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라는 곳을 출처로 하고 있다. 라깡의 ‘깡’자도 모르기에 한번 보려고…
라깡(Jaques Lacan, 1901-1981)의 사상
라깡과 관련 있는 단어는 “프로이트로 되돌아가자(Retour à
Freud)”인데, 이 의미는 무의식을 생물학으로 설명하려는(biologiser) 경향을 띠고, 또한 리비도(libido)를
해방에 만족하는 실재적 에너지로 간주하는(라이히; Wilhelm Reich의 견해) 경향의 미국 정신분석학에 반대하는 것이다.
라깡은 정신분석의 치료는 빠롤(parole)에 의한 수단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다. 라깡은 상상, 실재, 상징이란 세 개념을 맴돌면서 언어의 분석과 더불어 접속시켰다.
상상, 실재, 상징(l’imaginaire, le réel, le symbole)
이미 “거울의 단계(1936)”에서 라깡이 제시한 것으로, 자신의 허상(거울에 비친
상)에 대해 매우 어린 꼬마가 기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완성된 이마쥬(image)와 동일시한다는 사실에서 그러나 아직은
부족한(manquant) 생리적 성숙과 연관하여 보면 변경된 이마쥬와 동일시한다는 사실에서 결과되었다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자아는 어떤 결핍(un manque 또는 갈망)이라는 토대 위에 허상(image: 이마쥬)과 속임수(leurre: 또는 환상)의 이중 의미로 구성된다. 자아에게 상징은
결핍(manque, 욕구)의 자리에 오는 그 무엇이다 [들뢰즈의 견해로 보면, 빈 상자에 자리를 차지하러 오는 그 무엇. 즉
과거와 미래가 결합한 인간의 욕망의 환상(phantasme)이다. 이 환상은 현재하는 현실적 자아의 생성물이다. 이 생성물에
대해 선악이나 진위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다. 그 생성물의 덩어리는 광기나 괴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알라딘의 마술 램프 속에서
나온 마왕처럼 주인 충실하려는 거대한 힘이다.] 상징에 접근한다는 것, 그것은 동시에 결핍 즉 거세(castration)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 실재는 완전히 상징화하기를 저항하며, 범위의 밖에
남아있으려 하는 “존재하기 부족한 것(le manque-à-être)”이다. [거시기(Id)가 표출되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상태는 살아있는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결핍(manque)이 욕망(désir)을 구성한다.
“자기의 욕망에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라깡이 “작은 아(petit a)”라고 부르는 그의 대상이 결핍되어
있다는(manquant, 갈망하고 있다는)것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 필요, 욕망(Besoin, demande, désir)
그러므로 소위 말하는 “욕구불만(frustration)”으로부터 욕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가능한 해방을 믿는 것은 욕망과 욕구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욕구의 존재이라는
것을 부정함이 없이,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서 욕구(besoin)가 타자에게 어떤 필요에서 정식화되었던 유일한 사실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층에서 사랑의 필요라는 필요(demande, 요구)의 측면에서, 타자에게 상징적 권능, 즉 결핍적 대상을 소유하는 권능을 부여한다. 그런데, 타자는 또한 이 결핍자(le manquant, 갈망자)에 예속된다. 이 결핍자를 이해(포함)한다는 것은 필요에서 욕망으
로, 상상에서 상징으로 지나간다. 프로이트가 말한 “거시기(ça)가 있었던 그곳에 주체가 발생함(advenir)이 틀림이
없다.(Wo Es war, soll Ich werden)”이란 정식에서, 타자를 통하여 주체가 출현(avènement)한다는
것은 결핍(갈망)속에서, 욕구를 넘어서, 그리고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한 인간에로 접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