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글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토론술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글은 그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다. 우선 이 글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충돌을 통해 무지의 역설로 소피스트들에게 대적했던 소크라테스의 토론술을 드러내고자 한다. 결론부에서 그러한 목표가 드러난다.
아테네가 불편하게 여긴 것은 소크라테스라는 인격체였다기보다, 이런 토론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토론술은 앎의 체계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자신을 무지한 자로 내려 앉힘으로써 소크라테스는 모든 지식의 한계를 폭로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인 지식에 능숙한 소피스테스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메논과 나눈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토론의 여지를 갖지 않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해야하는 윤리적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크>
소피스테스들을 ‘자연과학적 지식’의 대변자들로 보는 당황스러운 견해는 잠시 제쳐두고, W.K.C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을 따라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 싶었던 바를 추적해보도록 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보통 “덕(virtue)은 앎이다”로 번역되는 명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W.K.C. 거스리, 박종현 역, “희랍 철학 입문.” 서광사 (2000). pp. 99.
영어로 ‘덕(virtue)’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헬라스어 arete 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의 토론(이후 ‘소크’>에서 이 ‘덕’의 개념이 잘 제시되고 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듯 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덕은 앎이다’라고 했다는 언명과 <소크>에서 주장되는 다음의 문장은 뭔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앎만이 ‘올바른 것’이라는 소피스테스적인 명제에 대한 반론을 훌륭하게 제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잘 알지 못하더라도, ‘확신’만 있으면 올바르게 길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앎을 가진 자만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
<소크>의 저자는 (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소피스테스들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앎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지식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소크라테스는 ‘앎’에 대해 뭐라고 생각했을까?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들이 생각했던 두 종류의 ‘앎’이 무엇이 다른지조차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목적에 대한 이해를 일단 갖게 되면, 체택될 수단에 대한 이해가 뒤따르게 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arete 는 먼저 일정한 할 일을 가지는 데 달려 있고, 둘째로는 그 일이 무엇이며 그것이 달성하고자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저한 앎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는 더 나아가, 소피스테스들이 arete 를 가르친다고 공언하고 있었듯, 우리가 절대적인 arete 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어떤 합당한 의미가 -말하자면 인간 그 자체로서의 삶에 있어서의 능함이- 있다면, 모두가 인간들로서 똑같이 수행해야 할 어떤 목적이나 기능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만일에 우리가 이 보편적인 인간의 덕을 얻고자 한다면, 첫째 과업은 사람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W.K.C. 거스리, 박종현 역, “희랍 철학 입문.” 서광사 (2000). pp. 101.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저술을 통해 자연과학의 ‘보편성’에의 추구에 대비되는 문화과학의 ‘특수성’에의 추구를 강조한다. 물론 리케르트에게 이러한 차이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이 다루는 ‘대상’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데, 이 문제는 현재의 논의와는 상관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리케르트가 ‘역사’를 다루는 학문들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왜 불가능한지를 논했다는 점이며, 그 과정에서 자연과학의 학문적 방법론으로서의 ‘보편성’에의 추구가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자연과학’적 지식을 강조한 축을 소피스테스들 소크라테스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오히려 소크라테스라고 주장하는 것이 합당할 듯 하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지식을 얻는 방법을 ‘귀납적인 논구’와 ‘보편적인 정의’라는 두 가지로 나타내주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차이를 요약하는 거스리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소피스테스들은 지식이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보였다. 실은 그 차이가 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행위는, 지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의 탐구가 시작될 수 있기에 앞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어설프고 잘못 인도하는 생각의 나부랑이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열렬한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W.K.C. 거스리, 박종현 역, “희랍 철학 입문.” 서광사 (2000). pp. 102.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지식만으로는 토론을 통해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거스리의 말을 빌자면, “그 문제의 이중적인 측면, 즉 도덕적이고 지적인 측면이 소크라테스가 덕은 앎이라고 말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잘 알지 못하더라도, ‘확신’만 있으면 올바르게 길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앎을 가진 자만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제 소피스트들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던 이들이라는 주장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몇 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소피스테스의 입장에서 탁월함이라는 것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특히 탁월함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었다. 천문학이나 화학 또는 물리학에 대한 기초지식들이 덕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지혜’였다.
