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사이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뭣도 모르는 학부생 주제에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다 알게된 곳이었고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곳이다. 철학이라곤 개뿔도 모르던 나에게 회의주의라는 반가운 이념을 소개해주었고, 내가 읽은 책의 저자들(예를 들어
도킨스)이 어떤 이념적 스펙트럼에 속해 있는지 확실히 알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 시절 난 도대체 왜 굴드와 도킨스가
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많은 것을 배운 곳이긴 했으되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항상 가슴
속엔 찝찝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뭐였을까. 참으로 그곳은 살벌한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는 뾰족한 글들이 오고 간다. 대충 비슷한 회의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김진만이라는 그곳의 운영자와 어떤 전직 교수
사이의 살벌한 전투는 내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던졌다. 오캄의 면도날과 같은 비유를 사용하며 날카로움을 견지하는 같은
세력이, 그래서 과학이라는 합리성의 도구를 사용하는 그들끼리 도대체 왜 치고박고 싸우는 걸까? 그 시작이야 몇가지
의견충돌이었을테지만, 결국은 권력다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님 말구. 사실 나는 회의주의자라 자처하는 이들로부터도 호르몬에
지배받는 침팬지 무리의 수컷끼리의 다툼을 보고 있었던 듯하다. 스스로를 합리주의자라 자처하면서도 결국은 침팬지의 욕망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거다. 마치 아주 객관적인 눈으로 그리고 인간이 아닌 외계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도 결국
자신들도 인간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거다.
그러다가 그 사이트 출입을 안한지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들어가
보았을 때 참으로 황당한 사건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문제는 또다시 터져버린 싸움박질이었는데 정치적 이념성향을 가지고 터져버린
토론이 문제였다. 좌파적 성향을 가진 이들과 우파적 성향을 가진 운영자 사이의 다툼이 극에 달해 결국 그곳에서도 좌파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이탈해 Skeptical left라는 사이트로 이동해 버린 듯 하다. 뭐 정확한 궤적은 추적해보지도 않았고 그럴 가치도 없지만 대충 그럴거라고 생각된다.
뭐
냐. 결국은 가장 회의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침팬지나 한다는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정치하는 침팬지요”라고 스스로를 광고하고 다녔던 셈인가. 결국은 이놈의 호르몬을 어떻게든 조절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저히 이성으로 안되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과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도 이모양이니 결국 과학적 사고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회의주의도 그닥 합리적이지는 못한 모양이다. 뭐 물론 회의주의 자체가
문제이겠는가. 그걸 국내에 들여 온 이들의 자세가 문제였겠지마는. 그래도 회의주의가 가진 한계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항상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보라. 과학이 정치에 중립적이지 않다는 글이다. 언젠가부터 느끼기 시작한 것인데 이 땅의 과학한다는 자들은 과학이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깊숙히 파고 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과학도 사람이 하는 짓이라 오류가 있고,
그러면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항상 현재형의 과학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시사인에
썼던 글에도 브릭에서까지 친히 찾아주신 똘마니들이 마구 악플을 남기더라. 뭐 그래라. 너희들의 과학은 그런가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종교다. 뭐라더라 지금도 있지만 과학교라고 하나? 그런정도는 아니겠으나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복합체와 맞닥드렷을 때 편협한 사고방식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은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난 처음에 파이어아벤트가 나쁜놈인 줄 알았다. 뭐가 “방법에의 도전”이고
“아무거나 다된다(anything goes)”라는 거야. 근데 내가 보기엔 파이어아벤트처럼 과학의 역사를 잘 파악한 철학자도
드물다. 그가 그런 책을 쓰게된 역사적 동기를 잘 이해해 봐야 한다. 논리경험주의자들과 그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둔 포퍼가 아무리
과학철학을 건설하려 했어도, 파이어아벤트의 눈에 이들의 시도는 과학이라는 다양한 숲을 획일화하려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거나 된다”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실상 덤불과 같은 과학의 역사를 지네 맘대로 가지치기해서 예쁜 정원수로 만들어
놓는 작태를 하는 이들이 내 눈엔 더 나쁘다. 실상 과학사의 공부는 과학자의 과학하는 능력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에게 겸손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스켑틱 진영의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과학을 지나치게 현재완료형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이것도 많이 나아진 듯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렇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과학이 현재완료형이 되는 순간 과학은 종말을
맞게 된다. 과학은 항상 진행형이어야 과학이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곳에서 논했으니 대충 생략할까 한다. 실상 과학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현상에 정량적 신뢰를 불어 넣는 “낮의 과학”과 정량화로부터 얻어진 데이터들에 상상력의 이론을 부여하는
“밤의 과학”의 조화에 있다. 뭐 이정도로 하자. 아직 이걸 조직화하기엔 내 머리가 너무 작다.
