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에게
기억하겠지만,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 삼는 것이라 생각된다.” 실은 이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단다. 그는 “최고의 선”이나 “단 하나의 선”이라는 말 대신 “어떤” 선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어떤”이라는 말로부터 두 가지를 알 수 있단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떤” 선이 무엇인지에 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어떤” 선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처럼 교의적인 발언을 했을 게다. 하지만 그는 “생각된다”라는 말을 덧입힘으로써 자신의 발언은 언제든 수정 가능함을, 스스로도 실천지에 속하는 윤리학의 분야에서 확실성의 추구가 불가능함으로 부언하고 있지. 이는 제 3장의 첫 구절 “우리의 논술은 주제가 허락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가지면 충분한 것이 될 것이다”라는 말에서 더욱 확실해 진단다. 이 말을 새기렴. 나나 너나 수학공식을 볼 때마다 머리가 쥐어 터져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논증할 정도의 명료성만 있다면 수학은 이론적 도구가 된단다. 수학을 그 자체로 업으로, 목적으로 삼은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둘째, 그는 “어떤”이라는 말을 통해 개별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단다.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크게 가로지르는 차이는 이 개별자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았고 보편자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은 플라톤에게 있어 관심사가 될 수 없단다. 적어도 국가, 형상 쯤 돼야 플라톤에게는 논구할만한 가치가 생기게 되는 거겠지. “어떤”이라는 말이 개별자를 함축하고 있음은 바로 그 다음 구절 “그러므로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라고 한 주장은 옳은 것이라 하겠다.”라는 에우독소스의 인용 후에 등장한단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그런데 여러 가지 목적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졸업하고 그의 영향력에서 멀리 벗어나면서 시작한 저술이라고 볼 수 있단다. 따라서 데이빗 로스의 말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탈피과정이었고, 그것이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는 여전히 플라톤을 의식하고 있고 또 영향 받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단다. 그는 목적을 나눈다. 활동 자체가 목적인 경우와 성과가 목적이 되는 경우.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좋아 보이겠지. 하지만 개별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인간의 다양한 활동, 예를 들어 의술이나 병법과 같은 활동들의 목적이 다양함을 알게 해주고 있단다. 하지만 여기서 플라톤의 영향이 다시 드리우지. 그는 이러한 목적들 중 최고의 목적을 찾기 위한 논증을 개시한다. 즉, 이러한 인간의 활동, 기술들 중 최고의 기술을 우리가 인정할 수만 있다면 그 기술이 추구하는 목적이 최고의 선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 앞에서 에우독소스를 인용하며 그가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 보렴. “모든 것”을 활동 또는 기술로 환원하고 그 중 최고의 활동을 기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최고의 선을 찾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고의 활동은 ‘정치’란다.
그리스 시대의 국가란 종교와도 개인과도 분리될 수 없는 고귀한 가치였다. 정교분리가 이루어지려면 아직 20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했고, 당시의 국가란, 따라서 정치란 모든 이들이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인간 활동이었단다. 자 이제 정치학이 목표 삼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숙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부분에서 정치학의 목적은 이론이 아닌 실천임을 잠시 강조한 후 과감하게 나아간다. 그것은 ‘행복’이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란 개인의 행복이 아닌 국가, 국민 전체의 행복이라는 것을. 아마도 국가는 아닐 게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는 플라톤과 같은 의미는 아니란다. 보편자를 추구하는 플라톤에게 국가란 하나의 실체이겠지만, 개별자를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란 국민의 집합체일 테니까. 이러한 사고의 차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유기체론의 선구자로 불리게 한단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네 분야의 격언 말이다.
