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내가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들이 결국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인지, 혹은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결과로부터 우리는 수정자본주의로부터 희망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으로부터 종양이라는 메타포를 떠올린다. 종양은 암세포의 덩어리다. 암세포는 암세포의 주인인 개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무한증식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필요에 따라 혈관을 끌어오고, 계속되는 돌연변이로 자신을 죽이려는 면역계에 대응하는 암세포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유연성’이다. 암세포는 매우 유연한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를 수정자본주의라 흔히 칭한다. 여기서 더 나간 형태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사회민주주의, 속칭 사민주의가 있다. 사민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민주의에서 자본주의의 핵심가치중 한가지인 ‘이윤추구’가 모든 가치에 대해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팔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 혼합 경제 제도를 주장한다. 이들은 소유권이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더 강조한다.
사적 소유를 폐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분배를 변화시키고 과거에 억압받았던 사람들에게 권력을 분배하는 방식으로도 문제가 해결된다. 사회민주주의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이러한 통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같은 새로운 방향설정은 1932년 전당대회에서 명확히 재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예컨대 영국 페이비언협회와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논의에서부터 연원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자본주의”를 “사적 소유”라고 정의한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그러나 사적 이윤이 다른 모든 이해에 우선하고 사회나 고용주 그 어느 측도 기업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자본주의를 정의한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러나 … 사회민주주의가 이윤추구를 인정하지만 이윤추구가 다른 모든 이해들에 우선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다른 이해들에 이윤추구가 우선시 된다면, 사람과 환경과 같은 생산의 다른 요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윤추구는 분명 정치 민주주의적 역량, 강력한 임금노동자 조직, 법률적 지원을 받는 소비자들과 같은 다른 이해들에 의해 균형이 잡혀져야 한다.
이 밖에도,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사적 소유기업, 생산자 연합, 소비자연합과 같은 소유의 다른 형태들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상이한 동기와 상이한 목표를 가진 행위자들이 시장의 발전과 역동성을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사회민주당에 의해 채택된 기본입장이다.
사회주의가 유연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체제의 특성에 대한 분석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자본주의만이 유연한 체제라는 데에 대해서는 얼마든 반박할 여지가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역사에서 보여주는 그 유연함 때문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는, ‘자본주의와 같은 유연함을 지닌 다른 체제는 가능하지 않은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는 그 유연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구조적 ‘불안정성’ 때문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분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체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암세포의 메타포와 같다.
자본주의 이외의 체제,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도 얼마든지 유연함을 보여줄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체택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사회민주주의도 상황에 따라 충분히 유연한 체제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나선>을 저술한 저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자본주의가 지닌 유연함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부터, 다른 유연한 체제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새로운 체제는 가능하다. 그것은 사민주의의 미래태일수도 있고, 폴라니 식의 새로운 전환일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안에서만 자란 사람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상상할 수 없다 해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체제를 꿈꾸게 할 가능성마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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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지닌 본질적 유연함이 녹아 있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이면에는 수정이 필수불가결했던, 그래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수혈할 수 밖에 없었던 불안정성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은 하루이틀의 것이 아니다. 분명 자본주의의 기저에는 개체를 고려하지 않는 종양의 무한증식과 같은 내재적 모순이 존재한다. 개체를 세계로, 종양을 자본주의라는 체제로 생각했을 때, 종양이라는 유연하고 환경에 뛰어난 적응성을 보이는 체제는 그 아름다움 특성에도 불구하고 제거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체제가 가진 ‘유연함’이라는 특성뿐 아니라 그 체제가 지닌 ‘견고함(robustness)’에 관한 것이다. 또한 견고함은 시스템을 다루는 과학이 찾아낸 체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견고함을 어떻게 자본주의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과 그 독성은 자본주의가 그 유연함에도 불구하고 견고하지 않은 시스템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자본주의가 유연한 불안정성에 불과한 체계임이 판명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만큼 유연하고 자본주의보다 견고한 또 다른 체계를 찾아 나아가야 할지 모른다.
