을 계기로 이러한 과학자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대신 훨씬 “기능적”으로 과학을 이해하려는 과학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과학자도 많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모두 경험하고 연속성을 설명해 줄 과학자그룹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편 서구에서는 처음부터 과학활동이 사회나 그 시대의 문화활동 전반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성장했던 데 비해서, 우리의 경우 아주 최근까지 과학활동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작았기 때문에 과학과 사회, 또는 과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필요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묵묵히 자신의 연구와 강의만을 수행하면 되었다. 즉 그 동안 우리나라에는 두 문화의 “분리”는 있었지만 “교류”나 “충돌”은 없었던 것이다. (그림 1)

하지만 1980년대부터 과학기술자그룹이 보다 성숙하게 되고, 과학기술과 과학자가 우리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높아지게 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과학자들이 그 이전시기와는 달리 외국 선진 과학기술을 단순히 소개하고 소화하는 데에서 벗어나 첨단연구에 많이 종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과학(또는 과학활동)의 본질을 생각할 기회를 직접 갖게 되었다. 즉 남이 만들고 해석까지 붙여놓은 문제나 상수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문제의 의미를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최근 우리 과학자들이 과학이나 과학활동의 본질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고민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과학과 사회-문화의 “분리”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서 이제 과학자들도 과학활동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역할, 그리고 과학연구가 가져올 지도 모르는 부작용 등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최근 국내의 훌륭한 과학자들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과학을 직접 강의하거나, 번역이 아니라 직접 과학서적을 저술하거나, 환경문제 등의 해결에 직접 뛰어드는 것 등은 1960년대나 70년대의 과학 대중화 운동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활동들이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현재 활동중인 50대 중반 이전 과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나라 과학자 1세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과 사회, 과학과 문화의 관련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과학자라 할지라도 이런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경험도 없고, 또 조언을 해줄 선배급 과학자들도 없었기 때문에 그 활동과 의식구조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과학의 역사가 아주 짧고 기형적이었던 점, 유교적 전통의 편견, 문과와 이과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이상한 교육형태 등이 더해져서 더욱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따라서 필자는 과학자들이 단순히 세부적인 연구에만 몰두하는 데에서 벗어나, 과학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고,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과학과 다른 문화활동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에는 보다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러한 사고나 활동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과학자가 “과학전쟁”(또는 그 토론)의 한 축을 구성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하지만 이번 토론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오세정, 장회익 교수의 글은 그러한 날이 필자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물론 두 분의 다분히 낭만적이고 지극히 단순한 과학관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과학전쟁”과 이 토론의 또 하나의 당사자인 과학사회학자와 그 지지자 그룹은 필자의 견해로는 과학자그룹보다 더욱 준비가 안되어 있다. 필자는 국내의 과학사회학자 그룹, 특히 스트롱 프로그램의 지지자들이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지 사회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학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오랜 시간 관찰할 필요도 없으며, 애정을 가질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어 보인다. 그결과 자신이 직접 오랜 시간을 들여서 사례연구를 하기보다는 외국의 사례를 단순히 차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에 보다 많은 정성을 들인다. 과학사회학자의 역사인식 또한 문제이다. 교수신문(1998년 4월 6일자)에 실린 김환석교수의 재반론 일부가 좋은 예이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근대과학은 16세기이후 서구 사회에서 부상하던 신흥 중산층의 세계관으로서, 초기에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여 신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기독교적 가치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또한 이는 비서구와 자연, 여성 등에 대한 군사적, 정치경제적 정복과 깊게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18세기의 계몽주의에 이르러 신흥중산층이 기독교와 귀족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게 되자, 근대과학은 자신의 탯줄인 기독교와 단절을 선언하면서 중립성, 합리성 등 스스로 인신론적인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김환석교수의 과학관이 위와 같은 역사관에 기반하고 있다면 필자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필자가 알고 있는 과학사회학이나 과학사회학자 모습이 아니다. “과학전쟁”에서 언급되는 소위 스트롱 프로그램의 창시자나 지지자들–Collins, Latour, Pickering. Pinch 등–은 모두 과학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의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은 모두 “구체적인 사례연구”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때로는 매우 과격하게 들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들의 논문이나 책을 읽었을 때 무엇인가 고민하고 다시 한번 생각할 거리가 생기는 것은 바로 사례연구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Collins와 Pinch의 <골렘: 모든 이가 과학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는 화합물을 통한 기억의 전달,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의 실험적 증명, 파스퇴르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논의, 그리고 중력파 검측 등 잘 알려진 사례를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다. 