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을 준비할 무렵에 최재천 교수가 모교에서 생태학 강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나는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모른다. 입대할 때 내가 들고 갔던 짐에는 콘라드 로렌츠와 니코 틴버겐의 원서가 들어 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동물행동학에 대한 나의 열정과 광기를 부르짖고 다녔고, 생물학이란 내게 결국 동물행동학에 불과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생물학자란 필드에 나가 열광적인 관찰을 하는 그런 와일드하고 다큐멘터리에나 나오는 존재라 생각하는 철부지였고 그것이 내게 존재하는 생물학 이미지의 전부였다. 니코 틴버겐과 콘라드 로렌츠의 계보를 잇는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은 따라서 내게 엄청난 희열이었다. 나는 틴버겐과 로렌츠의 이름과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로부터 최재천 교수의 강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생태학을 공부하겠다고 나보다 먼저 최재천 교수와 면식을 터버린 한 후배의 손에 이끌려 그분을 찾은 것이 쪽팔렸다. 나에게 최재천 교수라는 존재는 철학 전공자들이 직접 칸트를 대면하게 되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살아 있는 지젝과 대면하는 것처럼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반드시 그의 실험실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그를 찾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편견일 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열정이 충분히 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여러가지 현실적인 제약과 그의 잘못과 나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그 실험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복수심이었을까. 생물학 중에서도 가장 거시적인 학문이라는 행동학을 하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가장 작은 미시세계를 공부하겠다는 반기를 나는 들어버렸다. 나는 결국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해 포항으로 떠났다. 그것은 일종의 유치한 복수였고 의도하지 않은 후퇴였다.
그렇게 후퇴한 그곳에서 나는 소외 받은 생물학의 어떤 전통을 목도하게 되었다. 언제나 섹시하고 인문학적으로 수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진화론과는 달리, 투박하고 딱딱해서 그 학문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와 철학적 함의가 메타생물학적인 논의에서항상 소외되어 있던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의 전통 속에 어쨌든 나는 놓여 있었고, 그 역사를 읽으면서 이 투박한 학문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갔다. 나에게 있어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의 전통은 소외된 민중이었고, 진화학의 전통은 배부른 부르주아지였다.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나는,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하며, 도킨스의 이름조차 모르고, 책이라고는 전혀 읽지 않는 이 건조한 과학자들의 집단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입만 살아 있는 진화론자들의 소설도 내겐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들보다 훌륭한 실험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그 전통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분자생물학의 전통이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나 혼자 해나가야만 했다. 무미건조한 과학자 집단에게 진화론이라는 생물학의 가장 거시적인 분야를 소개하는 것도 내겐 벅찬 일이었고, 항상 소설만 쓰고 있는 진화론자들에게 분자생물학의 충실한 실험적 전통을 소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우습지도 않은 중립지대에 서게 되었고, 따라서 결국은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았던 것은, 국내에도 국외에도 나와 비슷한 사고를 지닌 극소수의 인물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적으로 선동에만 앞장서는 이들로부터 실험과학의 소중한 전통을 보호하려는 이들의 철학적 정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 순간부터 나는
외롭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포기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입만 나불대는 진화론의 한 떨거지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또는 손기술만 가진 진부한 분자생물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나는 몇몇 구원투수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학에 대한 복수로 시작된 나의 반항을 잠재우며 새로운 길을 건설해 나갔다.
진화심리학의 건너편엔 행동유전학이 존재한다. 언젠가 매트 리들리는 모든 형질을 일반화 해나가는 진화심리학의 방향과, 모든 형질을 개별화 혹은 특수화해나가며 유전적 개별성을 찾아나가는 행동유전학의 방향이 언젠가는 충돌할 것이라 예측한 적이 있다. 도킨스의 적통이자 전형적인 과학저술가인 인물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적어도 진화심리학과 행동유전학의 사이에 놓인 장벽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리들리는 옳았다. 두 학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이론 중심적이면서 분석적 도구로 수학적 기법을 선호하는(아니 조작적 실험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진화심리학과, 실험 중심적이면서 분석적 도구로 실험을 선호하는 행동 유전학의 방법론적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도구의 차이는 철학의 차이를 야기한다. 개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무시하고 언제나 인류에 공통되는 일반적 형질에 몰두하는 진화심리학은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결국은 개개인의 형질 차이를 드러내는 행동유전학과 그 지향점이 다르다. 진화심리학은 다양성을 일반화하고자 하고, 행동유전학은 일반성을 다양화하고자 한다. 진화심리학은 차이를 무시하게 되고, 행동유전학은 차이를 부각하게 된다. 두 학문의 차이는 그저 말로만으론 설명하기는 힘든 큰 철학적 간극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둘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행동에 관한 나의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의 전통 속에서 행동유전학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시모어 벤저는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던 파지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물리학자 출신의 막스 델브릭에게서 수학한 박테리아 유전학자였다. 그가 행동학의 전통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알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행동유전학의 전통이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쳐드 도킨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시모어 벤저는 도킨스와 윌슨이 그들의 출세작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미 행동유전학의 연구에 착수했다.
