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이야기한다. 모든 인문학자가 실험실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다. 탄소나노튜브에 대해 말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를 만들어 볼 필요는 없다.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가능할 텐데, 그냥 쉽게 말하자. 이건 CM씨의 말처럼 ‘선수’가 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선수도 어떤 선수일것이냐가 문제인데, 내가 말하는 인문학자란 구체적으로 과학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층위를 말한다. 대개 내가 관심있어하는 인문학자들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문제라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인문학자들이 건방지게(표현이 과하지만 솔직한 내 감정은 그렇다) 과학을 비판하거나 해설하려 할 때 발생한다.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국내 인문학계의 과학비판은 종종 ‘과학은 이래야 한다’는 식이거나 ‘과학은 이렇다’라는 식이다. 그들은 과학을 비판하거나 해설하려 한다. 많지는 않지만 과학계의 인문학 비판은 층위가 다르다. 대부분의 과학지식인들은 인문학에 대해 비판하지 않거나(관심이 없으므로) 인문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인문학자들은 과학이 ‘비인문학적’이라는 이유로는 비판하지 않는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두 학문에 속한 학자들은 서로의 학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까발려 이야기하자면, 과학자들은 학문적 방법론에 관해서라면 인문학에 대한 열등감이 없다. 반면 인문학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과학자들이 가진 열등감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양이 없기 때문이라고 규정된다. 그리고 이 사회의 교양이란 ‘인문학적 교양’을 뜻한다. 즉,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가 이 시대의 교양이라는 말이다. 두 학문은 묘한 갈등관계 속에 각기 사회적 지위를 점유한다. 이건 CP 스노우가 말한 ‘두문화’를 넘어서는 문제다. 솔직히 말해 스노우의 두문화는 유치한 책이다. 그 속에는 심각한 논증이나 분석 및 역사적 통찰도 없다. 그냥 스노우라는 과학자가 문학클럽에도 속했던 인물이다 보니 실험실이라는 과학자사회와 문학자사회를 오가며 느낀 괴리감을 에세이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그 책이 강연문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강연문이라고 모두 허접스럽지는 않지만, 스노우의 그 책은 우연히 시류에 맞아떨어진 베스트셀러일 뿐이다.
스노우의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스노우가 단순히 두문화의 충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윌슨의 통섭이 단순히 인문학과 과학이 융합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니듯, 스노우의 관점도 지극히 과학의 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스노우는 암묵적으로 과학적 지식체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들의 인문학 소양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인문학자들이여 과학 좀 공부해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자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에게 있다. 둘 사이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가 생물학자들의 수학공부와도 연관된다. 나는 당당하게 인정한다. 생물학자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닥치고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독자성을 의심하거나 무시하는 처사는 아니다. 단지 수학을 좀 더 알면 생물학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과학을 좀 더 알면 인문학을 더 잘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가 확장된다. 그럼 과학을 어떻게 더 잘 알 수 있느냐다.
내가 제시한 것은 닥치고 실험실에 가봐라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해봐도 이보다 더 나은 공부법을 생각해내지 못하겠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대충대충 실험실습이라며 받았던 교육은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1%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곳엔 실험설계가 없고 가설확증이 없다. 그건 그냥 커리큘럼에나 존재하는 형식적, 수동적 학습일 뿐이다. 진짜 실험은 닥치고 실험실에 1년쯤 쳐박혀 봐야 한다. 이건 내 경험이고 이 바닥 선수들 모두의 경험이다. 과학은 그렇게 공부해야 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독서다. 인문학의 선수가 되느냐 아니냐는 이 독서라는 행위를 어떻게 고급스럽게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과학은 분과별 다양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자연과학은 이론과 실험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 과학이론은 대가리만 좋으면 책을 통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교과서만 제대로 공부하면 과학이론에 빠삭할 수 있다. 당연하다. 문제는 이 지식이 반쪽짜리라는 것이다. 그 반쪽은 실험실에서 굴러봐야 알 수 있다. 미안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그런 이유로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는 유명한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자 출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말은 귀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다. 나는 진중권이 소칼방에서 토론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과학사회학 및 포퍼, 쿤, 라카토슈 등등을 줄줄이 꽤차고 있었고 과학이 무엇이냐에 관해 신나게 지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 논의가 그냥 닥치고 포퍼와 쿤을 읽으면 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진중권이 과학철학자도 아니고 과학철학자라도 과학자로서의 경험이 없다면 대체로 신빙성 없는 이론만을 내세우기 일쑤인데 진중권에게 뭘 바라느냐는 것이다.