결국 행복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선이며, 모든 이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우리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집합을 찾을 수 있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두에서 분명 이렇게 말했단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성과를 생기게 하는 활동을 떠나 그러한 성과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라고. 나는 이미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를 더 좋은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서 가치판단을 해주지 않는 것은 모든 인간이 그렇게 성과를 떠나 살 수는 없음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에 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자세히 분석을 해보마.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서 말하면서 말이다. 여하튼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제한을 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선이다.”라는 말로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행복을 정의하고 나서 그는 이것이 너무나 자명한 것임을, 즉 이미 당대의 상식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로부터 그는 시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점과, 행복의 추구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 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목표라는 점이 분명해지는구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했기에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듯하다. 어떤 생물학자가 “유전정보는 게놈 속에 담겨있다”라는 말만 하고 강의를 마친다면 요즘 같이 모두가 아는 그런 상식에 대해 사람들이 “도대체 쟤는 뭐야~”라며 반문하지 않겠느냐? 그는 행복을 구체화하기 위해 인간을 탐구한단다. 그는 우리가 지금 인간의 선을 탐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인간의 기능, 즉 인간의 아레테를 분명히 한다면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앞에서와 동일한 논증방식을 사용한다. 즉, 누구나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끌어냄으로서 그는 동의를 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활동’이란다. 따라서 인간에게 특유한 정신 활동이 행복의 설명에 들어야 한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선이란 결국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라 하겠다.”.
결국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고,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란 행복이며, 인간의 선이란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므로, 행복이란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인데,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B) = 행복(C)이다.
인간의 선(A’) =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D)이다.
우리가 논구하는 선(A)은 인간의 선(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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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C) =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 (D)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어설픈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라 행복이 어떤 종류의 활동이며 특히 정신의 활동이라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말 정신의 활동만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단다. 분명 철학자로서 그에게 최고의 활동은 정신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제 8장에 이르러서 그는 플라톤의 견해에 따라 외부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그리고 신체에 관한 것으로 세 종류의 선을 구분한단다. 그는 우선 어떤 활동을 그 어떤 것에 대한 선으로 인정하면서 선에 관한 논의를 활동에 결부시킨단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선이 최고의 선이라면 정신적인 활동도 최고의 것이라고 말하지. 또한 앞에서 그가 어떤 활동의 목적이 선이라 이라 말했음을 기억해보자. 이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만이 참된 선이라고 그가 말했기 때문에 이 정의로부터 성과를 목적으로 삼게 되는 외부적인 선은 제외될 수 있단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사실 스스로는 정신의 활동 자체를 최고의 것으로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외부적인 선과, 신체적인 선을 어떻게 설명해내야만 하는 가였단다. 그는 여기서 잠시 외부적인 선, 즉 정치적인 성공과 경제적 부와 같은 것들을 논리적으로 제외해버리지만 뒤에 가서 다시 꺼내고 있단다. 주위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이 논의를 접을 수는 없었던 게지. 이제 신체적인 선, 즉 쾌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남아 있게 된다. 내가 계속 말했지만 그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논박>이라는 책까지 집필했을 정도로 소피스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또 그랬던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전통을 물려받았단다. 쾌락은 분명 최고의 가치가 아니었지만 그는 쾌락을 끌어안아야만 했던 거지. 단지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쾌락의 대체품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한 방식이란다.
결국 덕 있는 활동이 덕에 속하고 활동은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큰데, 정신적인 활동은 아무런 좋은 결과를 낳지 않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지만, 신체적인 활동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텔레스는 말한다. 철학자로서 사색만을 즐기고 싶었던 그였지만, 그는 “좋은 것들을 전취하는 이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그는 행복이 정신의 활동임을 입증하는 논증을 구사하지 않고 1장을 마무리한다. 이곳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멈춘 곳이다. 1권의 뒷부분에서 당시 매우 유행하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잠시 다루고는 13장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갑자기 정신을 두 부분으로 쪼갠단다.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가 그것이다. 비이성적 요소에는 먹는 것, 자는 것과 같은 식물적 요소와 욕망적 요소가 있고, 이성적 요소는 둘로 나누어 이성적 원리를 가진 부분과 순종하는 부분이 되지만 대체로 구분하지는 않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부분에 대한 논증을 슬쩍 넘기고, 그것을 마치 확실한 것처럼 포장하며 권위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정신과 신체 사이에 보이는 딜레마를 인식한 듯하다. 스스로는 철학자로서 정신적 활동의 우위를 주장하고 싶었지만, 실천지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있는 이상, 또 현실이 그러하지 않을진대 신체적 욕구와 활동에 대해 그는 함구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덕의 경우에는 우리가 먼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덕을 얻게 된다”고 말이다. 이제 여기서 그는 이론지를 다루지 않으므로 확실성을 추구하기 불가능한 윤리학 분야에서 사용하기 위해 “중용”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을 내어놓고 내게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난 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싶다. 난 이렇게 묻는다.
