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도 이미 독립적으로 조직화된 학문이라고 말할 요량이라면, 혹은 과학철학을 무시하느냐고 발끈하고 말 수준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완전히 정리된 생각도 아니고, 오늘 발견한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학자를 중심으로 평소 생각하던 화두를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연히 구글 스칼라에 배달된 글들을 확인하다, 내가 알림 설정을 해놓은 대부분의 학자들의 글이 공통적으로 인용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다.
Braillard, P.-A., & Malaterre, C. (2015). Explanation in Biology (Vol 11). Dordrecht: Springer Netherlands. doi:10.1007/978-94-017-9822-8
과학철학 혹은 생물학의 철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편집자부터 각 챕터의 저자들까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과학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자들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적어도 영미권 과학철학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책의 저자들은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도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를 쓴 미쉘 모랑쥬의 이름을 제외하곤 거의 들어본 적 조차 없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각 챕터들이 다루는 주제들이 매우 흥미롭다. 평소 분자생물학과 행동유전학을 넘나들면서 생물학의 철학이 진화생물학만을 중심으로 쓰여져 불만이 많고, 현장성이 결여되어 (특히 한국에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발견한 크레이버와 다든의 <메카니즘을 찾아서: 생명과학 분야들에서의 발견들>이라는 책 때문에 영미권과 유럽을 중심으로 생물학의 철학이 급속하게 변한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Craver, C. F., & Darden, L. (2013). In Search of Mechanisms: Discoveries Across the Life Scienc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쉽게 말하자면, 생물학의 철학은 생명과학의 주무대인 분자생물학, 암생물학, 시스템생물학, 유전체학, 생물정보학 등에 담긴 발견법, 정당화 등을 다루게 되었고, 다루는 분야가 물리학에서 멀어지면서 과학의 분과다양성이라는 화두도 떠오르게 된 것 같다. 그로 인해 크레이버와 다든의 저 책은 꽤나 논란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저 책은 분자생물학에 고유한 인과성이 존재하며, 그것이 메카니즘에 기초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이버와 다든의 주변을 돌며 수집한 논문들만 100여편을 훌쩍 넘으니, 저 분야는 과학철학에서 매우 핫한 분야임에 틀림 없다. 국내에선 이를 다룬 석사학위 논문 한 편이 홍성욱 교수의 지도로 출판된 게 전부다. 조은화. (2010). 생물학에서의 메커니즘과 인과적 설명. 서울대학교 대학원,
여하튼 책의 자세한 내용은 계속해서 공부해 볼 일이고, 위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유럽 혹은 영미의 이름 없는 대학 등에 재직하는 교수들이다. 특히 이 책의 주편집자인 Pierre-Alain Braillard 은 Independant Scholar, Peyregrand, Drulhe, France 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런 논문을 쓸 때까지는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가르친 것 같다. Braillard, P.-A. (2010). Systems biology and the mechanistic framework.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ife sciences, 43–62. 그렇다고 이 책을 무시하려는게 아니다. 이 책에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 중 한 명인 미쉘 모랑쥬가 ‘Is There an Explanation for … the Diversity of Explanations in Biological Studies?’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실었다.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물학의 최신 분야인 시스템생물학에서 인과와 메커니즘은 어떤 형식인지, 생명과학에서 수학적 설명방식은 메커니즘적 설명과는 어떤 관계인지 등, 과학철학이 다루지 않았던 최신의 성과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미권 과학철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생소한, 하지만 내공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 유럽 과학철학의 전통을 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영미권에서 소외된 주변부 과학철학자들의 외인구단 성격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이런 방식이 김경만 교수가 원하는 한국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글로벌 지식장으로의 진입에 하나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평소의 학술활동은 모국어로 주변의 학자들과 하고, 이렇게 가끔 심포지움을 통해 심화된 공부들을 영어로 내어놓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학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튜더 배투 Tudor M Baetu, 브라질 Universidade do Vale do Rio dos Sinos 의 교수라고 한다. 그의 프로필을 따라 가면 발견하겠지만, 이 학자는 얼마전까지 분자생물학자로 TRAIL이라는 단백질과 세포자살 Apoptosis를 연구했다. 그러던 학자가 왜 갑자기 생물학의 철학으로 뛰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통 한국에서도 연구 자체가 어려운 대학의 생물학 교수들이 과학철학이나 과학윤리, 과학교육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이 학자도 그런 경우인지, 아니면 모랑쥬처럼 뜻이 있어 방향을 선회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언제 한번 메일을 보내봐야겠다고 다짐할 뿐.
미쉘 모랑쥬와 튜너 배투, 그리고 위 책을 집필한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학자로 살다가 과학철학에 발을 들인 케이스다. 토마스 쿤도, 칼 포퍼도, 찰스 샌더스 퍼스도, 윌리암 제임스도, 존 듀이도, 비엔나 학단의 많은 철학자들도 모두 현장과학에 대한 경험을 가진 과학철학자들이었다. 물론 이후 과학철학은 과학으로부터 독립되 나가 그들만의 조직화된 학문세계를 차렸지만, 얼마전 ‘물리학자 또한 철학자‘이다라는 글에서 크라우스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과학 현장에 대한 합당한 상식 수준의 경험조차 없이 과학철학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나는 항상 한국의 학계에 던지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국 학계에서 화학과 과학사를 동시에 전공한 김영식 정도를 제외하곤 위와 같은 현장지를 지닌 과학철학자를 본 적이 없었고, 한국 과학철학계의 논의들은 서구이론을 따라가거나, 서구이론의 재탕이거나, 좋게 말하면 잘 정리된 요약, 심하면 표절, 가끔은 헛소리들로 가득해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과학철학 논문들 중에 독창적인 논문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 분야야말로 김경만이 비판하는 학자들로 가득할지 모르는 분야다.
한국과학철학계가 과학자들에게 좀 더 열린 방식으로 다가섰으면 한다. 한림원이나 서울대에서 과학철학자들에게 자리를 마련하듯이, 과학철학의 내부에도 과학자들이 치고 들어가 새로운 문화와 활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할 그런 장을 열 수 있다면, 한국 과학철학계에도 조금은 희망이 존재할 지 모른다. 물론 이건 과학철학을 제도화된 방식으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초파리 유전학자의 헛소리일뿐이니, 심각하게 다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비슷한 이야기들은 따로 여기저기 발표했고 또 정교하게 쓰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랑쥬 같은 학자를 한국에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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