벤저의 박테리오 파지 연구는 그 자체로 교과서에 기록된 기념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유전자가 반드시 행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매우 단순한 가설로 한번도 연구해 본적이 없는 초파리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조나단 와이너의 책 <초파리의 기억>의 추천사는 최재천 교수가 썼다. 진화학과 분자생물학의 긴장관계와 그 철학적 함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 책의 추천사를 국내에서 누군가 써야만 한다면, 그것은 올해초 오스트리아의 배리 딕슨 실험실에서 초파리의 성펩타이드에 관한 연구로 네이쳐에 논문을 발표한 김용준 박사이거나 올해 벤저가 죽기전에 그곳에서 포스트닥을 했던 조재형 박사일 것이다. 벤저가 추구했던 실험적 전통과 에드워드 윌슨이 추구했던 관찰의 전통은 전혀 다른 생물학의 분과다. 결국 벤저가 승리했다. 생물학의 모든 길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단단한 생물학의 반석인 분자적 수준에서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생물학의 느슨하고 추상적인 유전자의 개념은 벤저가 창안한 구체적이고 조작 가능한 유전자로 대체되었다.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시장에서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세력들 사이에 우습지도 않은 뭉뚱거림과 화해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해프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추천사를 내가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벤저의 자서전을 제대로 평가할 만한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이것도 숙명인지 나는 델브릭의 제자이자, 벤저의 제자인 유넝 잔의 실험실에 와있다. 매우 행복하고 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믿기지 않게도 나는 이곳에서 행동유전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나는 초파리의 행동을 정량화하며, 그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찾는다. 그리고 그 유전자의 기능을 설명하고 유전자로부터 행동으로 나아간다. 길고 긴 길을 돌아 나의 꿈은 결국 현실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곳에서 벤저를 찬양하고 행동유전학을 전공하는 그들에게 ‘너희는 정말 행복한거야’라고 말할 때 그들은 의아해 한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행동유전학은 또다른 일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것은 논문을 내기 위한 도구가 될지도 모르고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며, 그저 평범한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지금 내게는 어린 시절 북한산 언저리를 뛰놀며 꿈꾸었던 생물학자의 꿈이 일상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나의 일상은 그들의 일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기나긴 25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누구도 지도해주지 않았던 그 힘든 중간자의 고난을 겪으며 찾아낸 나의 보금자리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일상은 남들보다 더욱 가치있고 소중한 무엇이다.
즐거움이 좋아함을 이기는 법이고, 좋아함이 앎을 이기는 법이라 했다. 내가 지금 이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렵게 도착한 이 나의 일상은 적어도 숙명론에 권태되지 않음으로서 찾아진 어떤 즐거움의 끝임에는 분명하다. 언제나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것이다. 나는 이곳의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이러한 희열을 말로 잘 설명할 수 없었고, 또 나에게조차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숙명론에 저항하며 얻은 이 길이 또 다른 숙명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추신: 도대체 어찌도 이리 많은 진화심리학 글들만이 넘쳐난다는 말인가. 게다가 진화심리학이 근인을 분석하는 툴이라니?
즐거움이 묻어나는 글이군요 보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아… 행동유전학, 그길로 가는구나. 건투를 빈다 친구.
그 쪽 세계야 완전깜깜이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
흠..과연.