난 아리스토텔레스가 멈춘 이 지점에서 스스로 답을 찾고 싶다. 그와 달리 난 좀 더 풍부한 생물학적 지식과 확고한 지식 속에 서 있으므로 외부적인 조건들을 다루는 심리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동반하여 적어도 신체적 조건에 관해 그보다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쯤에서 공자를 들춰보기로 할까? 내가 꺼내고 싶은 공자의 말은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조금은 상투적인 문구란다. 이 말은 논어 옹야편 제18구에 나오는데 네게도 몇 번 말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내가 항상 외우고 다니는 구절이기도 하고. 공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이자 정치인의 교사였단다. 노자도 그렇듯이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의 철학자들 모두에게 정치란 땔 레야 땔 수 없는 철학자의 업무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감수성을 지닌 이였다. 스스로는 사색과 독서와 강의와 저술로 생애를 마감하고 싶은 이상주의자였지만, 그에게는 옆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들렸단다. 물론 당시의 민중이 지금처럼 소수자를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자의 “즐긴다”라는 표현과 아리스테텔레스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이라는 표현은 의미론적으로 동치다. 예전에 노스모크에서 공자의 이 구절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분분한 해석을 내린 적이 있었단다. 많은 의견들이 오가는 가운데 난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좋아한다는 것은 대상의 변화에 따라 싫어질 수 있다. 즉, 좋아한다는 것은 순간적이고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 좋아함에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즐긴다는 것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말의 뒤에 도대체 그런 즐거움이 있을 수 있느냐는 불평어린 말을 했던 듯하다. 네게 메일을 쓰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이라는 그 설명이 얼마나 명쾌한 것인지, 그것이 공자의 저 구절에 대한 나의 해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정말 명확해짐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내가 앞서 말했듯이, 단순히 ‘즐긴다’라는 것으로는 현실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만약 ‘김우재가 S를 그저 즐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내가 너를 즐긴다는 활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너를 즐긴다라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너를 즐긴다라는 그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세상에 그런 인간이라는 것이 있을까? 당장 너를 보면 웃는 모습을 보고 싶고, 자꾸 쳐다보고 싶고, 보지 않게 되면 생각이 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일진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너를 단순히 즐긴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은 결코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조차도 항상 이 문제에서 후퇴한다. 공자는 그것은 ‘성인’이며 성인은 우리가 다다를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목표라고 무책임하게 도망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정신의 활동’이며 정신의 활동은 그 자체로 완전한 덕이라는 말로 후퇴한다. 나에게 그들의 말은 전혀 조언이 되지 못한다. 나는 나의 논증을 만들어야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야만 한다. 그들이 후퇴한 지점에서 내가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S’ 너에게서 비롯된다.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즐김이란 불가능하며 그럴듯하지도 않다”라는 명제로부터 나는 시작한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따로 정신적 활동을 논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그들 사이에 위계를 놓을 이유도 전혀 없다. 공자가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겐 논증 따위가 없다. 그는 그저 잠언을 늘어놓을 뿐이니까. 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만약 그러한 즐김이 이 세상에 사는 어떠한 인간에게도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 불가능성을 생성하는 제한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즉, 내가 그저 네가 사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고, 너를 내 옆에 두지 않아도 너의 살아 있음만으로 행복하며(‘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라던가,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좋아‘ 따위의), 소유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그런 인간으로 살 수 없는 나의 제한적 조건은 무엇인가? 그 조건의 첫째 부분은 육체에 있고 둘째 부분은 외부에 있다. 이는 내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떠난 그 지점에서 출발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 첫째 부분은 분명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육체적 제한 속에 위치한다. 제프리 밀러와 같은 진화심리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종의 신체는 적응기관이 아니라 광고판에 가깝다. 인간이 가진 대부분의 특징들은 이러한 성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성적 매력은 이성을 유혹하는 도구이며 따라서 그것은 진화적으로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왔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게 특유하다고 감히 선언했던 지적 능력조차도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선택의 결과물이다. 많은 여성학자들이 비판하고 또 제프리 밀러조차 변호하고는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성을 유혹하는 성이 더욱 지적일 수 있다. 많은 천재들이 남자인 이유나, 유명한 요리사, 가수의 대부분이 남자인 이유를 어떤 이들은 그렇게 설명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가설에 대한 충분한 실험을 해 본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인간의 본능과 상관없이 150여명을 넘어서는 거대 국가가 탄생한 이후 지속된 남성의 지배라는 외부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러한 지적능력이 진정 성선택의 결과물인지를 시험해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진화학의 난점이 이 부분에 존재한다. 그들의 가설은 실험불가능하다. 또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인간의 제한적 조건의 두 번째였던 외부적 조건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다.