이렇게 “구호”가 아닌 “사례”가 매개물이 되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이들의 책이나 논문을 읽고 같은 언어로 논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Weinberg가 Pickering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Pickering의 <쿼크의 구성(Contructing Quarks)>이 구체적인 사례연구이기 때문이다. 1998년 가을 미국 미주리주 캔사스시에서 열린 미국과학사학회-과학철학회 합동 연례총회에서 <과학전쟁>에 관한 두 개의 토론회에서도 공허한 논쟁보다는 매우 구체적인 질문과 대답이 차분히 이어져 참석했던 필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환석 교수를 비롯하여 국내의 스트롱 프로그램 지지자들의 경우 자신의 “구호”는 있지만 자신의 사례를 기반으로 주장을 피지 못하고 있다. 즉 외국의 스트롱 프로그램의 예를 빌어다가 자신의 “구호”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결과 주장은 더욱 과격해지고 논리적 근거는 더욱 약해진다. 예를 들어 필자는 김환석 교수가 주장하는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스트롱 프로그램 또는 과학기술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이 점에서 필자는 특히 “과학전쟁”의 내용 상당부분이 이들 국내 스트롱 프로그램 지지자들에 의해서 왜곡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문제는 “과학(또는 과학이론)이 얼마만큼 자연을 반영하고 있고, 얼마만큼은 인위적인가(또는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또는 “과학내용에 과학외적인 영향이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였다. 필자는 아무리 스트롱 프로그램의 절대적 지지자라 할 지라도 과학이론이 자연과 무관하게(즉 자연의 역할 0%) 오로지 과학자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구성되었다(사회의 역할 100%)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과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토론의 초점은 그 비율(자연:사회)을 예를 들어 90:10으로 할 것이냐(과학자 편) 아니면 50:50 또는 30:70으로 할 것이냐(스트롱 프로그램 지지자)에 있다. 즉 상대적 중요도의 문제이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논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점은 서구 스트롱 프로그램 지지자들의 사례연구를 꼼꼼히 읽으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내에 과학전쟁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점은 많이 퇴색되고 대신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내용이 왜곡된 면이 있다. 필자는 그 원인이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국내의 스트롱 프로그램 지지자들이 자신의 사례연구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고, 대신 서구의 주장을 사례연구는 생략한 채 가져다가 자신의 주장에 덧붙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준비가 안된” 일부 과학사회학자 그룹이 국내에서 “과학전쟁”의 한 토론 축을 형성하고, 역시 “준비가 안된” 과학자그룹과 논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1998년 교수신문에 연재된 김환석 교수와 오세정 교수의 논쟁으로 시작된 국내의 “과학전쟁”은 관심은 끌었지만, 소득은 별로 없이 끝나버렸다. 외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1990년대의 요란했던 “과학전쟁”의 결과 분명히 성과가 있었다. 물론 “소칼의 날조 사건”과 “와이즈 사건”과 같이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전쟁동안 상대방의 의견을 보다 분명히 알게되었고, 또한 자신들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갖는 등 긍정적인 면도 많았다. 중요한 점은 이 전쟁이 꽤 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는 비교적 가벼웠다는 점이다. 전쟁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스트롱 프로그램 주장자들이 소수임을 인정하고 과학기술학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으며, 논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이 과학자 전체를 대변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되었다. 스트롱 프로그램 주장자들을 비롯하여 이들을 심정적으로 지원했던 과학기술학관련 학자들도 과학자그룹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필자는 언젠가 국내에서도 1990년대 서구의 “과학전쟁”과 유사한 대논쟁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나라 과학자그룹과 과학기술학 학자그룹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통해서 많은 문제가 일시에 표출되고,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이 시점이 분명 그 때가 아니다. 지금은 미래의 그 때를 위해서 과학자 그룹과 과학기술학 학자그룹 모두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쏟으며, 서로 상대방을 북돋우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때가 아닐까?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부 논지들에 대한 동의 여하를 떠나, 한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 그 시공간 속의 과학 장에서 형성, 숙성된 쟁점들을 추려낼 수 있어야 하고, 안 그러고선 제 아무리 “근본적 논의”라 한들 가짜 논쟁일 뿐이라는 글쓴이의 지적은 두고두고 새겨들어야 할 얘기 같아요.