대충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 일부는 엄청나게 열받은 상태일 거라고 추측해본다. 그럴만 하다. 하지만 한가지 부언을 해야한다. 당연히 과학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인문학자 모두가 닥치고 실험실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는 데에 있다. 이게 핵심이다.
첫째, 과학에 관한 윤리학적 논의엔 실험실 경험이 필요 없다. 나는 이점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생명윤리학을 공부하는데 실험실 경험이 있다면야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다. 이러한 논의들은 과학의 성과와 피해들을 이해하는 정도의 지식이면 족하다. 적어도 과학에 관한 윤리학적 논의들은 과학은 이런거다 저런거다를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에도 실험실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과학철학의 논의들을 과학자들이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따라서 그 바닥이 그들만의 리그로 남게되겠지만, 그런 리그에 실험실 경험은 필요하지 않다. 실험실 경험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과학철학자가 실험실에서 굴러먹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다. 그 바닥은 어차피 인문학적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곳이다. 다만 그들 스스로 과학이라는 학문을 다룬다는 이유로 과학에 대해 좀 더 몸으로 아는 학자들을 대우할 뿐이다. 더 많이 알면 좋은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알면 더 좋은 것이다. 이건 그 바닥 선수들이 말하지 않고도 스스로 지켜나가는 암묵지다.
셋째, 과학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에도 실험실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라투어는 존경스러운 학자지만, 나는 김환석, 김동광씨가 닥치고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면 노동현장에 뛰어들어갈 이 좌빨들께서는 과학비판을 위해선 과학현장에 뛰어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게 아쉬울 뿐이다.
넷째. 과학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엔 실험실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건 과학이라는 지식체계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이고 부분적으로는 과학철학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중 과학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정당화의 맥락에 치중한 결과는 과학철학을 과학의 이론만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현대의 과학철학이 발견의 맥락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책만으로는 안된다. 나는 홈즈와 윌리암스와 같은 과학사학자들의 연구를 존경하지만, 그들이 라부아지에나 베르나르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의 발견의 맥락에 접근하기 위해 얼마나 몸으로 공부했는지는 알지 못하다. 몇 년전에 과학철학자 중 분자생물학 실험실에 쳐들어간 한 인물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적어도 그 논문은 나에겐 벅찬 행복이었다. 비록 그 인물이 과학사회학적인 논의로 짖쳐들어가긴 했어도 그랬다. 발견의 맥락은 책으로는 포섭되기 어려운 과학 현장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은 인문학자들은 실험실에 쳐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전제가 결국은 ‘실험실 경험이 있으면 더 좋구’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현실적으로 이러한 몸으로 때우기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고, 실제로 이러한 논의들이 인문학이라는 마당에서 펼쳐진다는 데에 있다. 후자를 쉽게 말하자면, 몸으로 때운 사람들이던 아니던 결국 이런 논의들은 인문학자들의 그라운드, 즉 글쓰기를 통해 펼쳐진다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도구에 제한 받는다. 기껏해야 시계가 최고의 기술이던 당시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은 인간을 시계에 비유했다. 이제 그 비유가 겨우 컴퓨터로 옮겨갔을 뿐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스스로가 사용하는 도구에 제한받는다. 이 모든 논의들이 결국은 누가누가 더 글을 잘 쓰냐로 귀결된다면, 즉 그 논의의 도구가 인문학적 도구라면 결국 그러한 논의엔 진하게 인문학의 성격이 배어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실험실에서 죽쳐봐야 결국은 인문학 놀음이 된다. 이건 글쓰기라는 도구가 인문학의 도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 사태다.
