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의학논쟁’/’한의학 부흥논쟁': 1934년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의학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구 과학을 두고 들끓었던 ‘과현논쟁’을 훑고 있을 때 상지대 최종덕 교수가 ‘동서의학논쟁’ 혹은 ‘한의학 부흥논쟁’이 과현논쟁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점을 일러 주셨다. 1934년 식민지 조선, ‘조선일보’를 통해 장기무, 정근양, 이을호, 조헌영 등의 논자들이 참여해 2월16일~11월11일까지 펼쳐진 이 논쟁은 각각의 논자들의 근대과학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전통과 근대를 어떻게 화해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데서 흥미로운 주제다. 그래서 역사학자 신동원은 이 논쟁을 “근대와 전근대, 과학과 비과학, 서양과 동양, 민족과 대동아 등의 논리가 중첩되어 엉켜 있는 가장 좋은 역사적 사례”라고 평가했으며 “전통적 지식의 근대적 지식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비판” 혹은 “‘근대’와 ‘과학’을 둘러싼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는 평가들이 따라다니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과학의 위치를 평가해볼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논쟁임엔 분명하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보건의료 정책은 ‘醫生’ 제도를 도입해 서양의학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한의사들은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서의 면허를 부여했다. 한의학이 이처럼 무력화되어가는 과정에서도 한의학은 민간에 깊게 뿌리내리고 사라지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었지만, 서양의학에 기반해 살아남아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한의학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던 시기에 ‘동서의학논쟁’이 등장한 것이다.

1934년 2월 관립의학교 출신의 개업의 장기무가 조선일보 지면에 “한방의학의 부흥책”이라는 글을 연재한다. 연재를 통해 그가 주장한 것은 한의학이 “과거의 불합리한 요소와 기형적 잔재를 모두 청산하고 앞으로는 앞으로는 보다 정연한 체계 하에서 과학적 조직적으로 개 량[하여],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학회 설립, 용어의 개정, 연구소와 교육기관 설립, 보도언론기관의 활용” 등의 네 가지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의 정근양이 한의학은 궁극적으로 서양의학에 포섭되어 의학은 일원화되어야 한다는 작금의 ‘통섭’과 같은 논리로 반박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둘의 논쟁을 지켜보던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이면서 한의학을 독학했던 조헌영이 “동서의학 비교비판의 필요”라는 글을 통해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상보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조헌영. 2009.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 서울 : 소나무>라는 책이 동서의학논쟁에 대한 종합적인 저술이라고 한다. 십 여편의 논문이 출판되어 있는데, 서울대 과사철 출신인 전혜리의 논문을 읽어보았다. 아래는 전혜리의 논문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둔 것이다. 조헌영이라는 문제적 인간이 눈에 밟힌다. 그는 한의학을 ‘민중의학’으로 규정했다. 제헌 대한민국의 2대 국회의원이었고, 반탁운동의 주요인물이었고, 월북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다. 이을호가 한의학을 ‘생기론적 기계관’에 입각학 체계라고 생각한 측면도 흥미롭다. 훗날 공부해볼 일이다.


세 번째 단계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근대 의학”이라는 상위 개념 속에 나란히 배치하고 이를 상보적인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한의학의 존립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한의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규정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논쟁의 마지막 논점인 과학과 의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었다. 이 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헌영은 “동서의학 비교 비판의 필요”라는 글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우열을 가 리는데힘을쏟기보다는, 이 둘을 면밀히비교해 볼 필요를 강조했다. 그리고 조헌영의 동서의학 비교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완전히 다른 체계일 뿐만 아니라, 각자가 맡고 있는 역할이 서로 상보적이라 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정근양은 조헌영이 시도한 비교에 대해, 서 양의학과 한의학의 특색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한의학이 서양의 학과 대등한 위치에서 비교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조 헌영이 보기에 한의학에 부정적인 정근양의 태도는 의학이 과학에 포함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조헌영은 정근양과 달리 의학은 과학에 포함되지 않으며, 오히려 의학이 과학보다 앞서나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학을 과학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은 의학의 발전 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전혜리. 2011.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 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15쪽

논쟁에 참여한 한의학 부흥론자들, 즉 장기무, 이을호, 조헌영은 전 통적인 한의학자가 아닌, 한의학과 근대적인 학문을 모두 익힌 새로운 세대의 한의학자들이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모두 수학한 새로운 세대의 한의학 부흥론자 들에게 한의학 부흥의 의미는 단순히 억압받고 있던, 혹은 쇠퇴해가 던 전통을 복권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한의학으로의 복고가 아니라 한의학의 개혁을 통한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염두에 둔 ‘부흥해야 할’ 한의학은 과거의 것,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 ‘근대적’인 것이었다. 전혜리. 2011.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 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16쪽