자연과학적인 지식에 능숙한 소피스테스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메논과 나눈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토론의 여지를 갖지 않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해야하는 윤리적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테스의 논적으로 ‘이상화’한 것은 플라톤이라는 ‘작가’인 것인데, 이를 통해 플라톤은 자연과학과 다른 ‘앎’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메논이 소크라테스에게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지 묻는 것에서 이 대화는 시작한다. 탁월함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소피스테스적인 생각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탁월함이 자연에 대한 인식이라면 가르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었다. <소크>
우선 거스리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립을 <휴머니즘으로 향한 반발>이라는 장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희랍철학에서 이러한 것들은 상식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일반적으로 희랍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알려진 상식의 선에서, 소피스테스들이 이오니아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가 추구하던 자연에 관한 절대적인 지식을 거부하며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역사를 그리스로까지 소급하고 싶어 안달이 난 과학사가들과 나이브한 과학자 출신의 역사가(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의 첫 장이 ‘이오니아의 마법’이다)들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자연과학의 원시적인 모습을 찾으려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소피스테스들의 지식이 자연과학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거스리에 따르면 희랍 철학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변적인 또는 과학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에는 윤리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면도 포함된다)’이 그것이다. 이러한 두 측면이 성숙함에 따라 제 3의 측면인 비판철학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연대 순으로 보면 희랍에 있어서 첫째 것이 둘째 것보다 먼저 나타났다. 둘째 쪽에서의 도덕 철학 혹은 도덕적 반성에 대한 관심은 기원전 5세기 말이나 되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소피스테스들 및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나타나게 되었다고 거스리는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자연 철학에 대한 최초의 열풍은 사라지고 그 지지자들의 확신이 회의론에 동요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의 아테네가 겪고 있던 정치적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냉담한 과학적 탐구가 적어도 최소한의 여가와 물질적으로 안락한 환경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소피스테스들이 등장하던 시기의 아테네는 그러한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피스테스들은 불병성을 탐구하던 자연철학자, 어쩌면 원시적인 자연과학적 탐구의 주인들을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직업군이었고 흔히 ‘순회 교사’들이었다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소피스테스들 -물론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하나로 가두는 것이 불합리하다 하더라도, 공통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그들이 묶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스리는 소피스테스들의 이 공통점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비록 그들을 특정의 한 철학적인 학파라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어떤 명확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첫째 것은 그들의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가르침이었는데, 이를 그들은 arete 의 습득이라 말했다…
둘째로, 소피스테스들은 하나의 철학적 태도라 일컫는 것이 더 알맞을 어떤 것, 말하자면 하나의 공통된 회의주의, 곧 절대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자연 철학이 이르른 것같이 보였던 막다른 곤경의 당연한 귀추였다. W.K.C. 거스리, 박종현 역, “희랍 철학 입문.” 서광사 (2000). pp. 93.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불신했던 이들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추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자연과학의 성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자연과학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세번째 가능성이 있는데 ‘자연과학’에 대한 저자의 ‘르상티망’이 발현되었을 경우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통 플라톤을 수학적 물리학의 화신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생물학의 화신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인정하기 어렵지만 과학사에서 플라톤을 과학의 원조로 언급하는 논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아니다. Lloyd, G. E. R., “Plato as a Natural Scientist.” The Journal of Hellenic Studies 88 (1968). 소피스테스들은 보통 도덕철학자 혹은 정치철학자 혹은 논객들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의 무기는 수사학의 전통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혹시나 소피스테스들을 자연과학적 지식인으로 해석하는 논문들을 뒤져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인터넷 문서를 찾을 수는 있었는데 역시 여기서도 소피스테스들을 자연과학자라고 인정하지는 않는 듯 하다.
Perhaps because of the mutually contradictory answers offered by the Presocratics as to the nature of the universe, the Sophists turned from theoretical natural science to the rational examination of human affairs for the practical betterment of human life. Philosophical Background of the Fifth Century B.C.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인터넷 논객’의 역할을 했다는 듯한 주장인데, 마찬가지로 별다른 근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재미 있는 일이다. 보통 소피스테스들이야 말로 노무현의 등장을 중심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인터넷 논객’들의 원조라고 불러야 마땅할 듯 한데, 윗 글의 저자는 그런 상식 따위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하다. 어차피 역사의 해석은 주관적이며, 그곳에 공인된 상식 따위는 없다고 믿으면 그만이므로, 별다른 반론을 제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학문은 그렇게 윗 글의 저자가 주장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추구자들이었던 소피스테스들의 목표처럼 그저 수사학으로 가득찬 우승열패의 향연장이 되어버리면 그 뿐이다. 그곳은 주장만이 가득하고 논증과 진리에의 추구는 부차적인,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의 재현이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인터넷 논객’ 같은 역할을 소크라테스가 담당했는데, 지혜의 달인이라고 불리면서 추앙 받던 소피스테스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고 폭로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법은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급기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만들었다. 철학 때문에 죽음을 맞이해야했던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소크>
그나저나 이런 글이 청소년들에게 읽힌다고 한다.
희랍 철학 입문 – 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서광사 |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 하인리히 리케르트 지음, 이상엽 옮김/책세상 |
모르겠습니다. 대화를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결국 ‘르상티망’에 한 표를 던져야 할는지. 고대철학 전공자가 고대철학자에 대한 논의에서 철학전공자의 블로그에서는 반론을 제기하고 생물학자의 블로그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학문의 저변이 ‘통섭’되어가는 희망찬 신호라고 봐야 할까요=_=/ -蟲-
저 선생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 합니다. 그 선생님이 생각을 어떻게라도 꿰맞춰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곧 다음 글이 올라갈 것 같습니다.
실수를 하셨다 생각은 하지만 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훨씬 조심스럽고도 치열하게, 또 정직하게 학문하시면서도 ‘자리’ 얻지 못하시는 ‘선생님’들 생각도 나고,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무지’를 말씀하시는 모습은 언뜻 섬칫하기도 하네요. 여하간 다음 글도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蟲-
제 짧은 생각에는 ‘통섭’일수도 있고, 혹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등등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근본을 찾기 어려운 것들도 목도하고 있긴 하지만요.
뭐 아무튼 저로서는 그 선생님의 글이 설득력 없는 근거, 논리적 무리수, 그릇된 프레임을 통한 의도된 대결구도로 몰아가는 당원용 글이라고 생각되어 매우 불쾌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하고 읽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뭐 거기에다가 소통도 안하신다니….. 왠지 너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