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유전자 변형 식품(GMO)에 대한 상식적 이해

서울대 자연과학지에 기고한 글을 올린다. 초파리에 미쳐 하루에 한시간도 채 시간이 나지 않고, 사이언스 타임즈에 기고하는 일주일에 단 한편뿐인 글로도 두뇌에 사용할 당분이 모자라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일도 크나큰 노동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현재 틈틈히 읽고 있는 초파리 유전학의 역사적 연원을 큰 틀에서 그려보는 글을 연재해보고 싶다. 두뇌 용적이 제공하는 한도 내에서 많은 글들을 써보고 싶지만, 현재로선 일주일에 한두편의 블로깅도 벅찬 듯 하다. 파리들은 게으른 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공부할 일이다. 초파리에 대해 쓰게 된다면 그것은 유전학을 몸으로 공부한 후이고 싶다.

각주들이 올라가지 않았다. 필요하신 분은 댓글 달아 주시기 바란다.


유전자 변형 식품(GMO)에 대한 상식적 이해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


거칠게 시작해도 좋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겠다. GMO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헛소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GMO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소리엔 종교적 혹은 이념적 광신이 녹아 있고, GMO에 찬성하는 자들의 목소리엔 자본주의적 천박함이 묻어 있거나 경솔함이 녹아 있다. 언제나 상황론은 규범윤리 앞에 무시당해왔고, 철저한 구체성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양비론이라는 딱지 속에 묻혀버렸다. 따라서 GMO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헛소리다. 시민단체와 기업이라는 두 이익단체가 벌이는 이념놀이에 대중은 속고 있다. 어딘가 그 중간쯤에 해답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해답은 그 어느 쪽의 이익과도 무관한, 동시에 과학적 지식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장의 사람들에게서 구해져야 한다.

 

GMO를 대하는 태도는 몇 가지로 구분된다.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해서 그 어느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나는 그 구분을 몇몇 과학자들의 견해와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의 견해를 이용해 제시할 것이다. GMO를 만들어 판매하는 측의 입장은 제시하지 않겠다. 이익을 위해 공공을 고려하지 않는 천박한 자본의 입장이야 들어볼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중적 과학자 도킨스의 견해로부터 시작하자.

 

도킨스와 찰스 황태자: 사회를 모르는 과학, 과학을 배제한 이념

 