진화론이나 바이오인포매틱스와 같은 이론중심적인 학문의 난점은 ‘실험불가능성’에 있다. 과학은 가설과 실험의 변주곡이다. 더 나아가 과학의 역사는 그 둘 사이의 계주이기도 하다. 분자생물학과 같은 실험 중심적인 학문의 난점은 ‘몽상불가능성’에 있다. 이 지독한 실험가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들이 너무나 확고해서 언젠가는 깨어질 것이라는 꿈을 꾸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실험결과는 분명 이론중심적인 학문의 가설보다는 확고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가끔 세상을 변화시킬 뿐이다. 과학에서 대부분의 혁명과 세계관의 변화가 이론중심적인 학문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험의 제한이 지나치게 강하면 과학자들은 꿈을 꾸지 못한다. 마치 독재국가의 국민들 대다수가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사회의 장점은 그것이 우연적인 조합에 의한 것이었으며 예정된 결과가 아니었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고 제한에서 벗어나려 한다. 언젠가 인간사회가 다시 만민평등주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다른 글에서 했던 나의 주장은 따라서 옳다(그 글을 보려면 이곳을 클릭하렴). 인간이라는 종의 행복은, 또 자유는 따라서 이러한 우연적인 세계의 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젠가는 붕괴될 국가의 지배 하에서, 끊임없이 일탈을 꿈꿀 자유가 나온다. 국가라는 조직체가 유전자의 의회와 같은 진화의 수순을 따르지 못했음으로 인해 그것은 언젠가 붕괴된다. 이러한 붕괴의 가장 큰 적은 따라서 법이다. 법은 유전자코드와 같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활동이 제한되도록 한다는 점과 역사의 진행에 따라 무언가를 철저하게 기록하게 된다는 점에서 법은 유전자정보와 동일하다. 따라서 나는 언젠가 법치주의를 공략한다. 그것이 나의 논증에 따른 나의 실천이다. 법은 인간사회의 필요악이다.
중요한 내 사상의 핵이 갑자기 떠올라(그래서 네게 감사하게 된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샌 듯하다. 우리는 두 번째 조건인 외부적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그래, 정신적 행복을 가로막는 인간의 두 번째 제한적 조건은 실험불가능성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조작가능성’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과 누군가에 대한 욕망은 모두 그 대상을 내가 다룰 수 있다는 조건하에 성립한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르는 원시부족의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바로 앞 구절을 두고 그것은 ‘조작가능성’이 아니라 ‘인식가능성’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인식가능성은 강하지만 조작가능성은 약하다. 즉, 나는 너를 알 수는 있지만 널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욕망은 분명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질 수도 없고 더 나아가 그것에 아예 닿을 수도 없다면 인간의 욕망은 금방 사라진다. 욕망은 분명 무언가를 내가 다룰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부분에서 반박할 이들이 많아 보이므로 욕망의 앞에 그저 ‘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를 무마하기로 하자. 현재의 논의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여하튼 우리는 무언가를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제한으로 작용한다는 전제에 이르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는 너를 계속해서 볼 수 있고 또 널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S 네가 나의 진정한 목적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널 자주 보고, 또 널 변화시킬 수 있다는 조작가능성이 나에게 욕망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욕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든 행복하기 위해 이 외부적 조건을 넘어서야만 한다. 사실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 만일 누군가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떠나 그를 잊어야만 행복한 것이라는 말이 정말 상식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진정으로 행복하고자 한다면 서로를 멀리하라는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해야만 할까?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논리 속에서는 옳을 수 있어도, 아니 그럴 수도 없지만 분명 더 낳은 해답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두 가지 조건을 살폈다. 첫 번째 조건인 육체적 조건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것으로 누구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설사 이를 피해 스님이 되거나 수녀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잔인하게 말하자면 첫 번째 제한은 인간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그러한 것이다. 아니 아예 그 제한을 피하려 하는 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두 번째 조건은 ‘조작가능성’이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외부적 조건은 모두에게 다르며 또 인간으로 살면서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간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다. 맥락에 따라 ‘조작가능성’은 변한다. 또 우리는 그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이나 ‘즐김’에서 논의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첫 번째 조건, 즉 육체적인 제한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조작가능성을 다루는 외부적 조건은 그 자체가 ‘조작가능’하다. 이는 어떤 조직을 바꿀 때 개개인을 바꾸는 것보다는 그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이유와 상통한다. 