여자친구가 s대 응용생물화학부고, 그녀가 대학을 다니기 전 부터 생물학에 심취했던 터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E.윌슨이라..사회학도로서는 꽤 난감한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on human nature였던가요? 그 책은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모독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 이론이 말하려고 하는 바와는 전혀 별개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라도 윌슨 류의 ‘결정론’을 의식하게 하는 논법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론이었지요. 세미나 수업에서도 무진 ‘까였’답니다.(웃음)
이런 생각을 의식했는지, 제 여자친구는 은근히 저의 편협함을 질타하곤 했지요. 그러면서 최근 생물학계에 널리 퍼져있다는 미시적 연구에 대한 비판의 화살도 날렸습니다. 그런데 김우재님의 글을 읽다보니 지금껏 간접적으로 들었던 바와 달리 오히려 거시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진화론이 훨씬 주류, 내지는 부르주아지라는 인상이라니 다소 이해가 안갑니다. 뭐랄까, 오히려 분자생물학이 더 부르주아같은 느낌인데요.(….)
아무리 윌슨을 비판해봤자, 사회학을 하는 사람들 눈엔 ‘미시’란 아무래도 독립된 진실의 합집합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ps;최근 슬럼프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우연인지, 서두에서 밝혀주셨네요. 저는 한없이 진보적이고 싶은데도, 마음 속에 베버리안이 너무나 굳건하게 자리잡았어요. 어느정도 이겨내나 싶었는데, 물대포 몇 방 맞고 비온 뒤 땅 굳듯이요. 그냥 저냥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군대는 이럴 때 가야 하는가봅니다.(웃음)
듣보잡은 안건드리시나 했는데 올 것이 왔군요 ㄷㄷ 시간 나시면 제대로 된 비평 부탁드립니다. (듣고나면 쪽팔리겠지만 그래도 공부가 될테니 ㅎㅎ)
혹 시간이 나시면 예전 글에서 잠깐 언급하신 밈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교수에 대한 애증의 궤적이기도 하지만, 글쓴이의 학문적 궤적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게 행복하시다니 스쳐가는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네요.
“언제나 진보에게 공간은 변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라는 문구가 울림이 있네요.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
이과,공과 쪽은 아예 까막눈입니다만, 대립항이 뚜렷한 학문들 사이에서 고민하신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사학과 국문학과 사회학과 경제학을 이리저리 들어대다보니 그 사이에서 제 스스로의 푯대를 어떻게 세워두어야 할지 저도 고민이 됐었거든요. 사학과 국문학, 사학과 경제학, 사학과 사회학의 긴장과 그로부터 뿜어나오는 자장이 저를 뒤흔들 때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기 일쑤였구요. 또 요즘 인문학 진영에서 한창 얘기중인 ‘학제간 연구’란 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각 분과 학문에 빠삭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려해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었고, 스스로의 역량에 많이 실망하고 있던 요즘입니다.
그래도 역시 어렵지만 해볼만 한 몸고생 머리고생이란 생각을 우재님 포스팅을 보고 굳히게 됐습니다. 감사하네요. ^^* 연구에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Dear Dr.Kim. I admire your enthusiasm. This posting made me want to know more about behavioral genetics as well as evolutionary psychology. One thing concerns me is that you probably might have made a little of sweeping generalization about the two equally important fields of study and not have done justice to the latter by downplaying scientific contributions of it, by which I don’t mean some of the well-known books aimed at public reading, as writing a novel. Odds are there may well be as many good researchers in evolutionary psychology as in behavioral genetics. If you don’t think one approach here is intrinsically superior to the other, I believe the evaluation should be laid on each individual not on the field of study itself. I just wanted to hear more from you about this point.
Let me know who you are. You must be absolutely Korean. Write down in Korean then. I don’t want to use English except when I need it. I understand your point and definitely know the danger of generalization. So let me know your opinion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EP and BG. Anyway good to see you.
PS: Are you my neighbor? You live in SF?
Please allow me to remain as a neighbor somewhere in the U.S. not because there is any reason to hide it, but because I am just anybody who enjoy your posts and the anonymity of the medium of internet. Speaking of the language, the computer does not permit typing of Korean letters. You can legimately ignore my question if these bother you in a way or another. I don’t want to force you to write in English or to waste your precious time for this passing-by visitor. Answering in Korean might be a good choice for you.