영국의 찰스 황태자는 GMO 작물에 대해 이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의 발언은 GMO를 찬성하는 블레어 총리와의 대결구도로 이어졌는데 리쳐드 도킨스는 <찰스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과학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를 통해 이 논쟁에 참여했다. 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도킨스의 분노는 과학에서 등을 돌리는 찰스 황태자의 비과학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에 맞추어져 있다. 도킨스의 책을 열렬히 읽은 많은 독자들이 있을 것으로 안다. 필자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지만, 도킨스는 언제나 교묘하게 정치적 논점을 일탈하고 결국 모든 것을 과학이라는 절대적인 영역으로 몰고 가곤 한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GMO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언제나 농업은 ‘비자연적’이었으며 따라서 GMO가 비자연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모호한 논증뿐이다.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도킨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과학적인 사고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도킨스의 의견은 한결 같다. 비록 그가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의 한계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과학이라는 이성의 활동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며 문제를 단순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에게 부족한 것은, 대중 과학자라는 직함을 걸고도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단순한 시각을 고수하는 그의 경솔한 태도다. GMO와 찰스 황태자의 문제는 단순한 과학과 자연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다. 비록 종교적인 독단으로 GMO에 감정적으로 반대한 찰스 황태자의 태도가 거슬린다고 해도, GMO를 생산하는 거대기업에 대한 그의 입장까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거기에 있다. 문제는 GMO가 아니라 GMO를 둘러싼 기업과 농민들의 손익관계에 있다. 이는 감정과 이성, 자연과 비자연을 아무리 명쾌하고 장황하게 설명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도킨스는 그의 글에서 GMO를 판매하는 거대기업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몬산토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의 횡포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그것을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한 문제는 그가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솔함은 결국 이상한 대중을 양산해 낸다. GMO에 감정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비과학적이라고 경멸하는 자칭 쿨한 대중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명한 것은, 도킨스도 인정하듯이, 모든 것이 과학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과학은 문제 해결의 기반이 될 뿐,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게놈>의 저자 매트 리들리는 도킨스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여러 가지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들을 들어 GMO에 찬성하는 이들의 윤리적인 기반이 이를 반대하는 이들보다 덜하지 않다고 논증한다. 예를 들어 GMO를 사용하면서 농약의 사용이 줄어들었으니 GMO를 반대하며 유기농을 찬성하는 이들은 농약 사용의 증가를 허용하는 꼴이라는 식이다. 그의 구체적인 예들은 너무나 확실해 보여서 쉽게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옳은가? 역시 리들리도 몬산토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에 의한 횡포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는다. 보고 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필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자칭 과학의 대중화에 나선다는 이들이 가진 사회적 현상에 대한 무지다. 사회적 현상은 과학의 영역처럼 단순하지 않다. 단순하지 않은 현상을 다룰 때에는 신중해야 하며 대중이 과학자의 글만을 보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킨스와 리들리에게선 그러한 사려 깊음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선 직관과 감정으로 판단하는 대중에 대한 시니컬한 조소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GMO에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내의 시민단체들이 GMO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찰스 황태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종교적인 색체는 국내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조금 덜하다고 해도, 여전히 이들의 의견은 한결 같다. 제 아무리 다양한 어구로 글을 꾸민다 해도 간단한 삼단 논법으로 이들의 의견을 정리할 수 있다.

 

GMO는 위험하다.

위험한 GMO를 만드는 것은 과학기술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GMO는 위험한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다. 그저 GMO는 위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불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이유와 같다. 이처럼 위험할 수도 있는 GMO를 만드는 것은 과학기술이다. 두 번째 전제는 수정된 첫 번째 전제를 고려한다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제들로부터 과학기술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뒤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이들의 결론을 모조리 틀렸다고 논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과학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적을 잘못 설정했다. 문제는 과학기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에 있다. 만약 이들이 이처럼 편협한 관점을 확장시켜 결국 과학기술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언제나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 될 것이다. 과학의 민주화를 바라는 국내 시민단체들의 문제는 단순히 이들이 과학에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것만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 속에 과학자들이 없고, 따라서 과학이 없고, 심지어는 종교와도 같은 이념적 종속에 의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이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국외의 과학자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르원틴: 과학자의 사회적 이해

 

