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시대가 끝날때까지, 실험물리학은 비유기체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정량적이고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물리학의 원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 결과 물리학이라는 말은 18세기에 줄곧 모호하게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구축한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실험이나 정량적 측정과 무관하며 비유기체적 세계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선험적 논증을 통해 형상, 실체, 원인, 우유성, 공간, 시간, 필연성, 운동 등등을 다루고 이를 통해 유기체적 세계와 비유기체적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실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이나 지상의 운동에 관한 것보다 자연학의 일부인 동물의 세계를 기술하는 분야에서 훨씬 뛰어났다.실험은 고대세계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실험적 전통은 르네상스 시기의 서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실험은 물리학이 아닌 ‘자연의 마술’로 불렸다. 응용수학의 전통은 있었지만 그것이 물리학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합수학’이라 불렸다. 17세기에는 사변철학의 일부였던 물리학을 학교에서 라틴어로 가르쳤으나 수학은 근사적 응용을 염두에 둔 실제 학문으로 여겨 자국어로 가르쳤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수학이 역학 기예에만 유용하다는 생각을 가진 채 대학을 졸업했다.
장 달랑베르는 <백과전서>의 ‘예비논의’에서 수학은 모든 물리학의 기본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실험물리학은 법칙을 정량화할 수 있는 정도의 가치만 갖게 된다. 실험물리학에서 수학의 중요성은 18세기 내내 논쟁거리가 되었다. 디드로나 뷔퐁, 심지어 벤자민 프랭클린(1706-90)도 물리학에서 수학이 과도하게 사용되는 것을 비난했고 동시에 수학이 과학자들을 자연에서 멀리 떨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추상적 형상에 대한 잘못된 의존으로 이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콩도르세는 달랑베르 편에 서서 수학자들을 제외하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실험물리학은 그저 쓸모없는 ‘사소한 실험’이며 사교장에서 부리는 잔재주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실험적 작업으로 여겨졌다. 논쟁은 실험과 수학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것이었다. 이 두가지는 지식에 이르는 핵심적인 방법이고 이성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볼테르는 그의 <철학서간>에서 잉글랜드 철학자 베이컨(1561-1626)과 로크, 뉴턴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실험을 통하지 않고 제1원리에서 이끌어낼 수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추론은 중간과정을 의미하며 이론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정량적 측정과 실험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중략) 측정은 정성이론이 무엇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지 확실히 알고 나서여 가능해졌다. 전기적 효과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실험이 더 새롭고 확장된 영역을 개척하고 몇몇 정성적인 설명이 들어간 이론을 만들어낸 뒤에야 가능했다. 18세기가 끝날무렵, 정확한 측정은 실험물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신비한 유체’라는 상상의 개념은 예측 가능한 (더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정량화된 규칙으로 대체되었다.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제 3장, 83-89, 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