말이 횡성수설되었는데 정리하자.
2. 그들이 말하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의해 경험의 필요성이 결정된다.
2-1. 윤리학적 논의에 실험실 경험은 필수적이지 않다.
2-2. 존재론적 논의도 마찬가지다.
2-3. 사회학적 논의도 마찬가지다.
2-4. 인식론적 논의는 제외다. 이 부분에서 실험실 경험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있으면 좋다일 뿐이다. 실험실 경험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3. 그 경험은 있으나 없으나 별로 개의치 않치만, 결국 그 바닥에선 암묵적으로 경험이 있는 자를 자연션택한다.
2-5는 내가 흔히 바둑해설자와 바둑기사의 관계를 과학학자와 과학자의 관계에 대입해 생각할 때 드는 생각이다. 어떤 아마추어 기사가 바둑을 더 잘 해설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말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빨이 좀 되는 프로기사가 해설판으로 뛰어들면 나라면 그 프로기사의 해설을 듣는다. 김성룡9단은 해설을 참 잘한다. 쉽게 무엇을 정리하고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룡9단처럼 이창호가 해설할 역량이 된다면 나는 이창호의 해설을 듣는다. 이건 단순한 취향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위계가 존중되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바둑을 바둑책으로 공부만 하고, 묘수풀이며 사활문제를 척척 풀어도 바둑 한판 두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나는 바둑 해설을 들을 생각이 없다. 실은 그런 자는 바둑을 해설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바둑계의 현실이다.
이런 비유는 영화계로 오면 좀 달라진다. 내가 바둑을 비유의 대상으로 선호하는 이유다. 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영화계를 바라보면 영화 한번 만들어보지 못한 평론가들이 즐비하고, 영화감독들과 평론가들 사이엔 언제나 웃기는 긴장관계가 존재하는 듯 하다. 이게 과학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영화계를 잘 몰라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만약 영화계가 건강하다면 비록 대중에게 유명한 영화평론가들이 스타처럼 군림할지라도, 영화감독들은 그 평론가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을 지 모른다. 그 바닥에 대해선 대충 영화에서 본 것 밖에 없으니 이런 논의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뭐 그렇다. 다만 그 바닥도 영화감독들이 영화평론은 잘 하지 않는듯 하니, 과학자들과 과학학자들의 관계와 꽤나 비슷한 듯 싶다는 생각은 든다. 과학자들도 대부분 과학연구에나 관심이 있을 뿐이고, 과학평론에는 하등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칸트 문제다
아으, 어렵네여. 관련글까지 해서 한참을 읽어도 대가리가 나빠서인지 해석이 제대로 안 되네;;;
근데 과학의 인식론적 영역에 있어서도 꼭 실험실로 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정당화’의 맥락에만 치중하다보니 이게 현실과 떨어진 하나의 ‘이상적 방법론’을 구축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발견’의 맥락이란 말이 잘 와닿지가 않네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기본적으로 ‘이상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복잡한 현실의 제약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구체적 사례라면 차라리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과학사에 주목하는 게 낫지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식해서 이해를 잘 못한 듯하니 걍 부연 설명을 부탁하고용…
또 김성룡이랑 이창호 이야기는 좀 와닿지 않는 게 얘네들은 다 선수출신이고 실력의 고저 차이일 뿐입니다. 그래도 김성룡도 나이 삼십대임을 고려하면 선전하는 편이고. 차라리 야구 선수 출신 해설자와 비선수 출신 해설자의 차이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손윤사마 등으로부터 전해 듣기로 양키들이 해설할 때는 서로 그 영역을 존중하며 해설이 이뤄진다 하더라고요. 선수출신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그 부분은 되도록 그 쪽에 총대를 넘기는 식으로. 반대로 비선수 출신은 자기 영역에 더욱 집중하고.
