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자율과 다양성‘(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두를)이라는 명목 하에 고교 등급제가 사실상 시행되고, 대입 자율화가 가속화되면서 다시 한번 고등학교는 대학입시를 위한 지옥으로 돌변하게 생겼다. 당장 고등학교에 0교시 수업이 부활했고, 우열반이 편성되고 있으며, 자율형 사립고에 선정되기 위해 낙오자들을 학교에서 쫓아내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라는 핀란드 교장 협의회 회장의 말에서 우리는 미국 따라잡기에 급급한 현 정부의 협소한 시야를 꿰뚫어 봐야 한다. 주경복 교수의 말처럼,
나는 핀란드의 교육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에 한 방 먹은 느낌이다. 당연한 말을 우리는 수 십년 동안 너무나 잊고 살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우리는 현실이라는 굴레 속에 잊고 산 것 같다. 핀란드의 교육 철학은 더 멋지다.
당연한 말인데 우리네 현실은 너도 나도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하면 그대로 따라온 교육정책이었다. 어렵게 전교조가 생겨 났고 이제 조금 나아지려 하니 다시 과거로 회귀한단다.
핀란드의 교육시스템이 하나의 롤모델은 될 지언정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답습할 수도 필요도 없다. 국가간 문화와 관습과 제도가 다른 이상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제도를 확립해 나가야만 한다. 그 어떤 교육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떠한 교육시스템에서도 인재는 뛰쳐나오게 되어 있다. 그건 개천에서 용이 나고, 서울에서 단 한번도 대통령이 나오지 못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전체적인 교육시스템의 향상이다. 그리고 평균화된 인재의 양산이 아닌 다양화된 인재의 양성이야 말로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다양성이야말로 창의적인 인재가 튀어 나올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괴짜가 버틸 수 없는 획일화된 현재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스템은 결코 단 한명의 천재도 아카데미라는 틀속에 안착시킬 수 없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 한번도 고등학교를 찾아 본적이 없다. 교련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했고, 3센티미터의 짧은 머리로 3년 내내 학교를 다녔던 나는 고등학교에서 철저하게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다. 옆반에선 선생님이 내려친 몽둥이에 다리에 피멍이 들어 결국은 다리를 절게 된 아이를 본 적도 있고, 결국 그 아이의 부모와 선생이 모종의 합의를 보았다는 후문도 들었다. 촌지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구타하고 벌세우는 행위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사회는 조금씩 대오각성을 시작했고, 이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다시는 돌아가서는 안될 후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듯 하다. 교육은 전사회 모든 체계로 퍼져나간다. 중등 교육에서 시작된 서열화가 결국 사회계층의 서열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결국 계급이 중학교 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하고 그것은 부동산으로 또 철저한 양극화로 이어진다.
이미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승리를 쟁취한 촛불의 의미를 단기적이고도 구체적인 행위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지난 60여일의 촛불을 패배주의로 물들이지 않는 지금으로선 유일한 승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가장 중시하는 교육은 읽기라고 한다. 어렸을때부터 습관화된 독서습관으로 인해 사고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길러진단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읽기교육이 좀더 강화되서 도서관도 늘어나고, 책의 질도 향상되고 출판계에도 좀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