어차피 취향에 불과한 것일테지만, 현재까지의 역사가 분명 자본주의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그 기간이 단축되고 있는 공황의 잦은 출현과, 파생금융상품과 같은 규제받지 않은 돈놓고 돈먹기로 인한 버블의 폐해들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무한폭주,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세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역사로부터 사회주의가 실패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로부터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것을 넘어, 근래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종양과 같은 독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폴라니를 비롯한 새로운 체계를 꿈꾼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익숙하지 않은 상상을 감행해야 하는 이유다.
첨언
결국 이런 거대담론은 주류경제학자들, 소위 선수들은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말인데, 그럼 그 바닥 좀 문제가 있는건 아닌지 묻고 싶다. 제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계속해서 양자역학의 결과들이 쏟아지는 데 대해서 한 말은 투정 뿐이었지 않은가. 위기가 근본적인것인지, 아니면 지엽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는 정량적 기준이 없다면,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이고 필요한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게 쥬류의 태도라는 건 패러다임 안에서 문제나 풀고 있는 과학자들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그럴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제풀기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문제가 아닌가. 문제는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주류경제학이라는 말 속에는 결국 경제학이 과학보다 더한 방식의 권위와 경제학자들이라는 집단의 심리학적 요동에 불과하다는 것의 다른 말 아닌가? 주류경제학에서는 끝난 얘기다. 참 편한 얘기다. 폴라니를 떠드는 학자들은 죄다 나가 뒤져야 할 듯.
잘 아시겠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가 네이션-국가-자본의 삼위일체의 결합이라서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견고’하다고 분석하더군요. 스스로 반자본주의운동으로써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NAM이라는 어소시에이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화폐통화에서 ‘잉여’개념을 없애기 위한 시도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
고진을 읽을만한 여력이 안되서 알지 못했습니다. 읽을 책은 많고 몸은 바쁩니다.
저도 공돌이(건축전공)출신이라서 썩 무식한 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 이택광 교수와 조정환 선생의 논쟁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어요. 아무리 논쟁이라도 좀 즐기시면서 하면 좋겠는데 이건 뭐 전쟁판이네요. 고진의 강연이 있는데… 첫머리에 읽어 보시면 (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AIE0&articleno=17954142&categoryId=774146#ajax_history_home) 촛불 시위등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거든요. 고진은 노동운동을 시민운동과는 분리하네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분리되는 양상 역시 자본의 유연성의 결과인 것 같거든요. 그러니 뭐… 촛불이 중간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좀 지지부진한 분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은 물론 우리보다 자본주의가 더욱 고양되었으니까 벌써 2002년도에 고진이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지요. 아니면 우리 지성인들만 몰랐던지요. 그야말로 時次的 관점의 차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고진의 분석의 옳고 그름을 공돌이가 판단하는 일은 주제 넘은 일이겠지만요. 그런거…누가 좀 해 주면 좋겠어요.
고진은 사람의 말을 하는군요. 지역화폐운동이 저렇게 연결되는 것인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역화폐에 관심이 있는데, 문제는 이 지역이라는 지리적 공간이 가지는 변죽때문에 뭔가 삐끗거린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지역화폐운동은 폴라니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홍기빈씨를 주목해보세요. 그런거 좀 해줄지도 모를듯….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상을 감행해야 하는 이유’라는 말이 멋지네요. 관련 논의 중에 가장 제 맘과 일치하는 포스팅인듯! 링크 걸어도 될까요?
링크 따위, 마구 거셔도 좋습니다. 훗.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과 지역통화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예전에 스켑티컬 레프트란 사이트에 관련 글을 참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과거에 가라타니 고진이 추진했던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의 일환으로 니시베 마코토(西部忠)라는 일본 경제학자의 도움을 받아 지역화폐운동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관련 글은 그 니시베 마코토씨가 가라타니 고진의 초청을 받아 2000년NAM 결성 총회에서 행한 강연입니다. 지역통화(LETS)가 가라타니 고진의 NAM에서 어떤 취지나 의의로 시도되었는지 대략 감은 잡을 수 있습니다.
홍기빈씨나 폴라니의 사상과 어떤 접점을 가지는지 한번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네요.
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47584&sca=&sfl=mb_id%2C0&stx=minue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