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heterosis.egloos.com/773155 원문
2004년 10월 8일, 100분 토론을 보고. 이 당시 러플린 총장이 꽤나 화재였다.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100분토론에서 찬반의견없이 진행하는 토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방청객이 이렇게 많은 의견을 낸 것도 이례적이다. 물론 중요쟁점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일할자리를 마련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환영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정부에 돌리려 하는 것은 권력의 시녀로서의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서울대 공대 학장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말했듯이 수구꼴통이다. 양보다 질이라는 것도 옳은 이야기이고, 기초기술 (부품등)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양보다 질이 우선이라는 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막바로 빗대어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는 차근차근 기초부터 다져온 역사가 없다. 양과 질의 문제는 과학기술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굴러간 이후에나 논의될 문제인 것이다. 핸드폰과 반도체 기술 몇개로 국가가 먹고 산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모델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기초구조가 건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질을 추구하는 것은 기업구조조정식의 발상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질이 안되는 사람들은 도태되라는 것인가. 각자가 능력이 허용되는 범위안에서 일할 곳과 범위를 마련해 주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닌가.
또한 기득권과 비이공계출신들에 의해 집행되는 행정이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학생의 발언에 대해 카이스트가 질이 떨어졌다느니 충대와 뭐가 다르냐느니 하는 발언이 학장이라는 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그럼 서울대는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댁들이 간판떼고 나면 머가 있길래.
그런 무식한 공대 학장에게 또 방청객들은 왜 가만히 있는가. 그렇게 자유로운 발언이 주어졌음에도 기가 찬다는 식의 표정만 짓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게시판에서 분노를 폭발할 열정이 있으면 그런자리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카이스트 대학원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이 서울대 공대 학장의 발언의 핵심을 논파할 생각은 안하고 카이스트가 능력이 뛰어나서 돈을 더 받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카이스트 니네들처럼 행복한 놈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카이스트가 질이 떨어졌구나”라는 식의 발언 앞에, 왜 전체적인 시스템을 보지 않고 우리의 의견을 카이스트 학생만의 의견이라고 보느냐는 당당한 말을 할 수 없는가. 왜 양보다 질이라는 화두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무지한 발상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는가. 기초부품을 만들자면서 양보다 질을 주장하는 그 무식한 공대학장의 논리를 왜 논파하지 않는가. 왜 자신들 학교의 사정을 넘어 전체적인 구조속에서 논의하지 않는가.
결정적으로 대전방송 40주년 기념식이 아니었으면 이따위 토론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는 비극저인 상황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가. 우리 나라에서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것과 이공계문제라는 것이 잠시 덮어두고 어르면 해결된다는 조선시대의 계급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음에 왜 분노하지 않는가. 결국 이공계 위기의 논의에 찬반구도가 필요없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를 토론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기술자라는 인식이 이렇게도 뿌리깊다는 것을 도대체 왜 모르는가. 그렇다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공직으로의 진출과 정계로의 진출뿐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이 유치함을 또 왜모르는가.
과학과 기술은 하나의 문화다. 그것이 문화가 아닌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 현실속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