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이 이처럼 큰 추모의 물결로 퍼진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가 지닌 인자한 성품과 유머와 더불어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속에서 그가 실천했던 것들이 현재의 추모인파를 낳았음에 분명하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군사독재의 시기와 민주화를 경험하며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을 위해,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향해 예수의 길을 걸었던 몇 안되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민중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민중은 한 위대한 인물이 걸은 길을 몸으로 느낀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러한 민중의 의식 속에서 실천이라는
화두로 깊이 각인된 그런 종교인이다. 그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하지는 못하는 이들일지라도 그의 삶이 대한민국의 발전에서
기념비적인 무엇이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학문적 배경: 카톨릭 사회론과 공의회
추기경의 선종 후 나는 추기경의 글들을 살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지식보다는 실천으로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의 학문적
깊이에 욕심을 낸다는 것은 무리임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그의 글들을 쫓아 걸었다. 일본 유학은 물론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을 거치며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했던 추기경의 사상적 행보가 그의 글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기대하며 추기경의 행적을 쫓았다. 실상
도올의 실망처럼 국내 불교계의 학승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국내 천주교에는 깊은 학문적 연원이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려진 바로 추기경은
일본 유학 당시 도쿄 상지대학의 철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2~3년여간 철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사제의
길에서 방황하며 극단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였다. 게다가 일본 유학 당시의 김추기경은 항일투쟁을 꿈꾸던 열정적인
젊은이였다고 하니 그는 이론적 지식인이기 보다는 행동가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 하다.
독일 유학 7년의 기간에도 그는 동포들을 돕는 실천으로 학업에 매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뮌스터 대학에서 요셉 회프너(Joseph
Höfner) 교수로부터 ‘그리스도 사회학‘[footnote]요제프 회프너 교수에 관한 인터넷의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한국어로 출판된 논문 <제4세계의 참상과 희망>이 사목 1976년 5월호(통권 제45호)에 실려 있고, 그의 주저로 보이는 <가톨릭 사회론>이 번역되어 있는 정도다. 국외의 자료들은 독일어로 된 논문들이라 접근이 불가능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카톨릭 사회론>을 일독하는 것도 김추기경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footnote]의 이론적 토대를 배운 추기경은 ‘한국의 가족제도’[footnote]언젠가 뜻 있는 이가 김수환 추기경의 미완성 논문을 출판한다면 좋은 배움이 될 듯 하다. 못난 이론가로 태어난 나는 추기경에게서 학자적 특징을 한번쯤 읽어내고 싶은 욕망에 몸서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footnote]라는 논문을 중간에 포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비록 미리보기로 훑어 볼 수 밖에 없지만, 제3세계의 비극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회프너 추기경의 가르침은 온전히 김추기경에게 전해진 듯 하다(회프너 추기경의 책 한권이 번역되어 있다. <카톨릭 사회론>).가톨릭 사회론 – 요셉 회프너 추기경 지음/서강대학교출판부 |
회프너 추기경의 영향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김수환 추기경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마도 추기경의 유학 당시 교황 바오로 2세의 주도로 5년간 지속되고 있던 바티칸 공의회의 회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추기경은 공의회(1962-1965)가 한창이던 1963년 무렵 귀국길에 오른다. 스스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
출처 :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 – 오마이뉴스“라고 밝힌 것처럼 당시 사후세계로부터 현실로,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조금씩 중심을 움직이던 카톨릭의 움직임은 현실 참여에 목맨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을 움직였던 듯 하다.
제2차 공의회를 통해 선포된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어구로 시작한다.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모여 성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머리말 중.
카톨릭은 이 시기를 거치며 일종의 르네상스, 즉 인본주의적 혁신을 경험한다. 이후 교황 바오로 2세는 1996년<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주제로한 세계 과학자회의 석상에서 진화론을 수용할 움직임마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footnote]심지어 다윈200주년을 기념하며 카톨릭은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902/h2009021203255522450.htm[/footnote].
2차 공의회는 카톨릭의 눈높이를 인간으로 끌어 내린 것 뿐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참여를 공식적으로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종교사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 시기부터 적어도 카톨릭은 현대세계의 가장 진보적인 종교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점차 세속화가 진행되는 유럽에 토대를 둔 종교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었는지에 관한 문제는 나의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능력을 넘어서는 주제다.
결론적으로 추기경은 이론가라기보다는 실천가의 성향을 타고 났던 것 같다. 개인적인 욕망은 그가 칸트보다는 마르크스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의 삶은 김구에 가깝다. 아직 국내에서 종교인으로부터 강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본 바 없는 나로서는 아쉽지만, 그의 실천은 학자적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다. 그냥 개인적 바람으로 그칠 일이자 투정일 뿐이다.
