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신이 되어버린 라깡

한국 정치의 특수성에 무지한 지젝을 모셔 위대한 지젝에게 세계가 나아갈 길을 묻는다. 한국 지성계의 식민지성은 해방 이후의 시대적 맥락속에서 주체적인 역량을 지니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갈 수록 심각해질 뿐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학자들은 학문의 종속성에 관한 연구를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우습게도 학문 종속성 연구는 학문종속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자들만을 양산했을 뿐, 실제로 학문 종속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실천적 맥락에서는 불임에 가까운 결과를 낳는다.

무엇이 어긋난 것인가? 김영건의 ‘프랑스 철학’이라는 글을 읽는다.

사실 탈경계, 종단과 횡단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우리의 작업들을 보면 영화와 문학, 영화와 정치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시도하기 보다는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는 들뢰즈의 이론을 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글을 보면 마치 들뢰즈가 하나님이며 왕이고, 라캉이 왕이며 하나님이다. 때로 지젝은 황태자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프랑스 철학을 수입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판단은 외국 이론의 수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불순하다는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편적인 자연의 원리들을 발견하려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문화적 상대성 혹은 특수성에 크게 의존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해당 사회의 역사와 가치관을 체로 지니지 못한다면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고야 만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이론은 전세계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선언함이 옳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지역성을 극복한 보편적 이론이 가능한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을 추종하는 이들은 이러한 증명과정 자체를 거부하는 학풍에 만족하고 있다. 논증을 통한 엄밀함이란 이들에게는 무언가 잘못된 억압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세계 보편적인 어떤 문화이론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질문조차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믿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건이 라캉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일테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은 공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읽을거리로 가득하다. 확신컨대, 대서양 어느 쪽에서든 이 책을 펼쳐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데리다 본인의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루이비통이 된 푸코?의 황당한 데리다 독해>라고 단언해 버리는, 데리다를 넘어서는 엄청난 학자가 이 땅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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