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사태부터 세월호 참사까지, 음모론이라는 딱지는 권력자들에게서 권력이 없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실제로 권력을 지닌 자들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사용해 벌였던 음모론은 음모론이라는 딱지를 부여받지 못했으며, 합리적 의심으로 포장되었다. 음모론을 대할 때, 권력이 어느 편에 있는지 재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각종 음모론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가 확증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을 둘러싼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합리적인 의심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마도 과학자로 권력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한다. 나는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고, 통제불가능한 부당함과 싸우는 자들의 저항도구로서의 음모론을 건강한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도 바로 그런 음모론과 같은 의심에서 시작해, 합당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쌓여온 과정적 합리성의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에 관한 국내의 몇몇 글들을 읽었다. 소위 논객들의 글은 그저 그런 이야기(just so story)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우X훈, 박X일, 김X호 등의 네임드들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전상진의 담담한 논문에서 참신한 시각과 훌륭한 방법론적 연구를 발견했다. 그의 논문에서 중요한 구절들을 옮겨 둔다. 김어준은 음모론이라는 딱지에 분노한다고 한다. 그의 합리적 의심들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상진의 말처럼 자신들의 은어로 라깡체의 언어만을 구하사는 비판이론의 먹물들이 곤경에 처한 이때, 김어준의 아슬아슬한 음모론이 왜 인기를 얻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히려 김어준의 편에 서서, 그의 경계에 선 이론에 과학의 합리적 의심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싸울 것이다. 인문병신체의 레토릭 속에서 휘적거리는 먹물들에게선 새로운 대안세력도 정권의 창출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이 땅의 구조적 맥락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편집증 스타일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는 단연 음모론적 사유다. 음모, 혹은 공모(conspire)는 ‘다수의 사람들이나 집단, 혹은 조직이 비밀스럽게 계획하는 행위’를 말한다. “독특한 해석틀(interpretive framework; Fenster, 1999)”인 음모론적 사유는 모든 역사적이며 사회적 행위와 사실들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조직의 공모의 결과 로 해석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음모적 사유는 편집증과 통한다. ‘극단적인 의심과 불신’인 편집증(Kramer, 1998)은 일견 극단적 음모주의다. 물론 편집증의 범위는 음모적 사유보다 넓다. 편집증에서 극단적인 의심과 불신의 원인이 거의 무한한 범위로 확장된다면, 음모적 사유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범위로 구체화한다. 즉 문제적 사안의 원인을 특정한 공모자(집단)로 ‘귀인(attribution)’한다. 이런 의미 에서 음모론적 사유를 편집증의 귀인이론적 구체화로 볼 수 있다. 이에 기반을 둔 인과추론과 레토릭은 때에 따라서 ‘책임전가’와 ‘책임회피’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두 사항이 중요하다. 호프스태터는 음모이론이 지닌 ‘민중주의적 잠재성’을 백안시했다(Fenster, 1999). 음모이론은 “현재적 정치질서 의 진실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민주주의 문화를 당대 문화의 곳곳에 유포하는 민중주의적인 표현양식”이다(xiii). 권력이론으로써 음모론은 “거의 모 든 사회적 삶의 측면들을 통제하는” “지배적인 개인, 집단, 혹은 연합세력의 권 력”(xiv)의 모습을 고발하여(그것의 실제여부는 중요치 않다) “불균등한 자원과 강제 력의 분배”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음모론은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주의적인 가능성”을 표현한다. 두 번째 비판은 현존 질서를 비판 없이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호프스태터가 “정치적 편집증(political paranoia)”을 문제 삼는 이유는 “다원주의적 합의의 외부에 존재하는”(Fenster, 1999: 3) 사람들의 잘못된 ‘심리적 에너지’가 전체 민주주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타자(the political Other)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정치질서의 외부로 밀려났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런 낙인이 찍혔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Husting & Orr, 2007). 다만 배제되고 축출된 그들의 존재가 사회의 위협이 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결국 호프스태 터는 민주주의 질서에 병리적 현상인 정치적 편집증이 “정상적인 지배적 주류사 회”(호프스태터, 1965: 20)를 위협한다는 사실만을 직시한다. 이는 현존 질서를 비판 없이 정당화하기 쉽다.