I don’t know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these two approaches. What I wanted to bring up is there seems more to evolutionary psychology than being just an unfounded fiction. Except the fact that they start from a hypothesis derived from evolutionary theory,which,I think, totally makes sense and even desirable, the way they support their arguments based on empirical data is exactly the same as any other field in science. That is why their researches are published not only in journals which strongly adopt evolutionary psychological perspecive such as “evolutionary psychology” or “evolution and human behavior” but also in journals lik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Neuron” along with other research in Biology,
“Managerial and Decision Economics”,”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with other research in Economics and Management, and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Social Cognition”, “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along with other research in psychology, just to name a few. Additionally, in the case of the last journal I mentioned above clearly shows that being an evolutionary psychologist does not necessarily mean to ignore individual differences. Some might go beyond the proper range of interpretation of the result but not all do that and this problem is in no way peculiar to evolutionary psychology.
To me, what sets evolutionary psychologiests apart from traditional scientists is that they just try not to propose theories go against the theory of evolution, which many scientists just don’t or refuse to do. I have no opinion to put forth about behavioral genetics or its comparison with evolutionary psychology because as I said I am ignorant about it.
<뉴런>에 실린 논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알고 계시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외에 언급하신 저널들은 원래 EP계열의 독무대였으니까요. 투비와 코스미데스의 홈페이지에는 없던데 어디에 있는지요? 참고로 EP계열으 논문을 모아둔 사이트가 있다면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The article I thought of when I mentioned “Neuron” was
Rilling, J. K., Gutman D. A., Zeh T. R. et al (2002). A Neural Basis for Social Cooperation. Neuron. 35:395-405.
You may well not count this as a typical example of EP study.
예. 예상하신대로 EP계열에서 나온 논문이 아닙니다. 교신저자는 약대를 나온 약학박사고 PET과 fMRI전공인 사람입니다. 언제나 양화가능한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한 분과에서 이론위주의 분과를 잡아먹게 되어 있습니다. 제 블로그 이곳저곳에는 그런 역사가 쓰여 있습니다. 우선 그런 글들을 읽고 진화심리학과 행동유전학에 대한 제 비교를 살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구 홈페이지 때부터 들렀고 이 블로그 생긴 이후론 더 자주 들르고 있지만 댓글은 아주 가끔씩 익명으로 남기곤 했던 사람입니다. 아마 모두 합치면 서너 개 정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커밍아웃하려고요. ^^ 김선생님 글들은 늘 언제나 제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많이 배우고 또 많이 참고하고 있지요. ‘전공 바보’, 즉 글자 그대로 전공 학문에는 눈과 귀가 어둡고 반대로 다른 분야 기웃거리는 걸 더 좋아하는 바보인 저로서는 선생님의 전공 학문에 대한 치열성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글쎄… 선생님과는 반대로 분자생물학 분야에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가 차차 진화생물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저로선 오히려 분자생물학이 (적어도 한국에선) 배부른 부르주아이고 진화생물학이 소외된 민중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사실 대학 강단에서는 진화학이 소외된 학문이지 않습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학부생이던 1980년대 후반만 해도 분자생물학이나 미생물학 관련 학과의 커리에서 진화학 강의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거든요. 생물학과에서조차 전공자는 극소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무튼 ‘진화’는 현대 생물학의 형이상학이나 다름 없으므로 행동유전학이든 진화심리학이든 현재로선 진화의 조명 하에서 비로소 가치의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겠지요. 진화 자체를 부정하는 창조과학자들이야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면 그만일 것이고요.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스스로 게토화한 사람들은 진화학자들이 아니라 창조과학자들일 텐데 정작 그들 자신은 자기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주변인의 관찰자로서의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어디 창조과학뿐이겠습니까? 모든 학문 영역이 다 그렇지요. 김선생님도 그러한 주변인으로서의 기질(?)이 다분하신 듯해서 저로선 많은 동질감 또는 친숙함을 알게 모르게 느끼게 되네요. 커밍아웃했다고 제가 별의별 얘길 다 늘어놓으려 하는군요. 움… 제가 좀 소심한 편이라 이 정도에서 제 얘기는 줄일까 합니다. ^^
“진화심리학이 근인을 분석하는 툴이라니?”에 링크하신 글로 가봤는데 ‘근인'(近因, immediate cause)이 아니라 ‘근본원인'(根本原因, root-cause)이군요. 제가 알기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인데, 혹시 김우재 님은 ‘근인’을 根因으로 사용하시나요?
반갑습니다. 부르주아지라고 부를때 좀 복잡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글을 꼭 쓰도록 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주 피드백 남겨주세요.
