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교양과학서적에 대해서는 일괄했는데, 국내 필진에 의해 쓰여진 과학책들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에세이집에 불과하고, 독창적 사상이나 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전제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첫째 이유고, 두번째 이유는 과학자들이 아닌 과학사,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책들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책들로 바로 넘어가기에 쓰레쉬홀드가 너무 크다면 그런 책들을 먼저 읽어도 좋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된다. 대부분의 책들이 외국사상의 수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과학사회학, 특히 STS에 치우친 책들이 많아 편협한 시각이 굳어질까 우려된다는 점도 함께.
지금부터 소개하는 책들은 어차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과학의 탄생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책들의 목록이다. 모든 것을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왜 이 책들이 과학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과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사회학적인 접근도, 지나친 과학주의적인 접근도 위험한지에 대한 설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코스모폴리스>, <논변의 사용> 스티븐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콜링우드의 수제자였던 툴민의 책들 중 세권이 번역되어 있다. 콜링우드로부터 역사적 관점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운 논리적 관점을 과학으로 확장시킨 그의 저작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길 기원한다. 이전글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여기서도 국내 번역자들의 편협함 혹은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난다(내가 번역도 하지 않는 주제에 죄송하기는 하다). 그래도 툴민의 초기저작이자 그가 의도하지도 않았던 ‘툴민 모델’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주었던 그의 박사학위 논문 <논변의 사용>이 최근에라도 번역되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물론 <코스모폴리스>도 정말 좋은 책이다.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한 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우주질서(cosmos)와 정치사회질서(polis)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파고 들어가는 그의 논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특히 데카르트에 이르러서는 절정인데 아마 이 책을 통해 데카르트의 새로운 면을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툴민은 토마스 쿤보다도 먼저 과학의 역사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출판한 인물이다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cience (1953)>. 그와 쿤 사이의 논쟁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들은 그가 굿필드와 함께 저술한 세개의 시리즈, 즉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의 발견사를 다룬 일련의 저작들이다. <
The Architecture of Matter (1962)>, <The Fabric of the Heavens: The Development of Astronomy and Dynamics (1963)>, <The Discovery of Time (1966)>. 관념론으로 빠진 콜링우드의 <자연의 이념>(이 책은 <자연이라는 이념>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역사의 이념>, <예술의 이념>이 지닌 약점을 보완하는 시리즈로 과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특히 <시간의 발견>은 유치하게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자연관에서 시간의 개념을 정리하는 책이 아니다. 툴민은 책을 그렇게 쓰지 않는다. 이 책은 시간의 발견사에서 시간과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을 과학의 발달과 연관지어 다루고 있다. 특히 쿤에 대항하며 그가 과학의 발전에 대해 제시했던 모델인 ‘진화 모델’이 다루어진다. 역사성을 가진 자연이라는 개념이 서양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지 않았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롭다.
아마도 국내학자들의 편식적인 성향상 생명윤리학자로도 유명한 그의 <결의론의 남용>이 먼저 번역되지 않을까 우려되는데, 툴민의 방점은 위의 세 시리즈에 찍혀야 한다. 과학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과학사, 역사학, 그리고는 윤리학까지 분야를 넓혀나간 이 학자의 저술들이 국내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날, 아마 나같은 조무라기는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사부 콜링우드가 그리스의 사유에서 이상향을 찾는 것에서 멈추어 버렸고 결국은 관념론의 늪에 빠졌듯이, 툴민도 르네상스적 인본주의의 틀에 갇혀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서양학자들은 모조리 하나의 이상향을 두고 나방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콜링우드의 책들이 번역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절판이다. 툴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콜링우드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물론 비트겐슈타인까지 갈 수 있다면 더 좋지만 나도 비트겐슈타인은 2차문헌으로밖에 소화해내지 못했다.