2001년 뉴욕타임즈에 실린 르원틴의 서평은 막스 페루츠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에 의한 논쟁을 유발했다. 르원틴은 도킨스와 리들리가 보지 못한 것, GMO의 반대자들이 잘못 설정한 적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 그것은 GMO를 파는 거대기업들의 악독한 전략이다. 도킨스와 리들리는 GMO를 이용한 농업으로 식량난이 해소될 수 있고, GMO를 이용하는 것이 보다 윤리적인 우위에 서 있다고 믿는다. 상황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들의 말이 옳다. GMO는 농지의 면적을 줄여 환경을 보호하고, 생산량을 늘려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 의해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참담하게 바뀐다. 라운드업 제초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예다. 라운드업 제초제를 사용하는 농민들은 라운드업에 저항성이 있는 농작물만을 사용해야 한다. 몬산토는 이 두 가지 상품을 모두 팔아 이익을 챙긴다. 만약 농민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면 언제나 가능성으로 머물러 있는 환경 유해성의 문제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농민들에게도, 기아에 허덕이는 제3세계의 국민들에게도 참담했다. 르원틴의 말처럼 결국 GMO는 식량난의 해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몬산토라는 기업의 이익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 이 비참한 현실 앞에서는 안이한 낙관주의는 발 딛을 틈이 없다. 결국 과학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몬산토는 분명히 나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기업은 이익만을 생각하는 괴물과 같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들의 정당한 존재 이유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상식도 있다. 기업은 사회로부터 걷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아니 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기술을 지원하는 과학자들의 작은 바람,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인류 평화에의 바람이라도 들어주는 척은 해야 한다. 몬산토의 행보는 그렇지 못했다. 몬산토만이 아니다. 거대제약회사들이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는 약들은 말라리아처럼 제3세계의 국민들이 시름 앓고 있는 질병들이 아니다. 그들은 알츠하이머나 암과 같은 선진국형 질병에 투자한다.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면서 어쩔 수 없이 증가하는 암이나 퇴행성 신경질환은 인류가 안고 가야만 하는 질병들이다. 암으로부터의 해방은 요원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암에 투자하는 비용으로 수백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상식은 그러한 연구를 지원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만 르원틴의 지적처럼 GMO는 몬산토에게만 이익을 안겨준다. GMO를 개발하면서 연구비를 받고, 논문을 썼던 과학자들의 소박한 바람, 기아와 식량난의 해결, 열대림의 보존과 같은 것들은 몬산토라는 거대기업이 연구와 판매의 중간에 자리 잡음으로서 사라진다. 르원틴은 그것을 봤고, 그런 점에서 도킨스나 리들리와 다르다. 물론 이러한 몬산토에 대한 적대감이 GMO자체에 대한 반대로 이어지는 것이 르원틴의 단점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는 사려 깊은 과학자다. 그는 과학에 대한 고려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깊은 사고를 가진 그런 대중적 과학자인 것이다.

 

굴드: 과학과 사회의 만남

 

국내의 독자들이 적어도 도킨스나 굴드의 논쟁에 대해서는 친숙하다는 점을 고려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르원틴은 굴드와 같은 진영에 서 있는 인물이다. 보다 세밀하게 분류하자면 르원틴은 굴드보다 좀 더 이념 편향적인 과학자다. 르원틴으로부터 약간의 이념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는 굴드의 입장을 얻는다. 굴드의 입장은 간단하다. 나는 굴드의 말 속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이 있으리라 믿는다. 굴드는 GMO 연구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GMO를 사용하게된 목적과 결과 사이의 불균형에 초점을 맞춘다. 농민을 위해 개발된 GMO가 몬산토라는 거대기업에 의해 오히려 농민들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고쳐야 할 것은 GMO가 아니다. 우리가 혼내줘야 하는 것은 몬산토라는 악덕기업이다. 최소한의 상식도 지키지 않고 제3세계의 농민들을 착취하는 괴물이다. 굴드는 비타민A를 넣은 쌀을 만들어 매년 수십만의 아시아 어린이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려운 결론인가? 아니다. 굴드가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인가? 아니다. 오히려 대멸종과 단속평형을 연구한 고생물학자로서 굴드의 환경에 대한 이해는 국내의 시민단체들의 그것보다 깊다. 문제는 굴드에 대한 해석에 있다.

 

흥미롭게도 굴드의 책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과학의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이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과학자들에게도 과학의 민주화란 낯선 용어다. 필자는 여전히 과학의 민주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언제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좀 더 대중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상아탑으로부터 나와 대중들에게 과학을 알리라는 데에 필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문제는 과학자들의 상황이지만 언제 한번이라도 과학이 과학답지 못했던 땅에서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는 없는 듯하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연구에 대해 과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반대로 사회도 연구에 대해 과학적인 책임을 질 준비는 되어 있는가?

 

적어도 시민단체는 그러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굴드를 번역하고 있는 과학시민단체들의 견해는 굴드의 그것과 다르다. 굴드는 적어도 과학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지식인이지만, 우리네 시민단체들은 그렇지 못하다. 굴드가 GMO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과학자로서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는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까지 겸비했던 지식인이었다. 그가 설정했던 적은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이 목표했던 바가 누군가에 의해 변질된다는 것, 그리고 그 배후에 놓인 자본이라는 존재였다. 결국 GMO에 대한 문제는 과학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GMO에 대한 문제가 과학을 배제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에 답이 놓여 있다.