우병 사태가 터졌을 때 이곳 대학원생들의 반응은 무관심한 축과 격렬한 수입반대로 갈렸다. 이곳의 교수들은 수입을 찬성하는
쪽이었다. 대학원생들이 과학적이지 못해서, 게다가 광우병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생화학에 능통한 그들이 괜히 수입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이곳에선 브릭에 올라오는 차가우리만치 광우병 괴담을 까대는 글들에 분노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실 과학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다 아니다를 보여주는 데이터에 반박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이곳 대학원생들 매우 바쁜 사람들이다. 물론 바쁘기도
하지만 격분해도 글을 남길만큼 열정도 없고 글재주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브릭의 입장은 지나치리만큼 차가웠다. 그래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어도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래서 뭐? 소를 수입해도 된다는 논리가
따라 나오는가? 참 편하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이 땅에서 권력을 얻을 수 없는 거다. 사회학적 논의는 모든 변수를 고려한
복잡한 상황에서 전개될 수록 신빙성을 획득한다. 과학적 논의처럼 실험 한방으로 모든 것을 잠재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가 인간을 대하기 위해선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기불통신
이야기를 한다면서 이상한 이야기들만 해댔다. 근데 정말 이상한 이야기였을까? 난 현시점에서 매우 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지나온 어느 곳에서도 어느 이념에 종속되지 않았으며, 전업으로 삼고 있는 과학에서도 과학에 종속되지
않았다. 한때는 그러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조각해 나가는 중이다. 누가 나보다 과학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에게
질투를 느낄 것이고 나보다 열정적으로 과학에 미친 사람을 보면 나는 그에게 키스를 퍼부울 것이다. 나의 주위에서 그러한 미친놈을
별로 본적이 없다. 그래 나는 과학을 사랑한다.
예전에 최재천 교수가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스모크 시절이었는데 난 거기다 대고 그랬다. “알며 사랑하는 것이지 알고 나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 후에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알게 됐다. 그래 돌아오니 사랑이다.
왠지 닭살이다. 예수도 이런 길을 돌아 사랑에 이르렀을까? 아니겠지. 과학이 뭔지도 몰랐을 텐데. 그런데도 사랑이다. 한쪽에선
합리주의자의 도를 외치면서도 휴머니즘이 없는 집단과, 다른 쪽에선 휴머니즘을 외치면서도 과학적 사고가 부족한 집단이 서로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고를 못한 채 으르렁 거린다. 또 어떤 집단은 “통섭”이라는 수입된 개념에 열광하며 “융합”을 이야기 한다.
웃기고 자빠졌네.
그렇다고 감상주의에 빠져있다는 건 아니다. 나같은 과학자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브릭이나 회의주의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번 덤벼봐라. 재미있게 다퉈보자. 나도 좀 유명해져 보자.
결국 무엇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행위는 이념적 성향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를 스켑틱스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스켑틱스라는 종교에 빠져 든 것이다. 아이러니 아닌가. 과학과 종교라니. 아 맞다. 모기불통신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기
불님은 매우 냉소적인 분이다. 이글루스에서 활동 같지 않은 활동을 할 때 이 분의 광범위하고도 열정적인 블로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하루의 몇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걸까 싶기도 하고 뭐 그랬다. 그래도 참 고마웠던 것이 많은 소식들에 접할
수 있도록 루트를 허용해 준다는 거였다.
내가 트랙백을 걸어 둔 글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저 데이터 만으론
과학적으로 딴지를 걸 게 없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보자. 결국 광우병이라는게 퇴행성신경질환의 일종이다. 알츠하이머나
파킨슨과 비슷한 부류의 병이라는 말이다. 기불님 정도라면 인간이 왜 늙는지에 대해 잘 알테고, 조지 윌리암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정도는 읽었을 것으로 믿는다. 결국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고 스스로 환경을 개척하면서 인간은 진화를 중단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 질병들은 이러한 환경과 우리 유전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아토피도, 시력저하도, 충치도 모두 그렇다.
암도 그런 질환이다. 암은 수명이 증가하면서 불가항력적으로 튀어나오는 병이다. 번식을 마친 이후에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건 광우병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늙은 소에서 광우병이 걸릴 확률이 높다. 여기까진 맞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암에도 소아암이 있듯이 광우병도 연령이 어린 소에서 나타날 확률이 있다. 프리온의 생화학적 상태가 유전적으로
불안정한 소가 태어날 확률이 항상 잔존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30개월 미만의 소에서도 광우병에 걸린 소가 나타날 수 있다. 근데
이걸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다고 묵살해버리면 안된다. 뒤지면 확실히 나온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나는 그런게 왜 없다고 믿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명 과학을 현재완료형으로 이해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아마도 그런 괴담을 근거로 사회적 공포가 조장되는 것이 싫은 것일게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철퇴로 냉소를 날려서 우리가 얻는게 도대체 뭘까? 이공계기피인가? 과학기술부의 해체인가?
아
제발. 좀 가슴으로 이야기해보자. 정말 과학적 데이터들로 세상을 구원하고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인가? 에라. 나는
못하겠다. 기불님은 기불님의 몫이 있을 것이니 그리 하시면 되겠다. 그래도 나는 정말이지 그건 못하겠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대화가 안되는 족속으로 매도하면서 과학에 무지하다고 매도하는 짓거리를, 시바 나는 못하겠다.
소통의 문제 또는 소통의 자세 문제가 명박산성 앞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라, 더 큰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군요.
예.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다면 매우 큰문제일테고, 못된다면 별문제가 아닌 그런 문제입니다.
늦게 읽었네요. 그래서 완전한지지도, 냉소도 못했답니다. 제 심정도 이랬어요.
늦게 읽었는데 좋은 글이네요. 근데 님이 쓴 글을 가지고 정신병자라고 비방하는 사람이 있네요.
http://www.kopsa.or.kr/gnu4/bbs/board.php?bo_table=DebateMethod&wr_id=58&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1
여기 나오는 이름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