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몇 년 전만해도 생물철학잡지며 여하튼 이루 말하기 힘든 곳을 떠돌며 몇 시간이고 여행을 즐기곤 했는데, 그렇게 모은 읽지도 못한 pdf 파일이 몇 기가다. 지금 생각하면 한 편으론 유용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무의미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 바닥이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유용하기는 했는데, 역시나 철학적인 논의들은 현실에 민감하지가 못하다. 가끔은 읽다가 논문을 던져버릴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가끔 과학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논의를 펼치는 과학철학자들이 있다. 과학사학자들 중에는 그런 인물들을 이미 몇 번 소개한 적 있는데, 이 블로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찾으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블로그 체류 시간 증가와 홍보를 위한 숨은그림찾기다. 하하.
리쳐드 뷰리안(Richard Burian)이 그런 학자들 중 하나다. 원래 나는 그가 진 게이욘(Jean Gayon)과 함께 쓴 글 <The French school of genetics: From physiological and population genetics to regulatory molecular genetics>를 읽으면서 ‘오호’하기 시작했는데, 이 학자는 정말 이것저것을 다 건드린다. 원래 생물철학자들의 대다수가 진화론만이 생물학이라는 착각을 하기 일쑨데 뷰리안은 진화론, 발생학, 유전학, 분자생물학 그 어느것도 빼놓지 않고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보기 드문 학자다. 최근에는 발생학과 진화론의 소위 융합학문(?)이라는 이보디보(Evo-Devo)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사실 이보디보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참고. 뷰리안의 논문들 중 ‘모델동물’과 과학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것들은 압권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으시길!
진 게이욘은 이미 뷰리안과 함께 소개가 되어 버렸는데, 프랑스 사람이라 영어로 된 논문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쉬운 학자다. 특히 분자생물학의 역사를 공부할 때 저 유명한 자꼽과 모나드를 빼 놓을수가 없는데, 게이욘이 이 분야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다. 그런데 그런 글이 대부분 불어로 쓰여 있다는 언어적 장벽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미 그 시작부터가 ‘근대종합’의 헛점을 지적하면서 예사롭지 않게 등장했는데, 역시 프랑스학자 답다. 과학철학과 생물철학 분야는 워낙 미국의 입김이 세서, 주류 미국학자들의 견해와 맞지 않으면 좀 왕따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여하튼 게이욘도 멋진 학자다.
웃기는 건 생물철학에서 내 맘에 드는 몇몇 학자들이 호주와 뉴질랜드에 모여 산다는 것이다. 원제는 <도킨스 대 굴드>인데 장대익 교수에 의해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로 번역된 책 덕분에 나름 알려진
킴 스티렐니(Kim Sterelny)가 뉴질랜드에 산다. 이 사람 관상 좀 봐라. 포스가 지대로다. 다루는 주제는 약간 인지과학적이고 메타진화론적 이야기들인데 번역된 책은 참으로 잘 된 요약이다. 물론 그닥 중요한 논쟁은 아니지만.스티렐니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학자는 호주 시드니 대학의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다. 일단 이 학자, 생산적이다. 엄청난 다작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진화심리학부터 인지심리학, 뭐 안다룬게 하나 없는데, 내가 이사람들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유전자’를 다루면서 분자생물학 분야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름의 통찰력은 인정하지만 잘못하면 확 뒤집으려고 벼르는 중이다. 물론 아직 그럴 실력은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겁도 없이 꺼내는 이유는, 정말 글쓰기 싫어하는 분자생물학자들의 군집에서 분연히 일어나 홀로 외로이 과학사에 대한 글을 쓰고 계시는 미쉘 모랑쥬(Michel Morange)님 때문이다. 아하하. 내가 무려 님이라는 표현을 쓴다. 무려 이분도 프랑스 분이라 영어로 된 논문이 많지는 않지만, 국내에 이미 책이 번역되기도 했을 뿐더러 과학자로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이 가는 것이다. 그는 과학자들이 지나치게 철학자들을 무시하는 사상을 내놓는 행태와, 철학자들이 지나치게 과학자들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있음을 모두 경계하며 야릇한 줄타기를 한다. 아하하. 나처럼 말재주 없는 사람이 무슨 더 이상의 말을 하리요. 모랑쥬’님’의 멋진 말로 마무리한다.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의 저자서문의 일부다.
과학사는 과학사가들이 연구하고 있는 과학의 환경에서 한 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학문분야에 비해 더욱 더 유행의 영향을 받는다. 생물학 실험실에서 매일 행해져 왔고, 또한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친숙하지 않은 과학사가들은 흔히 과학에서 더욱 화려하게 전파를 탈 수 있는 요소를 선택한다.
과학 연구에 접근하기 위해 학술지를 읽거나 사용된 기술의 한계와 유용성들을 이해하는 정상적인 길을 거부하고, 이들은 ‘스타들’과의 인터뷰를 선호하며 그들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러한 경향은 -장황한 방법론적 설명으로 합리화되어- 원래 추구해야 할 목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흔하며, 과학적 작업에 대한 지적/엘리트주의적 견해를 강화시킨다.
(중략)
그들은 과학과 실험상의 제한이라는 속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한 과학자는 그가 원하는 모든 모델과 이론을 동원하여 실험에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실험실에 잠시라도 머물러 보면 생물학적 재료로 실험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적어도 이전에 실패한 실험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알 것이다. 과학적 인식은 ‘구성’된 것이며, 과학자들은 그 접근 방식을 정하고 모델을 발전시키는 면에서는 자유롭다. 단, 사용된 실험 방식이 허용하는 매우 좁은 한계 내에서 그러하다.
그래 아오시마의 말처럼 ‘사건은 회의실이 아닌 현장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