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조하고 딱딱한 책들에 빠져 살지만, 그리고 그런 책들 속에서 높은 진입장벽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더 큰 희열을 느끼는 편이지만, 이영도의 책에서 느낀 그런 이미지들을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음에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나에겐 대한민국에 이영도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한국의 장르 판타지를 구원한 선각자다.
간만에 이영도의 단편소설 <에소릴의 드래곤>을 보고 비록 그것이 이전의 <골렘>과 같은 감동을 주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한 필력에 감동을 먹어버렸다. 그는 분명 매우 수줍은 사람이거나 신중한 사람이거나 혹은 대인기피증 혹은 게으른 사람이거나 뭐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글을 발표하는 것 이외의 일들에는 참으로 관심이 없어 보이고, 큰 욕심도 없어 보인다. 듣기로는 그의 책 <드래곤 라자>가 일본에서만 30만권이 팔렸다는데 이런 갑부…
이영도의 소설이야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를 외우는 나인데, 게다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보여준 그 새롭고 독특한 세계관에 매료되어 눈마새위키에서 놀다시피 했던 나인데, 뭐 더 할말이 없을 듯 하다. 나는 문학평론가가 아니라서 데리다나 라깡 정도는 읽어야 할 수 있어 보이는 문학비평은 못할 성 싶고, 그저 반가운 것은 이영도의 ‘논문’ 비슷한 류의 글 하나를 발견해서 기쁜 것 뿐이다. 이렇게 나는 건조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안티포에틱한 뇌를 지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어찌 보면 이영도의 소설이 나에게 읽힌 이유도, 이영도가 그 가벼운 문체속에 숨겨둔, 그래서 나의 안티포에틱함을 자극했던 그 철학적 주제들 때문일런지 모른다.
<장르 판타지는 도구다>라는 글인데, 계간지 <문학과 사회>에 2004년 실렸다. 뭐 글의 요지는 장르 판타지는 일종의 도구고 타자의 경우엔, 외연의 확장이라는 그 도구성에 매료되 장르 판타지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르 판타지의 특징은 이영도에 따르자면, “이차 세계 창조, 압도적 환상성, 외연의 확장”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이영도의 공부량이 대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항상 해왔지만, 홍적세에서 진화한 인간에게 추론능력이 진화했음을 장르 판타지 혹은 인간의 상상력과 연결시키는 설명은 참으로 부드럽다. 이런건 공부 왠만큼 해서는 나오는 게 아니다. 장담한다. 이영도의 입으로 들어보자.
한국인은 환웅과 웅녀의 자손이라고 일컬어지고 종교적 신념의 문제나 다른 문제가 없다면
한국인은 그 말에 대충 동의하는 편이지만, 어떤 유전학자도 우리의 유전자 속에 곰의 유전자가 섞여 있는지 조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을에 폭식하고 겨울에 잠을 자는지 관찰하겠다는 동물행동학자가 있다면 우리는 당황하거나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쑥과 마늘의 부작용으로 변태를 일으킨 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압도적 환상성이다. 재미있게도 인간은 이런
것들을 대범하게 받아들인다. 진화론적인 취지에서 본다면 현실을 능동적으로 관찰하고 잘 조작해온 개체가 더 현실 속에 잘 살아남고
많은 자손을 남겼을 테니 우리는 모두 현실주의자여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 선조는 현실을 잘 관찰하는
생물이라기보다는 재작년과 작년에 과일이 달렸던 가지에는 올해에도 과일이 맺힐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생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생물들이 과일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그 가지로 걸어가 과일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에너지로 후손을 만들었다. 우리는 감각
기관에 포착되지 않는 실재도 머릿속에서 구성할 수 있는 생물의 후손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비현실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능력 때문에 우리는 현실과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 환상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래서 공포에 빠지거나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수소, 탄소, 산소, 질소, 칼슘, 인……이라고 말해서 겁먹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잔뜩 묻혀 있는 묘지는 으스스하다고
느낀다. 저 원소들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그린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우리는 머릿속의 환상에도 영향을 받는
생물이며, 그렇기에 판타지는 씌어질 수 있다.
진화인류학, 혹은 진화심리학의 전형적인 설명을 문학적 상상력 혹은 장르 판타지가 기능하는 이유와 연결시키는 저 부드러움이란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이영도는 진화론자였던 것이다.
나아가 진화론자라고 해도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빠져 스스로 쿨게이라고 자처하며 보수로 흐르게 마련인 것인데, 우리의 이영도는 날선 진보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도야말로 대한민국 스켑티칼레프트(Skeptical Left)들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이영도의 말로 마무리하자.
무엇이 현실인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이 없는 자의 현실에는 색깔이 없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색깔에 대해 이야기하므로 그것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맹인은 현실 속에서 색깔을 포착할 수 없다. 현실은 관찰자에 따라 극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 2004년 현재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 보는 현실은 자신의 지도 아래 점점 평화로워지는 세계다. 그리고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그런 현실 인식에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세상엔 아마도
63억 개의 현실이 있을 것이다.
아, 이영도님의 새로운 글들이었군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영도님을 참으로 좋아라합니다.
특히나 그 압도적 환상성이라는 점에서.
초기 이영도님의 글을 두고 참으로 말이 많았었죠.
이제는 주류(???) 문학계에서도 어느정도 인정을 하는가 보군요.
음 좋은 글이네요..감사합니다^^
주류라는 애들이라봐야 유라시아특임대사 되는 수준인데
댓글 감사.
모든 것을 떠나서 일단 이영도씨의 작품은 내용도 문체도 재미있지요.
거기다 세계관이라던지 글의 내용에서 스며나오는 생각들이 딱히 특이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렇다고 범상하냐하면 그건 아니더라능.
거의 소설을 ‘마약’의 수준에 올려놓은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ㅋㅋ
나아가 진화론자라고 해도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빠져 스스로 쿨게이라고 자처하며 보수로 흐르게 마련인 것인데,
-> 이 문장에서 어떤 어떤 인물들이 떠오르네요. 뭔가.. 아주 절묘한 촌철살인?
네. 맞습니다. 보수주의의 기원에 회의주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만간 글을 쓸 예정인데, 결국 극단적인 회의주의는 극단적인 사실에 기반하기 마련이고,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 여기는 속성에서 보수주의의 가치를 점유하게 됩니다. 국내 스켑틱스의 제1세대가 보수로 흐르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여기엔 뇌신경생물학적인 어떤 비밀이 숨어 있고, 그건 가소성이 아닐까 한다는..
<그림자 자국>을 봐야 하는데, 언제쯤 보게 되려는지…
김우재 님께서 이영도 씨를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작가지요. 판타지 열심히 읽다가 SF로 넘어간 이후로, 판타지는 잘 안 읽곤 하는데 이영도 씨 작품은 심심하면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특히 <폴라리스 랩소디>와 <눈물을 마시는 새>는 몇번 읽어도 좋더군요.
그나저나 <에소릴의 드래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그간 이영도 씨가 쓴 단편 작품들은 말할 나위 없이 소설이었지만, 어째 이번 작품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같다는 느낌 같더군요. 특히 대체 이 황당한 캐릭터들은 뭔지 (…….)
네 저도 에소릴을 읽으면서 이영도가 약간 무뎌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자자국 은 어떤지 무척 궁금하다는.
조금 때늦은 덧글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림자자국도 약간 동화같은 풍으로 쓰여졌습니다. 저는 그림자 자국-에소릴의 드래곤 순으로 읽었는데 (전작들을 생각한다면) 둘이 비슷한 풍이라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