그런데 그건 경험을 통한 수행적 지식의 서술, 혹은 일종의 직감을 토하는 것이고 이 경우에서 비실험실 출신이 인식론에 대해 언급이 불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실험실 출신이 현실적 제약 등을 언급하며 실제적인 사례를 통해 더 나은 이론을 구축해 나갈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트랙백 날릴려다 졸라 쪽팔려서 댓글로 남김…
전 문과 출신으로 대학원을 STS쪽으로 지망하고 있는 학생인데 김우재님의 이번 말씀이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본인이 실험실 경험을 해보고 싶어도 국내의 STS나 과학학 협동과정의 커리큘럼에서는 그런걸 해볼 기회가 거의 없는것 같더군요. 과학학 전공자들이 실험과학의 감이라도 잡을만한 경험을 할수 있는 길이 어디 없을까요?
실험실의 문을 그냥 두들겨 보시면 됩니다.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고 놀러가는 심정으로는 안될 일이기도 하고.. 과학자들 중에서 지식인 소리를 좀 듣는 인물들-누가 있으련지는 모르지만- 의 실험실에 문을 두드려 보시길. 제가 추천해 드릴 수 있는 분은 서울대 자연과학대의 ‘이준호’ 교수님 정도인데..글쎄 정재승 교수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니면 홍성욱 교수한테 좀 건의해 보세요. 실험실 문화좀 체험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달라고.
수령 대가리는 충분히 좋으니 겸손 안떨어도 됨. 미시사를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미시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막히는 부분이 반드시 등장함. 이럴때 실험실 경험이 좋기는 한데 굳이 추천하지는 않고, 다만 경험이 있는 과학자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임. 그정도를 이야기 한것.
김성룡 이창호는 와닿지 않는다는 게 이해감. 야구엔 관심조차 없어서 그러는데 적어도 축구는 요즘 프리미어 중계하는 칭구들 대부분이 현직 축구선수 출신이 아니라도 너무 맛깔나게 잘해서 뭐.. 뭐 하튼 예전에 바둑좀 빡시게 둘때 생각하던 거였음.
인식론 문제, 즉 ‘발견의 맥락’은 과학철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것인데 논리경험주의에서 과학자가 뭘 발견하는 층위의 문제, 즉 어떤 과학자의 주관적인 경험이나 그 과학자를 둘러싼 환경이 해당 발견에 영향을 주었는지와 같은 문제를 ‘발견의 맥락’이라고 하고 이 부분은 과학철학이 다룰 수 없는 인식론의 영역이라고 구분지어버린 걸 말함. 정당화의 맥락이라느 그 반대로 이론이 완성되고 이 이론이 다른 이론과 경쟁하고 증거에 의해 보충되고 하는 과정들, 즉 과학자가 어쩌면 철저히 배제된채로 연구될 수 있는, 과학철학자들에게는 꽤나 객관적인 영역으로 보이는 분야를 뜻하고, 이런 층위에서 카르납, 햄펠, 쿤, 포퍼, 라카토슈…등등이 모두 등장함. 과학철학의 역사는 결국 ‘정당화의 맥락’만을 연구했던 역사이고 이건 ‘미르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보면 내가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음.
따라서 인식론의 측면이라는 ‘발견의 맥락’은 과학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이야기하기 꽤 까다로운 문제가 됨. 물론 말은 할 수 있으나 신빙성이 주어지지 않는 문제임. 그래서 철학자들이 포기한 주제인 것이고.
여하튼 쪽팔려하지 말고 꾸준히 댓글 바람. 수령의 통찰력에 나는 매일을 놀라고 있음. 다른 인터넷 찌라시들보다 백배는 나으니 신중하게 학계로 뛰어들 생각도 좀 해보시기 바람.
조언 감사합니다. 홍성욱교수님의 지도를 받게 된다면 꼭 한번 그렇게 건의해 봐야겠군요. 진보담론이 희귀한 한국 생물학계에서 김우재님이 한국의 굴드같은 역할을 해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