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대의제, 정당정치 혹은 시장민주주의: 그 한계와 대안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박원순의 당선을 두고 정당정치의 후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정당정치의 후퇴가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대의제의 한 형태인 정당정치가 과연 민의를 대변하고 있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한 국내 정치학자들의 논문도 만만하지 않은데, 박상훈의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마넹의 책 <선거는 민주적인가>만 봐도, 정당정치로 대변되는 대의제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마넹의 정치사상을 다룬 논문은 많지 않은데, 이동수의 논문에서 몇 문장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은 대의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사실보다 오히려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에 있다. 즉 아테네 민주정은 행정관을 ‘선거’에 의 해서가 아니라 ‘추첨(kleros)’에 의해 선출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아 테네 행정부에는 700명가량의 행정직이 있었는데, 이 중 600명 정도가 추첨을 통해 충원되었다. 이들은 주로 협의체에 근무했으며, 임기는 1년으로서 일생동안 다른 행정직에 임명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직책을 한번 이상 가질 수는 없었다 (마넹 2004, 26). 아테네가 추첨을 선출방식으로 삼은 이유는 그것이 대표를 선출하는 데 있어 서 ‘가능성의 평등(equality of possibility)’과 ‘유사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resemblance)’을 가장 높여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능성의 평등’이란 공직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직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유사성의 원칙’은 대표와 대표되는 사람 사이에는 유사성(resemblance)이 높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곽준혁 2005).

마넹은 대의제에 담겨있는 이와 같은 원칙과 정신이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발 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넹은 그 주된 이유를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 이 전적으로 선거에 의존한다는 사실과 연관시킨다. 본시 선거는 추첨이 내포하 고 있는 ‘가능성의 평등’과 ‘유사성의 원칙’과는 다른 ‘탁월성의 원칙’을 실현하 기 위한 제도로서 탁월한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근대 초기와 달리 후기로 접어들면서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전문집단 인 정당이 등장한다. 그러나 원래 근대 대의정부는 조직된 정당이 없는 상태에 서 확립되었다. 대부분의 대의정부 설립자들은 정당이나 파당으로 분할되는 것 을 장차 건설하려는 정치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유권자들의 의견표출을 조직화하는 정당이 대의제의 구성요소로 등장 하고, 각 정당들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현가능성이 없는 정강과 공약을 남발하면서, 점차 선거는 탁월한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식으 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대중적, 계급적 정당에 서 지도자와 평당원 사이의 차이는 심각하다. 정당의 지도자와 대의원들이 노동 계급이라는 배경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쁘티부르조아와 같은 생활을 유지한다. 정당은 노동계급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 람들에게 그 사회계급 내에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가장 유능하고 가장 박식한 노동자를 등용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이러한 더 똑똑하고, 더 야 망찬 노동자들이 소기업가가 되었던 반면, 지금은 정당의 관료가 된다. 노동계급 정당은 노동계급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탈노동자화’된 엘리트들이 지배할 뿐이다(Michels 1962).

투표자는 이제 더 이상 대표자의 자질을 판단하고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인가를 보고, 또 그 정당의 조직과 행동에 익숙한 정당대변자를 자신의 대 표자로 선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투표란 유권자가 정당이 내세운 자신의 후보 에 대해 동의하고 인준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정당민주주의는 활동가 와 정당관료의 통치로 전락한다(마넹 2004, 255).

따라서 대중은 정당인인 전문정치가에게만 통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 비록 고대 그리스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정당민주 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하고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 가 필요한 것이다. 즉 현대사회의 민주주의는 이제 ‘참여민주주의’의 수립을 요 구하고 있다. 여기서 참여민주주의란 대의정부 하에서 시민들이 직접 공적인 직무를 담당하지는 않더라도 정치과정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대표로 하는 체제를 일컫는다(이동수 2004, 72-74). 즉 시민들의 정치적 역할을 투표를 통해 대의정부를 구성하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행위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의정부를 견제감시하고 정치 과정의 여러 층위에서 대표자들과 함께 토의하면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참여민주주의는, 바버(Benjamin R. Barber)가 지적하는 것처럼, 대의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대의정부에 대 한 대중적 통제와 시민교육, 그리고 정당성과 효율성 확보를 목표로 한다 (Barber 1984).

논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벤자민 바버는 <뜨는 도시 지는 국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정치학자다. 박원순과의 최근 대담으로도 국내에 널리 알려졌으며, 다음과 같은 TED 강연을 들으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정당정치라는 허울을 혁파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상호 의존적 세계이자, 상호 의존에서 비롯되는 난해한 문제가 만연한 세계입니다. 그 문제의 해답을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찾다보면 우리가 얻는 건 고안된지 400년이 지난 정치 제도입니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민 국가들이 각각의 관할 구역과 영토를 가지고 서로 분리되어서 각자 자신의 나라 국민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제도입니다. 초국가적인 문제와 난국에 휩싸인 21세기에 정치 제도는 17세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문제는 바로 그 딜레마에 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대칭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1세기의 문제들과 국민 국가처럼 점점 더 기능을 잃어가는 구식 정치 제도, 그 비대칭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최장집과 그의 제자 격인 박상훈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87년에 갇혀 있다. 왜 우리가 젊은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기대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선거때만 되면, 정치적인 사건만 있으면 언론에 등장해 진보정치에 꼰대질을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인건진 모르지만, 바로 그 꼰대질이 진보정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실 때다. 이렇게 늙은 전사들을 껴안고 가는 진보정치의 밝은 앞날을 기대할 그 어떤 역사적 조건도 찾을 수 없다.

대략 꼽아본 문헌들이다. 최장집이라는 인물이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솔직히,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은 80년대에는 빛났을지 모르지만, 이젠 후지다. 다음과 같은 논문과 글들이 최장집을 넘어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곽준혁. 2005. “아테네와 로마: 대의제의 정치철학적 뿌리.” 시민의 신문 4: 18.

이동수. 2005a.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 2005년 겨울, 오토피아 2005 20: 283.

———. 2005b. “특집: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와 대안;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마넹의 논의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3(1): 5–30.

Manin, Bernard, Bernard Manin, and 곽준혁. 2004. 선거는 민주적인가. 서울 :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