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간단없이 향상하려 하면서, 과학으로 하여금 물건의 원인 혹은 기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철학은 또 과학 외에도 인류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는 것, 과학이 아직 해결하지 않는 문제가 있나는 것을 과학에게 가르친다. 과학과 철학의 이와 같은 확고한 악수는 약자에게 유익하다. 서로 향상을 격려하고 서로 껴안는다. 그렇지만 철학과 과학을 결부하고 있는 이 연락이 끊어진다면, 철학은 과학의 지지 혹은 균형을 잃고, 멀리 구름 뒤로 빠져 들어가고, 과학은 이에 반하여 자기의 진로와 향상적 정신을 잃고 타락하여, 정지하거나 또는 정처없이 방황의 나그네길을 떠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철학이 이 형제적 악수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내의 문제에까지 간섭해서, 이것이 활동하는 게 있어서 독단적으로 지도하려 한다면, 그때는 이미 일치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또 과학의 특수한 의견을 어떤 철학체계를 위해 이용하고자 요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하나의 망상이다. 과학상의 관찰, 실험 또는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방법이나 조작은 너무나 막연해서 소용이 없다. 차라리 실제로 일정한 과학을 다루고 있는 실험학자나 과학자, 혹은 철학자만이 알 수 있는 극히 특수한 과학적 방법 내지 조작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지(人知)는 만일 진보의 요소가 과학 그 자체의 소지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개인적 영향만으로 이것을 진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으리만큼 서로 착잡하게 얽히고 서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대학자의 우월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역시 그들이 과학에 대하여 미친 특수한 영향 혹은 일반적 영향에 있어서 그들 또한 반드시 시대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다. 철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인간정신의 진행에 따를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이 인지의 발달에 공헌하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진보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열어주는 데에만 있다. 그렇지만 철학에 있어서도 역시 그들은 그 시대의 표현이다. 따라서 어떤 철학자가, 마침 과학이 유망한 방향을 취하고 있는 시대에 조우했을 때, 이 과학의 진보와 조화되는 체계를 만들어 놓고, 이어 그 시대의 모든 과학적 진보는 그의 체계의 영향에 의하는 것이라고 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설사 과학자가 철학자에게 유익하고, 동시에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유익하다 하더라도, 과학자는 그 자신에 대하여 자유이며, 주인공이다. 나 혼자의 생각으로는, 과학자는 철학자가 없더라도 자기의 발견/학설/과학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 신용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면, “과학에 있어서 최대의 발견을 한 사람은 베이컨을 가장 몰랐던 사람들이다. 이에 반하여 베이컨의 책을 읽고, 이것을 묵상한 사람들은-베이컨 그 자신도 그랬지만-아무런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조세프 드 매틀이 말한 것처럼[footnote]J. de Maistre, Examen de la philosophie de Bacon, t. p81[/footnote], 이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요컨대, 실험학자가 자연계의 문제를 처리할 때, 과학적 조작이나 방법은 실험실 속에서만 습득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청년을 우선 인도해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 실험실을 향해서이다. 박학이나 과학적 비판은 성인의 일이다. 청년은 과학의 참다운 전당인 실험실에서 과학과 한패가 되기 시작해야만 성과도 얻을 수 있다. 또 실험학자라고 통틀어 말해도, 추리의 방법은 여러가지 과학에 따라, 또 이것을 응용하는 다소 곤란한 경우나 복잡한 경우에 따라, 무한히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과학자, 아니 각 과학의 전문가만이 동류의 문제에 관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물학자의 정신은 이미 생물학자의 정신이 아니고, 화학자의 정신 또한 물리학자의 정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 혹은 또 근대의 철학자가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 과학자가 지켜야 할 훈칙을 일반적 체계로 만들어내려 했을 때, 과학을 먼 발치로 보고만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확실히 매력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저서는 이미 다 되어버린 과학자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 또 앞으로 과학의 연구에 몸을 맡기려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물의 그릇된 단순화에 의하여 그들을 미혹하게 할 뿐이다. 그 위에 나쁜 것은, 수많은 막연한 훈계, 또는 실제로 응용할 수 없는 훈계를 정신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과학의 연구에 종사하여 참다운 실험학자가 되려고 한다면, 이런 훈계는 하루 빨리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과학자와 실험학자의 교육은 각각 연구하려 하는 과학의 전문 실험실에서만 이루어 진다는 것, 그리고 유익한 교훈은 철학적 서적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과학의 실습의 기미(機黴)에서 생긴다고 말했다. 나는 또 본 저서에서 생리학과 실험의학의 되도록 정확힌 개념을 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실험학자가 절대로 지켜야할 규칙이나 교훈을 주었다고 믿을만큼의 자만심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각자가 생리학에 속하는 과학적 문제를 이해하고, 아울러 이 연구에 필요한 수단을 알도록 실험적 생물과학의 문제의 본질을 음미하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연구의 실례를 인용했다. 