2. <방법에의 도전> 파이어아벤트
대학생들이 과제때문이던 수업때문이던 대학에서 과학사 혹은 과학철학을 배울 때 거의 끝까지 읽지 않게 되는 책이 이 책일 것이다. 그리고 잘못 읽었다가는 과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회의론에 빠질 우려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폭탄과 같은 책인데, 균형을 맞추고 싶다면 임레 라카토슈의 책과 함께 읽어도 좋다.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의 제자였는데, 포퍼학파의 주장이 너무도 맘에 안들어서 맨날 스승과 쌈박질을 하다가 결국은 유럽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백수로 살던 그에게 결국은 포퍼가 몰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미담이 있다. 논적이란 원수가 아니다. 과학사에서도 크릭과 페루츠의 관계가 이랬는데, 의견에 대한 논쟁이 감정으로 번지는 국내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일게다.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한 이 급진적인 과학철학자는 결국은 자신이 연구하기도 한 과학철학이라는 분야를 “과학철학 같은 잡종 분과(bastard subject)는 그 자체의 신뢰성을 위한 발견과 무관하다. 그것은 단지 과학의 부흥에서 이득을 얻었을 뿐이다”라고 평가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특히 그가 “무엇이든 괜찮다(Anything Goes)”라고 말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 이 책을 읽고 파이어아벤트의 다른 작품들인 <이성이여 안녕!>과 <킬링 타임>등을 읽고 나면 그가 과학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것일 뿐, 과학의 상대성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학을 논리경험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획일화하는 포퍼학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그러한 과격한 어법을 구사한 것 뿐이니까.
그는 원래 비트겐슈타인 밑에서 학위를 하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포퍼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툴민처럼 그도 결국 ‘과학의 소박한 역사성’을 인식했던 인물이다. 물론 툴민보다는 과격한 화법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의 속내를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은 과학의 소박한 역사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결국은 과학을 이해하는 길임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무정부주의를 두둔(?)하면 이전에 소개했던 책 <분자생물학>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분자생물학>의 19장은 암유전자 (oncogene)의 발견을 사례로 분자생물학의 한 패러다임이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암유전자의 발견과정은 도무지 정리가 안될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럽다. 도대체 깔끔하지가 않다. 이런 상황을 모랑쥬는 이렇게 표현했다.“과학연구는 대식세포나 식세포와 같이 무정부주의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즉 과학연구가 가능할 때는 그 위족을 확장시켜 움직이고, 장애물을 만나게 될 때는 다른 길을 찾아나간다. 이러한 카오스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지식은 식세포처럼결국은 항상 앞으로 나아간다.”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 19장 p330~331>
이 말이 파이어아벤트의 “무엇이든 괜찮다”와 왠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방법에의 도전>을 제대로 먹어치운 것이다. 아래 박은진 교수의 논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jk11.pdf
3. <희랍철학입문> 과학은 그리스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그리스 자연학자들의 사상을 알아야 하는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과학이 양화되어가는 시기에 과학의 많은 이론들이 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에 진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말은 오해가 없어야 한다. 즉, 플라톤이 현대물리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과학의 탄생을 18세기, 늦게는 19세기 초 정도로 본다. 그 전엔 과학이라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뉴턴을 들먹이면서 17세기의 과학혁명을 주장하는 국내의 과학자, 혹은 과학과 연관된 학문종사자들은 죄다 식민주의사관에 빠진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서구학자들의 자기중심적인, 특히 유럽중심주의적인 사관에 의해 과학의 기원이 그리스로까지 거슬러올라가 버렸지만, 사실 뉴턴의 시대까지도 제대로된 과학방법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과학을 구성하는 측정량과 이론의 동역학적 연관관계를 개괄해야 하는 것인데, 내 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대신한다. 결론은 제대로 된 측정의 역사가 나타나는 18세기까지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쪽짜리였다는 점이다.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승리에 도취된(이건 군터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읽어보면 참 도움이 많이 된다. 내 눈엔 이 책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보다 나은 거 같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우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시기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 아닐까? 뭐 프레시안에 강철구 교수가 ‘세계사 다시 읽기’라는 주제로 과학이야기를 이미 한 것 같던데, 또 지나치게 17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지는 반쪽짜리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무시해서도 안된다는 점만 지적하기로 한다.
이건 그리스 사유를 이해해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측정이 정밀해지기 시작하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과학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과학은 그렇게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이론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무슨 말이냐면 측정량이 믿을 만 하지 않았던 18세기 이전에는 이론이 측정량에 제한 받지 않고 하늘을 날아 다녔다는 뜻이다. 이론은 반드시 측정량의 제한 속에서 이루어져야 과학이다. 안그러면 창조과학도 과학이다. 그런데 이론이라는 것은 시대정신과 반드시 무관하지는 않다. 때로는 시대정신이 과학이론에 영향을 받고 과학이론이 시대정신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또 다른 층위의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화학, 생물학의 많은 이론들은 그리스 사유로부터 발전한 자연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생기론의 논쟁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18세기, 늦게는 19세기까지도 많은 생물학자들에게 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우위의 과학을 탈피하는 ‘세속화(종교적 관점에서의 세속화가 아니다. 측정량에 이론이 제한을 받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의 세속화다’가 일어나는 시점이 18세기쯤이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현대과학과 동일한 의미의 과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가 잠시 몸담았던 사이트 ‘과학과 철학‘에서 모두 얻을 수 있다. 이상하 박사의 과학철학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인간대가리가 별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점때문이다. 이론은 그닥 다양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들은 고대 그리스의 사유나 공자, 노자, 그리고 주자의 사유에서 별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사유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읽고 ‘측정량에 제한을 받는 이론’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세속화, 나아가 과학의 등장을 사유해보게 된다면 또 하나를 배운 것이다.