    그래도, 이런 의문이 가시진 않네요. 근대 자연과학(이라는 제도화된 지식) 자체가 실은 유럽세계의 자본주의적 “세속화” 과정에서 이 과정의 필연성 내지 불가피성을 지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집단적 이해”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명토박아두자는 게, 과연 자연과학 장에서 이뤄지는 지적 활동-성취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관심없음”(혹은 전면 부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

    그건 분명 아닌 것 같거든요. 일테면 이런 거죠. “민중의 지팡이”가 되겠노라는 생각으로 경찰조직에 투신했다는 어느 친구가 있다길래, 이 친구한테다 이런 얘길 합니다. ‘대한민국 경찰은 그 계보상 식민주의 권력기계를 이루던 행정조직 내지 이데올로기국가장치로 사실상 명의만 달랑 바뀐 채 여지껏 굴러먹어온 건데, 말난 김에 한 술 더 뜨자면 근대국가의 이른바 치안기구 자체가 “민중의 지팡이”였던 적은 기껏해야 가뭄에 콩나듯하더라’라고 말예요. 물론 새내기 경찰은 이런 얘길 듣고서 일단 발끈해 아예 안 들은 셈 치거나 모종의 환멸감 탓에 의욕이 크게 꺽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실인즉 그러하다면 내가 혹은 나 같은 이들이 진정 민중의 지팡이가 되기 위해 경찰조직 안팎에서 해야 할 일들은 뭐며, 어떻게 하면 실효를 거둘지 궁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지식생산 활동이 어떤 사회적 내력 또는 역사적 계보를 가졌던 건지 “종종 불편하게” 마주하는 일 또한 이런 궁리의 계기를 넓히는 데 보탬이 됐으면 됐지, 적어도 발목을 잡진 않을 것 같단 말이죠. 외려 이런 궁리의 계기들이 그간 좀체 생기지를 않아 자연과학적 지식생산 활동에 대한 불신(과 짝패를 이루는 물신화된 맹신)이 더 심해졌던 것 아니냔 겁니다. 과학 장 안팎의 자조와 냉소는 덤으로 따라 붙고 말예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줄기세포의 산업자본화를 둘러싸고 의생명과학계 중심부와 주변부 엘리트들 간에 벌어진 (비)극적인 알력다툼이었던 이른바 ‘황우석 사태’도, 따지고 보면 이런 궁리의 계기들이 부재하거나 빈곤했던 데서 기인한 걸 텐데요.. 지구적 규모로 이미 구조화돼온 과학지식 생산의 지정학적 순환-연쇄 속에서 한반도-동아시아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맥락이 어떤 쟁점들을 새롭게 던지거나 의미심장하게 되풀이하고 있느냐는 물음은, 그래서 결코 “과학외적”일 수 없고 오히려 자연과학 연구자들의 집단적 활력과 자긍심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다시 조직하거나 새롭게 구조화하려는 궁리와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달린 거라고 해야겠지만요.

    글쓴이께서도 이런 물음/문제틀의 중요성 자체에 딱히 토를 달 린 없으실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글쓴이께서 본인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데 끌어온 한국 근대 자연과학 수용사에 관한 김근배 교수의 연구가 앞서 던진 물음을 푸는 데 득보단 실이 더 많을 거라고 보는 입장이라서. 뭐, 반면교사도 넓게 봤을 때 득이라면 득으로 칠 수 있긴 하겠습니다만..

    전 자연과학사 분야를 포함해 한반도/동아시아 근현대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식민지/식민주의 경험의 위상을 “진정으로 세계사적인 문맥”에서 어떻게 설정하고 서술하느냐가 굳이 쪼개 보자면 개별 사건들의 디테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쪽이예요. 아니, 사건들의 디테일이 ‘서술 구도’나 발화 위치에 따라 판이한 의미와 해석적 맥락을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김근배 선생님의 연구는 “수탈론”적인(내지 민족주의적인) 역사서술 경향에 치우친 나머지(혹은 그런 서술양식 속에 개별 사건들을 “억지로 짜맞춘” 나머지), 여타 분야사 연구에서도 그랬듯이 “좌절/파행 속의 성취/발전”이란 측면만을 부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제가 보기엔 이런 근대사서술 방식이 안고 있는 분석상의 커다란 난점과 공백, 자가당착이야말로 글쓴이께서 강조하신 바, 이곳의 역사적 맥락에 걸맞는 쟁점들을 형성하고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외려 걸림돌인 것 같더라는 거죠.

    그렇다 보니, 김환석교수 식 접근방식의 “몰역사성(혹은 맥락없음?)”을 지적하는 글쓴이의 논지는 “가짜/사이비 논쟁”의 쓸모없음과 해악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와 따로 놀면서 제가 보기엔 “뭔가 어정쩡한 일시중지”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 소개글에서 언급하셨다시피, 어차피 글쓴이의 의도는 알맹이 있는 논의의 진전이 무리인 조건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논의가 뻗치지만 않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 정도면 선방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양비론적 일시중지가 차라리 더 나은지 뒷받침하는 논거들 또한 적어도 저로서는 썩 와닿지가 않더라고 할까요.ㅎ;

  2. 너도 지랄한다. 스타일로 철학을 한다고, 글좀 쓰게 되니 되는 말은 다 씨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썩은 먹물이구나.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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