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클럽과 한국의 과학문화

대한민국에 과학이 정착하는 역사는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역사처럼 험난하고 무질서하다. 1987년 이후에야 비로서 민주주의의 희미한 여명을 맞이한 이 땅의 역사를 두고 볼때, 과학이 민주주의보다 빠른 속도로 이 땅에 정착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세력이라는 뚜렷한 구심점을 가지고 발전해왔다. 험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회지도세력으로 인정받으며 대중을 이끌 수 있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은 그렇지 못했다. 대한민국에 과학을 정착시킨 선구자들은 사회지도층이 아니었다. 표면상으로 그들은 대접받았지만, 그들에겐 정치적인 힘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권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어설픈 계급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중인계급에 머물러 있다. 그 뿌리를 추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땅의 과학기술은 그 역사가 매우 짧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의 과학기술자들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의 제도적 정착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최한기는 몰락한 양반계층이었고 과학자라기보다는 사상가에 가까웠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지만, 의사로서 또 근대과학을 최초로 접한 인물로서 이 땅의 과학기술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원철, 화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긴 이태규, 최초의 동물학 박사였지만 결국 대한민국 땅을 밟지도 못하고 작가로 타계한 이의경(이미륵), 월북한 과학자 리승기 등이 있었지만 이들이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이들 중 미국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노벨상에 근접했던 이태규만이 박정희 시대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여러 과학자들의 스승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나는 과학자이다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대한화학회 (양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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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땅의 과학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그 역사가 지나치게 과거로 소급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 혹은 근대화에 대한 사대주의적 추종이라고 생각한다. 단정적으로 말해서, 과학자라는 직업, 과학이라는 문화적 활동, 연구실과 대학을 비롯한 제도적 정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땅에 과학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정도라고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문화적 활동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 연원은 박정희 시대로 소급될 수 있다. 그만큼 이 땅의 과학사는 그 역사가 짧다.

과학사를 말할 때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것은 과학과 기술을 혼용하는 일이다. 김영식 교수나 박성래 교수의 과학사 연구는 그 방대함과 성실함에서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장영실을 과학자로 보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 과학이란 17세기 이후에서야 유럽에서 시작된 특이한 지식활동이고, 둘째, 서구에서조차 과학이 조직화되고 정착되는 데에는 19세기까지의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셋째, 장영실, 홍대용, 최한기 등을 과학자로 본다고 해도 이들의 전통이 일제시대를 거치며 처절하게 단절되었다는 냉정한 사실 때문이다.

결국 이 땅의 과학사, 넓게보아 과학기술사는 해방 이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술 가능한 대상을 찾게 된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유럽중심의 역사가들이 분탕질해놓은 서양과학사를 답습하는 일이 과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아니듯, 우리의 과학사도 그 전통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숭고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한 학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따위의 자연철학은 전세계 문명권 어디에나 존재했다. 과학은 유럽이라는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독특한 지리적 조건에서 단 한번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길게 잡아야 17세기 뉴턴과 케플러의 등장 이후일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조셉 니담의 <중국과학기술사> 연구는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니덤의 연구를 계승하고 있는 국내 과학사가들도 비판받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굳이 가져다 붙혀야 한다면, 우리는 그 범위를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과학이 하나의 제도적 문화적 실체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시대의 일이다.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창비신서 159)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영식 외 (창작과비평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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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과학 100년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박성래 (현암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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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클럽의 탄생과 경제논리에 종속된 과학의 탄생

1960년대 이전에도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자들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초과학의 육성과 과학교육을 주장하는 구세대 세력들이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과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당시의 대학, 특히 이공계 대학의 환경은 열악했고 당시의 과학기술자들은 연구자라기보다는 일종의 교육자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기초과학의 육성이라는 화두는 그 진정성과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의 요청에 묻혀버린다. 이처럼 당시의 과학기술계의 논의에 반대하며 급부상한 세력이 미국유학파 출신의 일군의 과학기술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교육보다 연구를 강조하며 전면에 등장했는데, 스스로를 ‘파이클럽’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과학기술처 장관이자 KIST의 초대 소장인 최형섭을 중심으로 결성된 파이클럽은 심문택, 김순경, 김법린, 한상준 등의 화학, 물리화학, 고분자화학 및 금속공학 등의 전공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구를 중시하던 이들의 요구와, 개발을 중시하던 박정희의 논리는 절충점을 찾기 쉬웠다. 최홍섭을 중심으로 KIST가 설립되었고, 이후 최형섭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무려 12년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을 수행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기에 이른다.