4. <기측체의>, <기학> 최한기
뜬금 없이 왠 혜강이냐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학이 전무했던 시절 유럽으로부터 수입된 책들을 접하며 스스로의 우주론을
꿈꾸었던 이 철학자의 책은 가치 있다. 게다가 다산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그의 산문체는 지금 우리가 읽어도 이해하기 쉬운 매우
평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 수입된 책들 속에서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닫고, 이를 기학이라는 틀로 포섭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과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미 헛된 시도였다 할지라도 당대의 상황속에서 최선의 시도였고 선구적인 일이었다.
실상 그의 책을 읽고 그 안에서 과학적 의미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부질 없다. 국내 몇몇 학자들이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것 같던데, 특히 기학으로 통합적 과학을 구성하겠다는 몇몇 학자들의 짓거리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비록 최한기가 과학적 사고를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과학을 실현할 도구가 없었고 따라서 그는 과학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정치사상가나 윤리학자에 가까웠던 전형적인 조선의 인문주의자였을 뿐이다.
그럼 이 책에서 도대체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뿌리깊은 조선의 인문주의와 그 한계를 읽어내면 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정말 박종홍의 말처럼 베이컨의 ‘경험주의’와 닮았던 아니던 간에, 비슷한 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했던 역사적 상이성이 초래한 결과를 읽어낼 수 있으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적어도 과학자들에겐.
5. <비판적 사고를 위한 논리> 박은진
한 때는 국내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자들의 논문을 죄다 읽어버렸던 때도 있지만(지금도 내 하드는 그런 pdf파일들로 몇기가가 꽉 차있다) 기실 진지하고 신중하게 과학에 접근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한명의 학자를 택하라면 나는 박은진 교수를 추천하겠다(물론 최고는 이상하 박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학계를 떠났다). 이 분도 최근에야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셨고, 인문학자들 나아가 기초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척박한 이 땅의 지식인들의 불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지만 그래도 유행과 타협하지 않으시고(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제대로 된 책과 논문을 쓰셨다고 본다. 관심 있는 분들은 그 분의 논문들을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물론 박은진 교수님도 과학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뭔가 편향적인 사고가 읽히지만 그래도 상당히 유동적인 관점을 지닌 학자다. 더 많은 책을 내셨으면 좋겠다.
이사를 가게 되는 바람에 책을 모조리 박스에 싸서 보내버린 터라 더 좋은 책들이 있는데 다 소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두 소개하기를 바라면서. 여하튼 약속 지켰다. 헉헉.
무려 서너시간에 걸쳐 쓴 이런 글에 추천이나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는다면 블로깅을 포기하련다 TT
과학과 수학에 젬병인 사이비 역사학도입니다. ^^
국내 번역서만 읽으면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에 엄청나게 찔려서 (ㅋㅋㅋ) 이런 포스팅을 기대했었습니다. 포스팅하신 책들은 머리 속에 담아두고 기회될 때마다 찔러 보려고요. 감사합니다. ^^
잘 읽고 갑니다. 언제 이 글을 추천하는…포스팅 하나 해야겠네요… 🙂
오오…두분 감사합니다. TT
여기 감사받을 사람 하나 추가요 -_-……
오오…역시 진심은 승리하는건가요? TT
여기 감사받을 사람 하나 더 추가합니다 ^^
글 읽다 보니 제가 얼마나 깊이 없이 과학을 대하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ㅠㅠ 추천하신 책들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과학철학…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너무 방대해 겁내하던 분야입니다. 추천해주신 책 중에서 관심가는 분야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는 읽어본 책이 몇 권 안 되네요. -.-;; 아내가 요새 읽고 있는 책들이 좀 있어서 반갑고… 언제 이런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열정이 생길런지…
과학철학을 곧 전공으로 배우게 될 사람인데 공부할 게 이렇게 많은거군요. ㅠ
쿤, 포퍼, 많이 읽어도 라카토슈 정도 밖에 못 읽었는데 열심히 공부해야겠습니다.
비공개로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