근접인과 궁극인을 헷갈린 건 아닙니다. 링크된 글의 필자는 proximate와 ultimate에 대한 우리말 약어를 잘못 사용한 것도 있지만, (proximate는 근접인 혹은 근인, ultimate는 궁극인) 문제는 어떤 학문이 궁극인을 밝히는 툴, 즉 도구가 될수는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의 도구는 다윈으로부터 비롯된 자연선택 이론 혹은 근대종합이론이고 그런걸 툴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이나 어떤 학문이라도 결국 생물학의 궁극인을 밝히는 도구로 모두 같은 이론, 즉 다윈이래로 합의된 이론을 사용하는 겁니다. 진화심리학 자체가 도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궁극인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잠정적 가설로서 설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분석하는 것이 어떤 원인이 될수는 없습니다. 원인은 가정하는 것이고 현상이 분석하는 겁니다. 필자가 분석을 ‘알아낸다’라고 썼다면 별 문제는 없습니다. 특히 궁극인은 조작적 혹은 실험적인 검증이 불가능한데 이걸 검증하는 도구라면 모를까 궁극인을 분석하는 도구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우재님 글을 보다보면 과학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학자를 명료하게 분리하지 않는듯 보입니다. 아마도 글이 향하는 방향을 보자면..과학과 과학자간의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것 같네요.
현실적 측면에서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논점을 올바로 짚기 위해서는 학자와 그들이 생산해내는 지식은 분리해서 봐야 하지 않나요? 저쪽의 도킨스와 관련된 글도 그렇지만 이 글도 어떤 분야의 학풍과 개인적 정치색을 과학과 결부시키고 계신듯 합니다.
이 때문에 가끔 저는 우재님이 과학사회학자인지 과학자인지 헷갈립니다. 모든 과학자가 과학사회학과 과학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저도 그것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마다 모든 일에 매기는 우선순위가 달라지는것이 맞습니다. 과학자가 “과학자 사회”에 대해 어떠한 논리를 펼치는것은 두번째 우선순위를 갖습니다. 과학자에게 우선되어야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과학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는것이겠지요.
그렇다고 과학과 과학사회학같은 분과학문에 세워진 어떤 장벽을 더 높이자는것도 아니고 그 둘이 엄격히 분리된다는것도 아닙니다. 다만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될텐데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과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다르고 각자 관심을 갖는 측면이 다르기 때문일겁니다.
댓글논쟁을 싫어하시는걸 알기에 여기서 별로 논쟁적인 글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게시된 (정치와 사회학과 과학을 짬뽕시킨) 여러 글들은 우재님이 최교수님에게 실망한것과 비슷한 실망감을 후배들이 우재님을 보면서 동일하게 느끼게 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를 보고 과학사회학자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할말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증오하는 분들이 김X석, 김X광, 송X용 등의 과학사회학자들의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분리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 제가 꾸준히 펼쳐온 논의입니다. 이해를 그리 하셨다면 제 부족입니다.
게다가 전 언제나 과학자가 과학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첫번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럴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자네 아내 때리는 것 그만두었나?” 아내를 때려본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과학사회학의 몇몇 입장에 반대를 한다는것과 과학사회학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것 사이의 갭은 큽니다. 그쪽 분야의 몇몇 입장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것과 무관하게 우재님은 우재님 나름의 과학사회학을 이미 수행하고 계신걸로 보입니다. 특히나 저쪽 착한왕님과 공동으로 과학자, 과학자사회, 과학에 대한 여러 갈래의 담론들을 생산해내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죠.
비록 사회적으로 정해진 패턴으로 아내를 때리는경우가 많더라도 내가 아내를 때리는 그와 다른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나는 아내를 때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제3자가 볼때는 그렇게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죠.
아무튼 쓰신 내용 잘 알겠습니다.
뭐든 가능하죠 ㅡ.ㅡ
근데 좀 자신의 정체들을 제게 알려들 주시면 안되는 겁니까? 어째 곁눈질 당하는 느낌이 들어 뭐가 찜찜합니다. 제 관심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어보이는 분들은 죄다 익명속에 묻히시려고만 하는군요. 전 정정당당한 걸 좋아라하고, 최대한 열려 있으려고 하며, 부족하다면 배울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제발 부탁이지만, 댓글로 정제된 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휴… 라이프니츠라….성향이 짐작 갑니다.