그러나 불필요한 설명을 하지 않도록, 또 유일 절대적 규칙을 정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왜냐 하면 교사의 역할은 학생에게 과학이 제출하는 목적들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그에게 지적해 주는데 그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으로 하여금 그가 제시한 목적에 도달하도록, 학생이 쓰는 방법과 학생의 본성에 따라서 자유롭게 활동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원조하러 가면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참다운 과학적 방법이란 정신을 질식시킴이 없이, 이것을 포용하고, 또 되도록 단독으로 해놓고, 가장 귀중한 성질인 창조적 독창력과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정신을 지도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과학은 새로운 사상과 독창적 사고력에 의해서만 진보한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도 예지를 무장할 지식이 자기의 중압에 의해 뭉개지지 않도록 정신이 박약한 반면을 똑바로 유지하도록 정해진 규칙이 강장(强壯) 풍요한 다른 반면을 위축 질식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여기서 다른 논의에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박학의 과장과 체계의 침입이나 지배에 대하여, 생물학과 실험의학을 경계시키는데 그치지 않으면 안되겠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 아래 종속되는 과학은, 이에 의해 자기의 풍요성을 잃고, 또한 인류의 모든 진보의 본질적 조건인 정신의 독립과 자유를 잃기 때문이다.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p275-278
내가 의학의 체계에 관하여 지금 말한 것은, 그대로 옮겨서 이것을 철학의 체계에도 응용할 수가 있다. 실험의학은(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철학체계에도 구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생리학자의 역할은 다른 과학자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이러이러한 철학체계의 증명역할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진리를 위해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어떤 철학체계를 기초로 하여 과학적 연구를 추구해 갈 때는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진 지역에서 방황하거나 혹은 또 실험학자가 연구에 즈음하여 항상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자유굴신(自由屈伸)의 정신과 조화하기 어려운 일종의 허위의 보증이나 완고를, 체계에서 감득하게 된다. 따라서 주의하여 모든 종류의 체계를 극력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이렇게 우려하는 것은, 체계는 자연 속에 없고, 다만 사람의 정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철학체계를 배척하는 실증철학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체계라고 하는 불합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자연에 직면하여, 실험의학에 따르면서, 완비되어 가는 탐구방법의 도움으로, 자연에 질문을 해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최선의 철학체계는, 전혀 철학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따라서 나는 실험학자로서는 철학체계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철학적 정신까지도 배척할 수는 없다. 이 철학적 정신은 도처에 있고, 어떠한 체계에도 속함이 없이 다만 일체의 과학뿐 아니라 일체의 인지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철학적 체계에서는 완전히 멀어지면서도 철학자를 크게 애호하고, 그들과의 교제에서 무한한 기쁨을 맛보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다. 사실 또 과학적 견지에서 보아도, 철학이라는 것은 미지의 사상을 인식하려 하는, 인간 이성의 영원한 동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때문에 철학자는 항상 이설이 분분한 문제라던지, 과학의 고상한 부분, 상급의 한계 등에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학적 사상을 향하여 이것에 활기를 불어넣고, 고상하게 하는 운동을 전한다. 철학자는 또 일반적인 지적 훈련에 의하여 정신을 함양하면서 이것을 강건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는 대문제의 해결에, 정신을 끊임없이 접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철학자는, 미지에 대한 일종의 갈증 혹은 연구의 성화-학자에 있어서는 이것이 결코 사라져서는 안된다-를 유지하고 있다.
<실험의학방법론>, 대광문화사, p272
실증주의자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 실증주의라는 철학체계마져 부정했던 100여년 전의 어떤 과학자가 시대를 넘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시대는 변했고, 베르나르의 시대, 즉 자연철학이 과학을 지배하려던 시기를 넘어 이제 과학이 철학을 공격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지만, 베르나르의 말은 여전히 의미있다. 실험실은 과학자가 잉태되는 곳이다. 과학은 그곳에서 스스로 진보한다. 그걸 모르는 철학자들은 과학의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끌로드 베르나르를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태어난 땅도 그러하려니와, 이미 100여년 전에 이런 사유를 했던 생물힉자이자 의사가 존재한다는 건 좌절 그 자체다. 나아가 베르나르의 사유가 이미 베르그송과 미르코 그르멕을
거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의 학자들조차 그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다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다. 더불어 다윈2009에서
수년 전 내가 하던 고민을 베르나르와 그르멕을 끌어들여 발표했다는 학자는 베르나르가 했던 말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김영건 선생님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베르나르의 이 말들은 지금의 시대에는 부적절 한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베르나르가 고민했던 그 시대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인지.
오늘 글의 핵심에 대해서는 쌤이 정리해주셔서 대충 알겠으나 너무 어려웠으므로 이따 와서 다시 정독
ㅇ_ㅇ;;
헌책방을 잘 뒤져보면, 대광문화사의 <실험의학방법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종의 기원>은 상대도 되지 않는. 꼭 구입하세요. 제가 강요하는 필수독서 중의 하나입니다.
