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교수의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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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눈이 멀어 광신을 행할 자들의 행태가 예측되나, 할 말은 하겠다. 황우석 사태와 광우병 사태를 거치며 보여준 우희종 교수의 행보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시대정신을 읽었고 배운자로서 직접 전선에 서서 실천하는 미덕을 보인 인물이다. 나도 황우석 사태 때 힘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전선에 서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 후에도 과학자로서의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지속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현재 내가 그로부터 읽게 되는 우려를 표명하고자 할 뿐이다.

손숙미 의원이 우희종 교수의 표절 사건을 들고 나온 이후에도 그에 대한 공격이 계속 되는 듯 하다. <주간동아>에서 “소문난 ‘광우병 전문가’ 허당 의혹“이라는 매우 1박 2일적인 제목의 기사를 뽑은 모양이다. 우희종 교수가 발표한 국내 논문에 광우병 관련 연구가 없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기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그가 발표했다는 논문의 제목이었다. 제목이 <복잡계 이론으로 본 생명과 깨달음의 구조>와 <생명이란 무엇인가>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생명조작에 대한 연기적 관점>이라는 논문도 있고, <생명과학과 선>이라는 저서도 출판했더라. 진하게 불교신자 되시겠다.

내가 놀란 것은 2007년이라는 이 시점에 이미 대한민국 철학계에서 1991년부터 시작되어 비판의 칼날이 매우 날카롭게 세워져 있는 ‘신과학운동’류의 글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전혀 아무런 논조의 변화가 없다.

신과학운동이란 1979년 김용정 당시 동국대 철학과 교수가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ao of Physics>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촉발되어 결국은 신비주의 과학운동으로까지 치달았던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실상 당시 결성되었던 ‘신과학 연구회’의 면모를 알 길은 없으나 비슷한 시기에 김용운 고려대 명예교수로부터 시작된 ‘과학사상 연구회도 발족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학사상연구회’에는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도올 김용옥, 故 조순탁 한국과학원 前원장 등이 속해 있었고 이들은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시작으로 계간 <과학사상>을 출판하는 등의 활동을 펼친다. 1996년 과학사상 측에서 준비된 프리고진과의 인터뷰를 보면 이들의 이름이 중첩되어 나타나는데, 1991년부터 지속된 신과학운동에 대한 비판이 ‘신과학연구회’를 ‘과학사상 연구회’로 전이시킨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단체가 결국 ‘과학사상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합쳐진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프리고진의 인터뷰에 모인 인물들; 신국조, 장회익, 김용정, 김용준, 박이문, 김두철, 홍욱희, 소광섭 등은 그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르다. 특히 소광섭 교수는 현재 스켑틱스 진영에서 강하게 비판 중인 ‘봉한학설’의 실체를 밝혔다고 주장하는 지극히 신비주의 적인, 어찌 보면 상당히 엇나간 인물이다.

한국 신과학 운동 발달과정

1979년 김용정 교수, 카프라(Fritjof Capra)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번역 출판
1984년 <과학기술과 정신세계> 번역 출판
1985년 ‘신과학 연구회’ 결성,<신과학 운동>출판
1990년대 기(氣), 기공(氣功) 붐, 공간氣(자유에너지)과 생체氣(생명장에너지)의 연구,선도(仙道),주역, 풍수, 수맥, UFO, 심령현상, 염력과 같은 초상현상에 대해 관심 고조
1994년 ‘한국정신과학회’ 창단
1996년 미내사(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클럽 창단, 수차례 심포지엄 개최
1997년 국회 주관으로 신과학 기술 개발을 위한 세미나 개최. 이후 국회 과학정보통신 위원회에서 정신과학육성진흥법안 입법

어찌 보면 히피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에 대한 반동이 과학계로 퍼져나갔던 이 사건이 국내에 수입되면서 신과학운동은 급속히 동양적 혹은 신비주의적 색채를 띄기 시작한다. 실상 신과학운동을 비판하고 나선 진영이 과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었음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마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연구실에 쳐박혀 신과학운동이 뭔지도 몰랐을 게 뻔하지만. 문제는 방법론적 환원주의로서의 과학과 그 사상들이 제대로 수입되기도 전에 신비주의 과학사상들이 먼저 수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땅의 과학수입은 무너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미 과학이 경제부강책으로 수입되면서 제대로 된 과학(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실태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은 신과학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신과학운동에 대한 몇 안되는 비판들 중 최종덕 교수의 비판을 추천한다. <신과학 운동의 평가와 전망>에서 인용한다. 우선 최종덕 교수는 한국의 신과학 운동이 가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고전과학적 세계관의 병리적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운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학술적으로 수용하려고 하며, 그 학술적 논거는 비평형 역학계를 수립하고 있는 최근의 정통과학계를 지향한다.
2) 취향에 맞는 외국의 비전공자의 신과학 도서를 수용하면서, 의도된 신과학 경향을 전달하여 편향성을 띄우고 있다.
3) 기 현상이나 풍수, 동양의학, 서구 신비주의 현상을 너무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4)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과학을 이용한 과학기술개발에 전력을 하기도 한다.
5) 신과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기성종교의 결집력이 약해지는 산업사회에서 현대과학기술사회에 맞는 새로운 결집력을 요구하면서 신과학을 수단화하는 경향이 있다.
6) 현대 기술문명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성 회복 프로그램으로서 신과학의 메시지를 강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
7) 생태운동의 근거로서 신과학을 연구하고 발표하기도 한다.
8) 최근의 경향이지만 신과학 기술개발을 이용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업적 행위를 하는 경향도 있다.  