시스템이 바로 외부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육체적 조건과 같다. 조직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몇몇 사람의 의지를 탓하는 것보다 조직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유일한 해답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내가 네게 했던 학제간 연구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제간 연구를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시스템이 훨씬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행복을 위해 우리가 다루어야만 하는 한 가지 조건과 한 가지 해답을 만났다. 외부적 조건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우리는 행복이라는 골 때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외부적 조건은 ‘조작가능성’으로 인해 인간에게 발생하는 욕망, 그 욕망으로 인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행복이 탄생하는 제한을 의미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제한을 제거해야 한다. 또 그 제한의 제거는 외부적 조건을 떠나는 것으로는 풀어낼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시스템을 떠난 구성요소는 무의미하고, 육체를 떠난 정신도 무의미하며, 사회를 떠난 개인은 초라하고, 몸을 떠난 세포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적 조건을 제거하는 첫 번째 방법, 즉 그것을 떠난다는 부정적 방법을 또 다시 우리의 해답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한다. 그것은 전혀 만족할 만한 해답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택하는 그런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많은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지 않다.
자 이제 두 번째 조건의 제거라는 사명으로부터 한 가지 재미있는 논리학적 방법을 동원해보자. 조건을 조작함으로써 명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선 서술적으로 이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아래의 문장들을 차례로 읽어 내려가면 된다. 아래의 문장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도 있으므로 천천히 읽으면서 숨을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게다.
2. 그러한 활동은 정신적인 것이다.
3. 하지만 순수하게 정신적인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 가지 제한을 보았다.
4. 그 두 가지 제한은 행복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제한이다.
5. 만약 그 제한을 조작해서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순수한 정신적 활동을 전제하지 않고도 행복하기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6. 두 가지 제한 중 두 번째 제한만이 조작가능하다.
7. 두 번째 제한은 조작가능성이다.
8. 조작가능성의 제거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태이다.
9. 행복은 두 번째 제한이 제거된 그런 활동이다.
10. 제거는 조작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11. 행복은 두 번째 제한을 조작할 수 있는 그런 활동이다.
12.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으로 정의되므로 행복의 추구는 옳은 것이다.
13. 또 행복의 추구는 조작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14. 따라서 누군가가 조작가능하고 이를 제거하고 싶다면 우리는 일단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볼 수 있다. 행복의 추구는 조작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5.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게는 목적이 될 수 없는 행복을 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즉,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게 됨으로써 자신의 대상이(즉 타인이) 그 스스로 목적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활동을 통해 타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을 하고 있게 된다. 즉 타인은 성과로부터 목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6. 따라서 우리는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게 된다.
17. 결국 행복이란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조작가능성의 긍정적인 제거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목적 그 자체’의 성립활동이다.
18. 즉 위의 명제는 “행복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활동이다“라는 명제와 모순됨 없이 행복을 해결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이를 기호를 통해 풀면 매우 간단하다.
행복(A)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B) 조건을 만족할 때에만 선(C)이다. 우리는 A로부터 C를 추구한다.
if B, A = C
그런데 B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제한을 예시했다. 따라서 우리는 B’을 가정하고 B’가 B가 되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if B’ = B, A=C
그런데 B’는 두 번째 제한(D)의 제거로 볼 수 있다.
B’ = not D
두 번째 제한의 제거(not D)는 성과를 (타인을) 행복하게 만든다.
not D = A
그런데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것이므로 두 번째 제한의 제거는 타인을 목적 그자체로 만든다. 즉 A라면 B여야만 한다.
not D = B
따라서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타인을 행복이라는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를 통해 타인은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게 되며 목적 그 자체에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게 되며 결국 행복하다.