파이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이들은 블룸즈베리 그룹이나, 비엔나 써클, 만월회와 같은 학술모임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학기술을 제도화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시대적 요청에 의해 과학보다는 기술이 대접받을 수 밖에 없었다. 과학이라는 이름은 경제논리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상징으로만 기능했다. 이때부터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이 항상 붙어다니기 시작했고, 과학과 기술은 한데 엉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결국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논리였다. 과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그리고 시대가 그러했다. 우리는 배고팠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기술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렇게 과학과 기술은 분리되지 않는 여정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계가 흘러왔다. 일제시대에 과학교육을 받고 과학대중화 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단절되었고, 이후 경제개발의 논리 속에 과학은 기술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진지하게 논의될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과학을 진지하게 논의해볼 시점에 이르러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된 거대과학에 의해 더이상 순수한 과학문화를 추구할 명분을 가질 수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과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수입했던 곳은 일본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제국주의라는 미명하에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에 과학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마냥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역사가 그러했음을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그러한 시도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볼 뿐이다. 우리는 늦었고, 불운했고, 조건이 갖추어진 지금에 와서는 이 어설픈 과학제도에 만족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과학을 논하고자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



  • 부언1: 이회창 선진당 총재가 이태규 박사의 조카라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의 과학관을 한번 파고들어볼 여지가 있다.
  • 부언2: 고등과학원의 설립이 1996년이었다는 점이 우리의 과학문화가 얼마나 늦게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나는 이 땅의 고등과학원이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 부언3: 파이클럽의 주축이 된 이들이 대부분 물리화학을 기반으로 하는 전공자들이었다는 점과 과학기술이 경제논리속으로 종속되어과는 과정이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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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oughts on “파이클럽과 한국의 과학문화

  1. 좋은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이원경(이미륵)은 이의경(李儀景, 이미륵)이 맞는것 같습니다.

  2. 허걱. 우재님의 지식의 넓이에 그저 입이 딱 벌어질 지경입니다. 저는 단치히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독일 친구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3. 단치히의 책이 워낙 수학무능아인 제게 감동이 있었길래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갑습니다. 자주 들러서 조언주세요 ^^

  4. 이 글 올라온 시간이 참 절묘함. 그 시간에, 나는 [인물과기술의역사] 마지막 시간에 교수님이 과학기술 선구자로서의 이태규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음. 이태규와 이승기 이야기가 있었음.

    두 사람이 일제 덕분에 유학가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지배가 전면적으로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 3.1 독립운동 이후 문화통치시기였다는 점을 볼 때 동포들의 피를 먹고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간 역사적 인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봄.

    //
    아아 시간차가 있군요 16시간 차이

  5. 글 남기는 법을 몰라서 여기에 남깁니다.
    총학생회 탄핵안 가결되었습니다.
    학생총회를 거쳐 통과되면 탄핵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조갑제 닷컴이나 프론티어 타임즈 등에 고의로 성명서를 메일로 보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교수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한사람의 교수가 총학생회를 쥐고 좌지우지 하면서 종교에 자신의 정치색을 입히는게 이 사건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인것 같습니다.

    한동대에서는 이해와 배려, 사랑을 그 기본정신으로 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들로 인하여 학교내부에 많은 갈등이 생겨나고있습니다.
    하지만 자정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더욱더 발전해 나갈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큰 의미와 학생사회의 배움의 장이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6. 최형섭 박사님..제가 일하던 연구소 고문으로 계셔서
    오며 가며 가끔씩 뵙곤 했었는데 돌아가셨군요..

    자연과학은 합리적 사회에서나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한국은 여러모로 급격한 변화가 필요했던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라도 고민해서 바꿔가야겠지요…..

  8. 좋은 글 감사합니다.
    3~4년전 장대익 교수님의 ‘과학기술과 철학’수업 들을 때 마지막 리포트 쓰며
    ‘한국에서의 과학기술은 경제발전 논리로만 평가되고 있다’라고 처음 생각했는데
    요즘에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깨닫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고,
    하시는 연구도 대박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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