근데, 저런 사람하고 같이 일했던 프로이트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거. 거참 역사의 아이러니로군요.
끌로드 베르나르와 같은 사람의 존재가 왜 급진적생물학자님께 좌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글의 흐름상 좌절을 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좋은 선생이자 연대의 대상이 되는 사람 같아서요.
역사엔 아이러니가 많죠.
베르나르를 알기 전에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예요. 잠시 좌절. 그리고 극복. 그런겁니다. 🙂
선추천+댓글+검색 후감상.
검색해서 들어가보니 괜찮은 블로그더군요. 소녀시대 사진이 많은… 그냥… 그렇다구요.
끌로드 베르나르에 대해 검색해보니, 거의 우재님의 글외에는 찾기 힘들더군요. 베르그송 관련 글모음 중에 베르나르에 대한 강의가 있는 정도..
이 땅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학자인가 봅니다.
책은 절판되서 구하기 쉽지 않은 거 같고,
1950년대판과 1980년대판이 학교도서관에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도 안볼 것 같은 느낌이 팍팍.ㅋㅋ
실험의학방법론을 읽어내고 싶은데, 혼자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떤 과학적 방법론으로 획득된 지식이 단순히 지식으로만 남아있는다거나, 우리 삶에서 괴리되어 있을 때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식의 사회적 소비에는 그 지식과는 별개의 요소들이 관여하니까요. 물론, 사회과학이 그런 요소들마저 분석해내길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시키려 할 때, 지적인 힘과 그것을 실현할만한 구체적인 실행력이나 판단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자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욕망이랄까, 정서랄까 이런 문제들을 감지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건 전자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능력이니까요. 전인적 인간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좌뇌와 우뇌의 밸런스일 수도 있고..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인데, 아무튼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1. 메트 리들리 – 게놈
2. 끌로드 베르나르 – 실험의학방법론
추천 받은 두 책입니다. 이제 겨우 두 권뿐이지만 한권한권의 지적 무게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큰 책들이네요. 감사히 읽겠습니다. ^_^
p.s.
언제나 다 읽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는 한숨 ( ‘o’)
트랙백을 따라 김영건 선생님이 답신한 글을 보았습니다. 학문간의 관계, 그 학문을 하는 이들의 자세. 다행히 글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았구나하는 안도와 함께 다음과 같은 궁금함이 떠올랐습니다.
소위 세계화 후 교류가 늘어나고 외국문화를 배우고 오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 문화를 접하고 온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외국에서 문화를 배울 때는 젊은 피와 학문 탐구가였을지 모른다. 허나 그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는 지식을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위한 도구로 전환시키고 축소시켜버린다. 마치 좋은 종자에서 자란 가지를 한국이라는 나무에 접붙이고 하루해살이 사고마는 짧은 수명의 가지같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배우기 위해서’ 외국에 나간 것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 외국에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인 목적에 충실했다.
한국이라는 문화토양이 어떤지를 고민해볼 필요 이전에, 동도서기(김영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하는 모습과 또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행태는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는가. 최장집 선생님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말씀하듯 현재 한국의 대학은 사회 진출을 위한 직업 학원으로 전락하고, 보수집단으로서 모습하고 있는 이때에 그들 스스로의 자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빈약한 자본, 저성장, 실업 그로 인해 얻어지는 다시 빈약한 자본. 이와 같은 챗바퀴를 끊기 위해 어느 부분에서 외부의 유입 혹은 충격을 가해 변모를 시킨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토양은 어찌해야하는가. 이 역시도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제 3자에게 기대해야하는가. 우리는 어째서 스스로 자라나는 식물이 없는 것인가. 만일 있다면 왜 그것은 크게 커나가지 못하는가. 아니면 누군가 못크게 막는 것인가.
최근들어 왜 힌두교에 시바가 신으로 존재하는지 알듯하다. 헤르만 해세가 말한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라는 말도 알듯하다. 하지만 나 역시 나약한 존재여서 ‘변화’에 겁을 내고 주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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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엇 글을 쓰다보니까 본문 글과 전혀 다른 방향과 주제의 답글이 적혔습니다. -_-; 죄송합니다. 글을 따라가다 보니 ‘동도서기’라는 말이 뭔가 확 잡아당겨서요. 그리고 쌤한테 한번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사회에 뭔가 변화를 주기위해서는 어찌해야하는가. 저는 가장 가까운 한 사람조차 설득 못하는데 도대체 한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하는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응? 올려주시는 글들 너무 재있있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ㅋㅋㅋ
좋은 책입니다. 제본해서 가지고 계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좋은 고민들입니다. 성과가 나오면 트랙백을 걸어주시면 좋게습니다.
최한기의 책들 우선 “기측체의”를 읽어보세요. 해설서들도 많이 나와있으니, 치열하게 서구과학과 동양적 정신의 상호관계를 고민했던 150년전 인물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동도서기라..김영건 선생님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사고한다고 하셨지만, 우리나라 과학자들에게는 아예 “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