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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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가치에 중립적일 수 없다

나는
항상 내게 묻는다. 현실에 초연해 지는 것이 과연 성공적인 대안일 수 있는지 내게 또 묻고 또 묻는다. 나에게 현실에
초연해진다는 것은 일종의 자괴감이고, 그것은 내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나 가질 수 있고, 또 그제서야 가지고 싶은 그런
마음가짐이다. 나의 눈앞에서 나의 가치관이 폭격당할 때 내가 초연해질 수 없는 것은 살고자 하는 나의 생존본능이다. 그때 내가 초연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나의 가치관이 변화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어느 누가 오랜 시간을 싸워온 자신의 행동에 대해
‘무덤덤’해 진다는 것도 그러한 가치관의 변화일 것이다.


재생산 가능성과 양적 신뢰를 바탕으로 학문적 뼈대를 형성한 과학에서조차 가치관은 진하게 잔재를 드리우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체계보다 가치체계에 더욱 민감한 두뇌를 가진 종의 한계다. 무어의 ‘자연주의적 오류’가 스스로 오류인 것은 이러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망각한채 전개된 그의 논리학적 착각에 있다. 그것은 과학철학자들이 발견의 논리와 정당화의 논리를 구분해 다루었던 그 시대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전통이다. 논리 실증주의는 폭파되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승리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어가 규정한 ‘오류’ 때문에 사실로부터 가치를 끌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가치를 끌어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 단순한 상식이 인정되기 위해 과학은 엄청난 욕을 먹으며 난도질 당했다.

언론이 프레임을 형성한다는 것 또한 이러한 상식으로부터 자연스레 도출되는 귀결이다. 측정량에 의해 강하게 제한을 받는 과학의 이론과는 달리, 언론엔 그러한 제한장치가 느슨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이 두가지 인간의 활동에 차이를 부여한다. 과학은 강력한 제한장치를 지닌 활동이고, 언론은 느슨한 제한장치를 지닌 활동이다. 언론에 존재하는 제한장치란 다름 아닌 ‘사실’에 대한 ‘정보’이고, 이를 ‘정보의 왜곡 방지’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양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의 측정량(정보)과는 다르게 현실세계의 사실(정보)이 대부분 ‘질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 있다. 건방진 표현이겠지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학문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프레임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과학에서조차 그러한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감히 위의 사실을 인정할 때 학문이 가진 다양성이 확보된다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아거씨의 아래와 같은 발언은 상식적이며 적합한 것이다.

지켜지지도 않을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언론의 신화를 흉내낸다고 하면 그것은 블로그가 아닐 것이다. 의견을 내는 블로거라면
“이쪽도 싫고 저쪽도 싫다. 모두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자포자기식, 혹은 현실도피식 반응들에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첨예한 이슈에
하나의 관점과 의견이라도 더해 줘야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블로거는 매직 대신에 자판을 두드리며 “인터넷 시대의 대자보”를
계속 붙여대는 “인지적 활동가(cognitive activist)”일 수도 있다. 그게 지속적이고 일관되며 소신있는 목소리라면
수구꼴통의 입장을 대변하건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건 모두 활동가이다.
<언론과 블로그의 차이: 기능론적 접근> by 아거


나의 무덤덤할 수 없음에 대하여

만일 블로그가 언론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또 다시 프레이밍하는 언론이라면, 그러한 관습은 언론으로부터 받은 유산일 것이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거씨의 말처럼, “결국 언론이 사람들의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어떤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cognition)에는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일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의 가치관이 변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논지에서 우리는 일관성을 찾아낼 수 있거나 혹은 일종의 진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KBS가 신뢰받는 매체가 된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과연 어떻게 변했는가.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 여건은 더 좋아졌는가. 인구와 경제,교육의 서울 집중 현상은 해소되었는가. 빈부의 격차는 해소되었는가. 선거때마다 한나라당만 죽어라고 찍는 영남 사람들은 과연 모두 보수주의자들이란 말인가. 대학은 더 경쟁력 있어졌는가. 민주화의 수혜자답게 대학생들은 더 지적으로 성숙해지고 명랑해졌는가. <무덤덤> by 아거


언론이 사람들의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사람들의 인식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아거씨의 회의에서 나는 과연 지난 10년의 언론이 사람들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간략한 평가라도 찾아보길 기대했다. 하지만 언론의 인지적 기능을 강조했던 과거의 글사회의 변화에 실패한 언론에 대한 실망을 다룬 최근의 글에서 나는 지독한 괴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아거씨의 지난 글에서 더욱 깊은 공감을 느낀다. 언론이 지난 10년간 무엇인가를 했다면 그것은 깊은 인식의 변화일 것이다.

가끔 언론이 민중의 움직임에 하나의 지침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때는 있지만, 민중을 배후에서 조종하지는 못한다. 언론이 민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불행한 곳이다. 언론이 일종의 지침서 정도로 기능하는 사회는, 민중이 언론이라는 실체에 대해 ‘깊게 인식’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 곳은 결국 ‘언론이 일종의 프레임을 형성하는 활동’임을 민중이 깊게 인식한 후에야 등장할 수 있는 그러한 단계다.

지난 10년, 언론에 대한 민중의 깊은 각성은 그 자체로 귀한 역사적 성과다. 아거씨의 언론에 대한 큰 기대는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언론과 민중의 각성이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데 대한 애증적 분노다.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향수병도 이르다. 그렇다고 회의에 빠져버리는 것은 더더욱 이르다.

민중이 KBS의 사장을 지키자고 외칠때, YTN의 낙하산 인사를 저지하고자 할 때, 그리고 피디수첩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부당하다고 외칠때의 인식은 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인식은 점차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의 좋은 변화들은 언제나 느리게 진행된다. 이 땅의 악독한 변화들은 언제나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지난 10년 언론에 대해 그래도 어느 국가보다 빠르게 인식한 시민들은 그에 걸맞는 사회적 변화를 외칠 것이고, 그것은 천천히 거대한 행동으로 등장하리라고 본다.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소고기에 70만이 모였다는 것은, 지난 10년 ‘깊은 인식’에 도달한 시민들이 언제든 사회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무덤덤할 수 없는, 냉소나 비꼼이 아닌 진정한 이유다.

4 thoughts on “무덤덤함에 대하여

  1. 우재님도 의외로 낙천주의자..?
    아무래도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 민도(?)는 거의 나아지는 게 안 보여서 다들 회의적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가끔은 오로지 돈 밖에 모르는 것 같은 극단적 물신주의에 치가 떨려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하니까요..

  2. 핑백: GatorLog
  3. 의외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낙천주의자입니다. 욕을 잘하는 낙천주의자도 가능하다면 말이죠. ^^

  4. 정(正)이 한치 자랄때 마(魔)는 한자 자란다고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마가 항상 이기지는 않죠.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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