So if B = not D = A, A = C
여기서 무한반복의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B따위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으므로 길을 돌아 타인의 B를 추구해 행복하게 될지라도 결국 B에는 이를 수 없다. 즉, not D = B에서 B는 끊임없이 B’로 치환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실천의 문제, 즉 현실의 문제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도덕성의 기원에 관한 글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나는 인간에겐 진성이타성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임을 생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님에게 한방 제대로 먹게 되었었는데 왕님이 나와의 공저를 약속하며 적어준 대략적인 목차의 결론은 이런 문장이었다. “Humanist at task”
인간은 원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의 도덕성을 인간 본성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도덕적 기원을 찾아봐야 그것은 실생활에서 일종의 이론 역할만을 담당하게 될 뿐이다. 이론은 실천과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만약 나의 목적이 인간 사회에서 덕의 기능을 성립시키는 실천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질주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 인본주의를 원하는 이들이 해야만 할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인간의 도덕적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 문제의 해결에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발견한 행복해지는 단한가지 방법의 문제도 도덕성의 기원을 찾던 문제와 비슷한 지점에서 멈춘다. 우리는 끊임없이 B’을 B에 근접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즉 자신이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던 타인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런 활동을 하고 있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방향에서 터지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자면 남이 행복해야 하고 남이 행복하려면 또 내가 행복해야만 한다. 이런 무한반복의 문제에 부딪힐 때 유일한 해법은,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은 과학이라는 지식체계의 방법은 바로 가추(abduction)이다. 최한기는 이를 ‘추측’이라 불렀다. 우리는 어차피 행복하기 위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고 대상을 설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두 가지 제한을 통해 설명했다. 그 대상이 행복해진다면 따라서 우리는 행복하게 된다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 대상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행복을 추구할 그 어떤 논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길을 찾는 개미처럼 끊임없이 주어진 데이터들로부터 탐구하고 가설을 세우고 또 그 가설로부터 다른 데이터들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게 바로 가추요 추측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야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논리적 가정과, 또 이러한 행복의 조건인 ‘그 자체가 목적인 바’를 우리가 성취할 수 없다는 현실적 조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만 하고 또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 재미있는 결론에 이른다. 아니, 결론은 이미 알았으나 새로운 조건 한 가지를 성취한다. 너를 행복하게 함에 있어 나는 끊임없이 너의 반응으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시험하고 또 네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한다. 그 방법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심지어 너를 떠나는 것까지. 그리고 너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은 배움에 속한다. 따라서 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현재 내겐 지금까지 네게 배운 몇 가지 너를 행복하게 하는 비법들이 존재한다. 우선은 이 방법들을 시험해 보고 그리고 너를 행복하게 하고, 그리고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너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믿고 다시 다른 방법을 찾을 테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행복에 대해 논구하다. 2006년 5월 23일 새벽 1시 초고, 2006년 5월 23일 오전 7시 30분 탈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권태로운 정오시간에 ‘눈호강’ 했습니다. ^^
그 분께 이 글을 줄 것을 염두에 두고 쓰셨는지 엄청 궁금하네요..
선추천 & 댓글 후감상
글은 아직 안 읽어봤지만, 어쨌든 난 행복함. 그냥… 그렇다구요.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있죠. 왜 이 글을 읽으니 그말이 생각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여하튼,,,너무 길고 어려워서 못읽겠다 하다가 궁금해서 다시 들와 읽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우리는 끊임없이 B’을 B에 근접시켜야만 한다.’ 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그 글 미묘하게 해석이 뒤바뀌었다죠. http://blog.daum.net/c6703358/17954372 여기 참고. 하지만 전 유흥준의 창조적 오해가 훨씬 맘에 듭니다. 제가 경험한 바, 알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아는 것입니다.
그 분과 쥔장님에게도 중요한 것은 대상에 규정에 되는 상태냐 상태에 규정되는 대상이냐의 문제였나 보네요. 조용한 시간을 즐긴다.와 조용한 시간을 좋아한다는 말에 악센트룰 둘 수 있는 지점은 다르니까요. 커다란 100과 작은 100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종종 무시 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 였었지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