“어떤 학문을 학술적으로 연구함에 있어서 그 이론뿐 아니라 실험을 중요시함은 현대의 모든 과학적 연구에서 필수조건이다. 이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연구는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의학과 같은 실험 방면에 치중하는 학문에 있어서는 그 규모의 크기를 막론하고 적어도 하나의 완전한 연구소가 있어서 각 부문에 분과적 연구를 종합하여 그 관찰의 결과를 실험을 통해 입증, 통계를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장기무, “한방의학의 부흥책”, 30쪽. “

장기무에게 한의학 부흥의 구체적인 실현 의 문제는 “주관적인 한방의 진단 치료에 어느 정도까지 객관적인 양방의 과학주의 형식을 구비케 할 것인가”, 즉 “방법과 수단에서 표준 을 어떻게 단순화할”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전혜리. 2011.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 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20쪽

“내가 생각건대 한방의학은 그 대부분이 다년간의 경험에서 성립된 것 이요하등볼만한실험적근거를갖지못하였다. 물론 필자는 자연과학에서도 경험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바는 아니다. 더욱이 생명을 가진 생물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에서는 경험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늘 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위대한 경험적 소산도 미미한 한 개의 실험적 반증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있다. 실험적 근거를 갖지못한 경험은 그 발걸음이 자못 위태하다. 정근양, “한방의학 부흥 문제에 대한 제언”, 41-42쪽.”

약의 성분분석 연구가 중요하다는 정근양의 주장은 의학이 자연과 학의 일부라는 전제에서 비롯했다. 이러한 전제는 더 큰 맥락에서 한 의학과 서양의학이 하나의 ‘의학’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원적 의학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의학은 “인체의 생리 및 병 리를 연구하여 질병의 본체를 찾고 그 치료법을 강구”하는 점에서 하 나이며, 따라서 한방의학과 양방의학의 구분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보 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의 ‘의학’이란 양쪽 모두를 절 충하거나 융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의학이 서양의학에 편입됨으로 써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한의학의 내용들 중에서 과 학적으로(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을 연구하여 (서양)의 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근양은 장기무가 제안한 한의학의 제도적 개선안이 한의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의학의 일원화를 주장하는 그의 입장에서, 서양의학을 배 제한 채 한의학만의 독자적인 활동영역을 구축하려는 장기무의 제안 은 부당했다. 그가 보기에 자연과학의 일부인 의학은 자연과학의 목표인 “시공 간을 초월하여 엄연히 존재하는 보편타당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 충 실해야 하는데, 한의학에서의 경험적 사실들은 자연과학에 걸맞은 실험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보았다. 전혜리. 2011.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 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21쪽

이을호가 생각한 한의학의 특이성이란 한의학의 바탕이 되는 생명 관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의학이 ‘소우주(小宇宙)’인 인체를 파편이 아닌 전체로서 인식하고 그 활동성에 주목하는 “생기론적 기 계관(生氣論的 機械觀)”에 입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58) 그가 고안한 “생기론적 기계관”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극단적인 인식인 기계론(機械論)과 생기론(生氣論) 모두를 초월한 독특한 생명 관이었다. 전혜리. 2011.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 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25쪽

“재래 한의학에 미신과 전설 등 불순물이 많이 끼어든 이 유가 여기 있으니, 물질욕과 권위욕에 타오르는 한의들이 꾸며낸 것이 많다. 쉽게 말하면, 한방요법은 극히 간단하기 때문에 산소 결핍 환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이 간단한 것을 감추고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가장한다. 병자 옆에 가서 독경을 하고, 기도를 하고, 향을 피우고, 손발을 만지는 등의 행동을 하여, 병자의 경쾌감과 자기의 노력을 연결시켜서 자기 이외의 사람은 치료하지 못한 다는 것을 인지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한의학의 미신과 전설의 부분으로 남게 되었던것이다. …이러한한의학의미신과전설의옷을벗기고그원리를민중 에게 알려서 민중을 구제하는 진정한 仁術이 되게 할 시기는 왔다. …한의학의 장점은 민중을 위하여 음덕을 베푸는 데 있다….  동양의학은 그 근거를 철학에 두었고 서양의학은 그 기초를 자연과학 에 세웠다. 따라서 그 방법이 다르고 역할이 나뉘었으니 동양의학이 우수한 방면은 서양의학이 열등하고 서양의학이 능한 방면은 동양의 학은보잘것없다. …양의학과한의학은서로대립하여세력을다툴 것이아니며, 또한어느것이좋다, 나쁘다고할성질의것도아니다. 맡은 임무가 다르고 공헌하는 방면이 다르나, 의학이란 넓은 입장에서 볼 때는 한의학과 양의학이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감이 있다.” 조헌영, “동.서 의학의 비교 비판의 필요”