특히 최종덕 교수는 신과학운동의 배후에 ‘결정론에 대한 문화적 피해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카프라가 ‘도’를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철저히 서구적 관점에서 이해된 동양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마치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이론들이 불교와 같은 동양사상을 정당화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후 노자의 사상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계시는 만큼 자신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하지만, 당시 그가 내린 철학적 비판은 매우 온당하고 날카로웠다.

나의 비판은 이런 것이다. 신과학운동이 비록 과학사상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이 땅에 심어 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카프라와 프리고진이 내어 놓은 과학사상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 즉 카프라는 과학이 발견한 이론들의 정당성을 이미 존재하는 종교와 같은 사상에 끼워 맞추는 사상이었고, 프리고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 안에서 대화했고 사유한 인물이었다.

내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이용해 하나의 사상을 만드려는 시도에 모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도 어찌 보면 하나의 사상이고, 다윈의 <종의 기원>도 일종의 사상서다. 그러나 과학사상이란 과학의 발견을 종교나 이념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가 아니다. 과학사상이란 다윈이나 볼츠만, 슈뢰딩거와 모나드 혹은 자꼽처럼 과학이 펼쳐 놓은 문제들로부터 세계관을 구성하는 작업일 뿐이다. 그 세계관이 이미 종교와 이념에 닫혀 있다면 그것은 과학사상이 아닌 종교와 이념의 시녀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읽고 느꼈던 과학사상들은 그랬다. 나에겐 카프라와 같은 사이비 과학사상가들의 책은 대중적 인지도는 있을지언정 고전으로서는 별 가치 없는 그저 그런 책일 뿐이었다. 게다가 과학이라는 어찌 보면 보수적인 울타리로부터 종교나 이념으로 쉽게 일탈하는 행위는 신과학운동이 가져온 바와 같이 신비주의의 굴레에 빠질 위험이 매우 크다. 도올을 만났을 때 그가 카프라에 대해 까대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그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리라.

<복잡계 이론으로 본 생명과 깨달음의 구조>와 <생명조작에 대한 연기적 관점>이라는 두 논문은 이러한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1985년으로부터 단 한걸음도 발전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다. 만일 복잡계 이론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에 적용하려 한다면, 복잡계 이론을 기독교의 창조설에 적용하려 하는 시도에 대해서도 입을 닫아야 한다. 한 발 양보해서 복잡계 이론을 신과의 소통이라는 현상에 적용하려는 시도에라도 말이다.

여전히 이런 논문들이 불교계나 기독교계의 잡지들을 통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과학을 잘 알지도 못하는 종교인들이 주워 들은 과학지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종교를 정당화하는 행위와, 과학을 전공으로 하는 과학자가 과학지식을 종교에 끼워 맞추려는 행위는 다르다. 과학자의 종교는 과학이다. 도올은 내게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비웃으면서 “과학자에게 종교는 플라스크다”라 일갈해 주었다.

아무리 생명의 가치가 소중하다 해도, 그것을 불교의 연기론이나 돈오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과학자가 아니다. 과학자의 탈을 쓴 종교인이다. 과학자는 과학에서 생명의 가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진정한 과학사상일 것이라 믿는다.

봉한관을 발견했다고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물리학자 소광섭 교수도 김용준 교수나 장회익 교수와 함께 연구하던 시절에 그가 이렇게까지 타락하리라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전한 과학적 세계관으로 그를 강도 높게 비판한 인물들이 없었고, 철학자들은 항상 그를 느슨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소광섭 교수는 거의 비상식적인 인물로 남아 버렸다. 나는 우희종 교수가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생물학을 불교에 귀의시켜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은 비록 사회활동에서는 정의를 획득할지라도 과학자로서 과학을 욕보이는 행위다. 황우석 교수 사건과 광우병 사건 모두에서 우희종 교수에게 권위를 실어주었던 것이 과학자로서의 자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과학자가 과학자로서의 권위를 종교에 넘겨주게 되면 과학자의 사회참여는 의미없다는게 내 철학이고 신념이다. 결국 과학자는 과학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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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우희종 교수의 신비주의

  1. 핑백: zagni's me2DAY
  2. 과학, 종교, 자연…
    어디부터가 과학이고 어디부터가 철학인지 그렇게 경계가 명확하게 나누어 질수 있을까요? 불교의 핵심은 ‘연기’ 입니다. 관계론이죠.

    불교를 신비주의라고 생각하시는것 같은데 불교에 대해 잘 아시는지요.
    사실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범위에 말씀 드린다면 부처님을 한 인간으로 대면해서 그 일생을 들여다 보면 신비주의라고 할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모든것이 신비주의라고 하면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요.

    님의 말씀처럼 과학자는 과학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과학이 필요한 부분에서 과학계가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3. 저도 비슷한 우려를 하고있지만, 그럼에도 어느정도 마음이 놓이는 것은 우교수 스스로가 ‘단지 과학적 사실만을 말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다.’라는 취지로 얘기한 부분에서였습니다. 현황과 조심스런 전망만을 다루겠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제가 보기엔 그정도의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신비주의’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물론 저라면 펼쳐도 안 볼 논문이긴 합니다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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