ㅎㅎ 저는 그냥 눈팅하는 사람이고..우재님과는 개인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과거에 이것저것 개인적으로 공부를 했었죠. 어차피 그래봐야 아마추어입니다. 실제 직업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 이상의 제 신상정보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습니다. ^^;;;
아마츄어와 프로의 차이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서 공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실험실이 필요한 과학이 아니라면 적어도 인문학은 집안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장이 문제인데 이건 의지만 있다면 경험이 가능합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눈팅으로 남지 마시고, 끊임없이 묻고 답변하고 읽고 쓰시라는 겁니다.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주 오세요.
점쟁이가 되어 보련다. 최재천 교수는 엊그제 동해안에서 관찰된 돌고래의 장례식에 대한 글을 반드시 쓸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은 돌고래도 장례문화를 치르는데 도대체 우리인간은 뭐냐는 식이 될 것이다. 아니면 돌고래로부터 무슨 교훈을 배우자는 식이 될 것이다. 한번 두고보자. 내가 점쟁이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음… 링크된 글의 필자는 ‘툴’이 아니라 ‘틀’이라고 적은 것 같은데요. (‘툴’이라는 글자는 글에서 발견되지 않는군요.) 글자의 차이는 사소하지만 뜻이 많이 달라지지 않나 싶습니다. ^^;
‘분석’이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용되지 않은 어휘일 수도 있겠지만, “고객 이탈 원인 분석”, “청소년 범죄의 원인 분석” 등 ‘원인을 분석’한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입니다(“원인 분석”에 대한 구글 검색 결과 26만 개 이상). 이 정도면 원인 분석이라는 말을 “현상을 분석하여 원인을 밝혀낸다” 정도의 관용어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영어의 ‘근본 원인 분석’ 또한 많이 쓰이는 말이고요. (http://www.google.co.kr/search?q=root+cause+analysis , http://en.wikipedia.org/wiki/Root_cause_analysis)
최재천 교수에 대한 추천사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네요.
어떤 한 사람을 EP나 BG에 위치시키고,
그 사람은 반드시 상대 진영을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과연 적절한가요?
저만 생각해도 EP가 조작적 실험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어떤 가설을 제시하고, 어떤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BG의 연구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는 거니까요.
EP는 어떤 행동이 생존상 유리했으니까,
생존해 있는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하던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뿐이지,
그런 행동을 안 해도, 다른 행동으로 보상받았을 수도 있고,
그런 행동이 유전된다는 것도 확실치 않고,
뭐.. 비판이야 한다면 끝이 없겠죠.
하지만, 촘스키의 언어 연구에서 조작적 실험은 불가능하지 않았나요?
Lakoff의 연구도 그렇고…
그렇다고 쓰잘데기 없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소견입니다.
Psychology와 Evolutionary를 묶어봤는 것 자체가 기발한 발상이잖아요.
아무리 내용이 허잡하더라도. ㅋ
헉. 툴이 아니라 틀이었군요. 그렇다면 제 실수였습니다. 헐… 근인이라는 용어는 고치셨더군요. 틀이라면 링크된 글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틀이건 툴이건 문제될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트랙백 걸었으니 검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가로, “근인”이라는 용어를 썼다가 중간에 고치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 용어 자체를 여기에서 처음 보고든요. 하나 더 추가로, “궁극원인”, “근접 원인” 같은 용어는 제가 임의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생물학이다”의 번역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트랙백된 글이 없습니다. 다시 걸어주시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인이라는 단어를 제가 분명히 보고 사용한 것 같은데 그런 적 없으시다면 제 실수인 듯 합니다. 앞으로는 궁극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피차 좋을 듯 합니다. 여하튼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강규영씨! ^^
에고, 글 발행도 안하고 trackback을 날렸었군요 ㅋ
ㅍ
제가 노스모크에서 한창 진화생물학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최재천 선생님 이름도 눈에 익게되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팬이 되었었어요. 대학 입학한 뒤엔 다른 학교로 옮기신 선생님께, 따라왔더니 왜 옮겨갔냐고 투정부리는 이메일도 보내보고… 그분이 번역했거나 서문이라도 쓴 (노스모크에 추천된) 생물학 책들도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그러다가
2학년 무렵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던가 그 책을 우연히 싸게 구해서 다섯 페이지 읽고는 확 짜식었습니다ㅋ; 도대체 우리 인간은 뭐냐, 무슨 교훈을 배우자. 딱 그 말씀대로였던 책이었어요.
댓글을 읽으니 그때 그 엄청난 실망감이 갑자기 기억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