 

브레너: 상황윤리적 고려

 

우리가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GMO를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킨스를 넘어 시민단체와 르원틴 그리고 굴드를 향해 온 우리의 여정은 불굴의 과학자 시드니 브레너에서 끝난다.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언변의 달인 브레너는 분자생물학자들 중 가장 위트가 넘치는 노과학자다. 아마도 분자생물학이라는 이 척박한 분야에서 다시금 시드니 브레너와 같은 달변이 나올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견해를 엿들어야 한다. GMO와 생명공학이라는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과학자 일군은, 도킨스와 같은 진화학자도, 굴드와 같은 고생물학자도 아닌 브레너나 필자와 같은 분자생물학자들이기 때문이다. 브레너는 자신이 GMO를 함유한 식품을 판다면, 단순히 GMO라고 표시하는 것 뿐 아니라 세계의 기아를 구제하는 데에 이윤을 되돌리겠다는 어구를 넣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위트를 단순히 과학자의 순진무구한 발상이라 여겨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그로부터 건질 중요한 해답은 그가 제기하는 다음 의문으로부터 나온다.

 

브레너의 말처럼 과학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윤리학의 부재는 우리를 아주 웃기는 상항에 처하게 만들었다.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GMO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국가들까지도 GMO 식품을 먹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유럽과 같이 잘 사는 나라들이 GMO를 굳이 먹지 않겠다는 데 딴죽을 걸 이유는 없다. 그들은 유기농을 먹으면서도 잘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기아로 인한 위험이 GMO로 인한 위험보다 큰 아프리카에서는 보다 값이 싼 GMO 식품으로 수십만의 인명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GMO를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도대체 언제 GMO를 먹어야 하고, 누가 그것을 먹어야 하며, 또 누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들이다. 질문은 구체적일 때 빛이 난다. GMO를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배부른 논쟁이다. 우리가 진정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된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상황에 맞는 사용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브레너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우리는 GMO라는 괴물에 눈멀었다. 그렇게 눈먼 우리는 GMO가 유해한가 무해한가라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수십 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하는 것은 GMO의 유해성이나 무해성이 아니다. 그 논쟁에 결론이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우리는 GMO를 언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와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생산적인 논쟁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어떤 방향이다.

 

필자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만일 대부분의 국민들이 GMO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먹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굳이 GMO를 수입해 먹을 이유는 없다. 우리가 유럽처럼 잘 사는 나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국민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과학자가 나서 국민들의 무지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선택은 과학자의 지식보다 위에 있다. 그것이 광우병 사태의 본질이며 GMO 역시 그렇게 해결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GMO에 대한 과학적이며 사회적인 이해다. 이러한 이해는 그 어떤 이념과 독단으로부터 자유롭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 모든 선이해가 제공된 후 내려지는 국민들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필자가 광우병이라는 대중의 상상보다 위험하지 않은 질병에 대해 보여준 국민들의 판단을 존중하는 이유다.

  1.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반대할 대상의 명확하고 적절한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기실 같은 현상을 두고 어떻게 사고의 확장을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논리지만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해내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GMO나 광우병 논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수 있겠지요.

    다른 어떤 논란보다도 GMO의 경우에는 그 기술을 이용하는 자본의 속성에 대한 고찰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고 주의 깊어야 한다는…생각입니다.