음모론적 사유의 창궐은 그것의 매력과 연결된다. 멜리(Melley, 2000: 8)는 이를 “설명되지 않는 사태, 매우 복잡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단순한 방식으로 제시”하여 “불확실성의 시대에 편안함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음모론적 사유는 복잡하 며 예측하기 힘든 현대사회를 해석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틀을 제공한 다. 또한 일종의 방어 기제로 사용된다. 열악한 상황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 여 나를 정당화할 수 있다(Haubl, 2005: 77). 물론 음모이론은 귀인이론의 기본적 귀인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를 답습한다(Clarke, 2002). 특정한 사태의 원인을 상황(맥락, 구조)이 아니라 개인(음모집단)에서 찾는 귀인오류는 음모론의 핵심 요소다.
요약하면, 전능하며(권력 적 특성: 조율), 내부적으로 결속된(조직적 특성) 이들 공모자는 사회의 전복(목적)을 배후에서 조종(작전 양식)한다. 이들의 정체(사악함, 반인륜성)를 폭로하여 책임을 묻는 것(희생양 만들기)은 궁극적으로 이들을 없애기 위한(문제해결) 과정이다. 이 연구는 어떤 주장이 위의 일곱 가지 특성을 지닐 경우에 이를 ‘음모론적 논변’으 로간주할것이다. 물론모든요소들이존재할수도있지만그렇지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의 요소들, 희생양 만들기(1)와 음모집단의 사악함(2), 작전 양식 (배후)(3), 그리고 종말론적 문제 해결 방안(4)은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1)과 (2)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근거를 마련해주며, 또한 기존에 낙인이 찍힌 음모집단과 연상 작용을 유발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2)는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돕는다. (3)은 주장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며(‘배후에서 조종하 기 때문에 그들의 개입 여부를 명백히 밝히기는 어렵다’) (4)는 반대세력에 대한 강압적인 대응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ref] 전상진. 2010. “한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paranoid Style)’? – A Paranoid Style in ‘Korean’ Politics?” 경제와사회: 152–82. [/ref] 전상진. 2010. “한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paranoid Style)’? – A Paranoid Style in ‘Korean’ Politics?” 경제와사회: 152–82
음모론자를 정신병자, 구체적으로는 편집병자로 보는 관점은 지배 체제-지식엘리트를 앞세운 경제, 정치, 언론 엘리트-의 견해다. 음로론을 사회과학적으로 최초이자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음모론자를 ‘증오에 휩싸인 편집병자’로 부른다.
나는 음모론이라는 사회현상을 개인들의 비정상적 성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는 주장에 반대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음모론의 ‘낙인’이 ‘합리적인 의심’이나 적절(적법)한 비판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둘째, 음모론이라는 ‘취약한 정치 이론’을 믿도록 강요하는 사회적 요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믿도록 만드는 사회적 요인의 윤곽은 이상과 같다.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음모론에 대한 믿음을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성향이나 문제로 보는 것은 가당치 않다…둘째, 음모론은 민주적이다. 음모론을 단지 ‘포위된 시민들의 최후의 도피처’로만 보는 것은 문제다…셋째, 책임 위기의 심각성이다.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 비난 문화는 지역과 계급을 가르지 않는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남을 비난한다. 음모론은 이를 특화한 장치다.
비난의 세계, 음모론의 세계를 끝장내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장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라도 구해야 한다. 이십대의 한 배우가 이렇게 말했다. “항상 의심의 눈을 가지는 것은 슬프지만 보이는 게 전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해야 현명한 사고를 할 수 있다.” 의심해야 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래야 한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 이것이 편집병과 음모론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비판의 태도이자 과업이기도 하다. 물론 비판은 자신마저 대상으로 하기에 편집병과 음모론은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 비판이론은 곤경에 처했다. 제 집단의 은어만을 구하사는 비판 공연자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이고, 제 곤경을 함께 해결하기보다 나름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공연장(공론장)에 오지도 않는다. 비판의 과제는 쌓이고, 그 도구는 녹슬었다. 음모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방보가 탐탁지 않으니, 그럴 밖에. [ref] 전상진. 2013. “어떻게 음모론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과사회 26(4): 281–95. [/ref] 전상진. 2013. “어떻게 음모론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과사회 26(4): 28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