정근양은 그가 전제하는 과학과 비과학의 위계관계를 바로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위 계관계로 투영시킨 것이다. 하지만 조헌영은 의학을 “자연과학”의 범주 안에 두고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위계관계를 설정하는 정근양의 전제 자체를 부정했다. 그 가 볼 때 의학은 인류의 건강을 위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따라야 할 뿐, 그것이 꼭 “과학적”이어야하거나 과학의 방법을 따라야 할 하등 의 이유가 없었다. “과학”은 의학의 발전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인 수 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혜리 (2011), 76-77쪽.

“의학은 자연과학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천래(天來)의 법칙으로 생각하는 것은 … 생명을 취급하는 의학을 질식시키는 것이요, 의학의 발전을 견제 보류 또는 저지하는 것이다. … 의학은 자연과학을 위하여 또는 자연과학이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생명을 옹호하는데 그 존재의 목적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목적에 적합한 방법이라면 그것이 자연과학적이거나 문화과학적이거나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자연과학은 의학에 대하여 부단히 참고자료를 제공하 고 그 발전을 보조할지언정 자연과학이 의학을 구속할 권리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조헌영, “한의학론에 대하여”, 130-131쪽.

조헌영은 의학이 자연과학적이라기보다는 “초자연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초자연과학적”이라는 말은 “반자연과학적” 의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의학이 과학의 발전을 따라 가기보다, 오히려 “의학 자체의 목적을 향해” 과학보다 더 빨리 발전 할수있다는의미가담겨있었다. 이런점에서그는한의학을자연 과학적인 범주 안에 넣으려고 하는 시도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오 히려 “한의학의 특색과 장점은 자연과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면을 이해하고 자연과학이 관찰하지 못하는 방면을 관찰하여 그것을 진단 과 치료에 유용하게 이용”하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헌영은 바로 이 점에서 한의학 부흥론의 정당성을 찾았다. 의학과 과학의 포함 관계를 해체하고, 나아가 의학을 과학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상정하는 조헌영의 생각은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만들어지는 위계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인식은 이을호에게서도 나타난다. 그 역시 의학의 발전에 있어 기계적인 “현 대과학”은 부분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뿐 의학의 목적이나 방향 을 결정하는 의학의 상위개념으로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전혜리 (2011), 78쪽.

하지만 한의학 부흥론이 궁극적으로 한의학의 제도화로 구체화된다는 점에 서, 한의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한의학의 지향에 대 한더큰차이를낳았다. 한의학을과학의범주에두는지그렇지않 은지에 따라 한의학 부흥론자들이 구상한 한의학 제도의 구체적인 모습은 극명히 다르게 나타났던 것이다. 전혜리 (2011), 79쪽.

1935년 한의학 부흥 운동의 주도 세력이었던 장기무, 이을호, 조헌영의 이름은 동양의약협회의 회원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조헌영은 한차례 <동양의약(1939)>에 기고한 바 있는데, 이 글은 서양의학적 입장에서 한의학을 논평한 고방파 학자 채대식(蔡大植)의 글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동양의약 협회,<동양의약(東洋醫藥)> 1~6 (1939). 이처럼 1939년 동양의약협회는 1935년 동서의학연구회와는 매우 다른 지향점과 성격을 지녔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1930년대 말 한의학 운동 사이의 균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식민지 시기 한의학 부흥 담론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희망했던 한의학의 제도화는 결국 해방 이후로 미 뤄졌다. 식민지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정치적, 재정적 한계가 물론 가장 큰 요인이었겠지만, 한의학 부흥론 자체에도 내적인 갈등이 존재 했다. 제도화의 구체적인 양상에 있어서 한의학 부흥론자들은 서로 다른 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의학 종사자들이 논쟁에서 만 들어낸 일종의 ‘합의’는 식민지 시기 당시에 ‘제도화’라는 가시적인 결 과물을 산출해내지는 못했지만, 해방 이후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정착 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혜리 (2011), 86,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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