    덧 : 그런데 늘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 개인적으론 해당 사항도 있고 – 어떤 사안에 대한 어리석은,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주장에 반대 견해를 밝히기 위해 그 사안에만 집중하는 것을 말씀 드린 사고의 확장의 폭넓은 시각으로 보면 분명 빠뜨리는 부분도 있고 어떨땐 잘못된 결론에 이를수도 있습니다. (의도컨 의도치 않건 말이죠..)
    대상에 대한 반론에 집중하여 더 넓은 것을 보지 못해 자가당착에 빠진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사고의 확장으로 더 올바른, 더 나은 결론을 도출시키지 못했다고 비난 받아야 하는가 에 대한 제 생각은 회의적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학문적으론 비평,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죠….

  2. 또 생각해보건데…

    특히나 우재님이 도킨스일파를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건 이미 인지하고 있는데 도킨스 뿐 아니라 대중에게 다가서는 모든 학자들을 같은 부류로 생각해야 하나를 떠나서….
    칼 세이건이나 도킨스나 그 방면에서 “학술적” 으로 큰 업적을 쌓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과학의 대중화 같은 통속적인 얘기를 떠나서 상대 진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리하여 양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보기 드문 촉매 역활을 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지..
    (이것을 분리하여 진영이라고 언급할수 있다면 말이죠…)

    물론 학술적으론 그들은 인기와 영광에만 매달리고 있는 쇼맨쉽의 글쟁이들일뿐이라고 치부할수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자연과학도도 아니고 공학도이며 졸업하고 나서 학술적으로 더 깊이 공부하거나 그 방면과 연관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계신 분들의 의견을 꼭 들어보고 싶은 바램이 있었는데 가끔 인연이 생겨서 여줘보면 대부분 부정적이시더군요.

    사회적인 이해와 접근의 증진으로 인해 학문적인 환경이 개선되는 경우 (쉽게 말해 돈이 들어오는 경우)도 그런 글쟁이들이 이뤄낸 성과이고 차라리 필요에 의해 – 자본의 필요 – 에 의한 환경의 개선보다는 인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속적인 관시의 유도로 인해 과학 인구가 유입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을테고 어떻든간에 사회가 학문에 관심을 갖는다면 나쁜일보단 좋은일이 더 많겠죠.

    엣지재단에 대한 적개심은 내심 공감은 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을 종량적으로 저울질하여 어느 한쪽에 화답하는건 조금 경솔하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 제 의견이 맞다고 주중하려는게 아니라 학문과 동떨어진 평범한 사람으로써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학문하는 분들께 여줘보고 싶은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내심 상당히 궁금합니다…

  3. 본문에도 나오지만 김우재님께서 도킨스의 태도에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시는건 그의 상황인식이 지나치게 독선적이면서 사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분명한 정치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한 제스쳐로 이를 거세하려고 한다는 점 때문이겠지요. 과학자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도 단순한 하나의 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 점에서 도킨스의 방식은 저도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4. 흠…방법론적인 호불호인가요?
    물론 접근에 대한 방법론의 선택이 어떨땐 본말을 전도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무시할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그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에 의아심을 가져서 질문해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소정의 목적을 상정할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식의 어거지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 있지 않나 싶고…그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 그에 대한 실보단 득이 더 크지 않나 싶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여쭙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답변해주신 새매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5. 많이 배우고 갑니다. GMO의 유해성, 무해성에 결론은 없다고 하셨는데 이에 관련해 본문처럼 쓰셨던 글이 있을까요? 추천할만한 글이나 책도 좋으니 부탁드립니다. 글 하나로 시야가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6. 생물학자라면 GMO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인 이야기를 양쪽에서 지금 들어난 팩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글쎄. 이런글은 진중권씨가 쓰는게 더 맞다고 보이네요.

    뭐랄까 글을 읽기는 읽었는데 알맹이가 없다고 해야 되나.

    찬성도 반대도 병맛이다? 그럼 어떻다는거냐?

    찬성이던 반대도 무조건 찬성 무조건 반대하는 측은 없습니다..

    뭐 당연하는것이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팩트지..

    무조건 찬성반대하지 말자는 이념적 구호?는 그냥 매아리 없는 외침이죠.

    이글은 그런면에서 실망스럽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