교회는 왜 사회참여를 하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은 천주교의 양대잡지인 <사목>과 <경향잡지>[footnote]고맙게도 경향잡지 전권은 인터넷으로 열람이 가능하다. 특히 지학순 주교의 글들 모두를 읽어 보는 것은 시대를 이해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된다.[/footnote]를 통해 많은 글들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글들은 기도문이거나 호소문이고,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나의 관심을 끌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중의 한 글, <49a3c9649abe7AD.hwp>는 그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부제로 ’70~80년대 군사 정권 하에서’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 이 글은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종교와 문화>라는 잡지에 1996년 게재된 글이다. 21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추기경의 다른 글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분명 이 글을 통해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암울했던 시기에 그가 민주화의 선봉에 서야만 했던 연유를 모두 풀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인터뷰나 많은 동영상을 통해 추기경의 입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복잡미묘했던 추기경의 고민을 읽을 수 있지만, 장문의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조금 더 체계적으로 추기경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글은 다음과 같은 조금은 과격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1961년 5·16 쿠테타부터 93년 2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30여년을 흔히 군사정권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시기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시대였다는 것을 물론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러나 이 시대에 오늘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있을 만큼 독재 정권의 압제가 격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빈곤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치러야만 했던 부득이한 희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속에 치른 희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막강한 권력에 의해 강요된 희생이었고, 많은 경우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이기까지 한 인권유린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국민의 참여 의욕은 감소하고, 특히 인권유린과 사회정의 부재는 너무나 많은 이의 삶을 고통 속에 좌절하게 하였고 권력형 부정 부패를 만연시켰다.
추기경의 눈에 비친 70~80년대는 당시 시대를 살아가던 민중의 시선과 겹쳤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정교의 분리를 헌법으로 지엄하게 구분짓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위대한 국가에서 종교의 정치참여는 지극히 위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헌법상의 정교분리와 고통받는 민중을 위한 사회참여라는 대립각 속에서 추기경의 첫 번째 딜레마가 시작된다.
첫 번째 역설: 종교의 정치참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언뜻 보기에 최상위법인 헌법이 정한 틀로 종교의 정치참여는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대한민국 나아가 이 땅의 역사는 종교와 정치가 단 한번도 분리된 바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온갖 종교가 드나들던 이면에는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고, 민중으로 숨어든 종교는 위정자들에 의해 수입된 종교적 장치가 퍼뜨린 부산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런 땅에서 대한민국 3대 종교 중의 하나인 천주교가 정치에 찬물을 끼얹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원칙을 말하자면 종교는 가장 개인적일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종교가 도덕을 말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물건너간 고대시대의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고, 역사는 개인화되지 않고 집단으로 결속된 모든 종교는 결국 타락한다고 말한다. 모든 제도화된 종교는 결국 타락하므로 정교분리는 일종의 안전장치라 생각해도 좋다. 문제는 그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결국 교황과 국왕이 서로 권력을 나눠갖기 위해 타협한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정교분리의 원칙이 교황과 국왕이라는 신권정치의 틀을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땅의 헌법에 버젓이 들어 앉아 있는 꼴도 웃기는 것이지만, 그러한 헌법 조항이 제헌국회에서 어떤 연유로 삽입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미디는 명백히 정교의 분리를 헌법으로 정한 마당에 일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대통령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는 시작부터 느슨한 원칙이었고 이 땅의 맥락과는 도무지 맞지도 않는 외국헌법 짜집기의 조악한 수준을 보여주는 흔적이거나 혹은 제헌국회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등의 종교적 쟁투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의 조치였을지 모른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 땅은 정교분리 따위가 있었던 적도 없고, 있어야 할 역사적 맥락도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조차 없었던 터전인 것이다.
하지만 추기경은 평생에 걸쳐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추기경은 당시 교회가 사회참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급기야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었고 11월 21일에는 소위유신헌법을 만들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장기 집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그 이전에도 이미 71년 국회에 강요, 협박하다시피 해서 통과시킨 비상보위법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유신으로써 절대 권력을 장하게 되었다. 74년 1월부터는 대통령 긴급 조치령의 발동으로써 힘의 통치, 공포 통치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상황은 무릎을 꿇고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꼿꼿이 서서 항거함으로써 퇴학, 퇴직 또는 구속으로 감옥살이와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삶과 죽음 중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권유린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는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소리가 대학에서, 언론계에서, 또는 노동계와 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때에도 위수령이 있고 학교가 여러 번 휴교 조치, 또는 학교 문을 닫게 되는 그런 사태까지도 자주 일어났다.
이때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대체로 전통을 존중하는 편이고 현실 정치에의 참여는 극히 제한된 예외의 경우 외에는 피하는 보수적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에 동참하게 되었다
시대가 사제를 불렀다는 뜻이다. 김수환 추기경을 개인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결국 서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종교란 사람의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겠는데, 그렇다면 정치 문제, 경제 문제에 종교가 관여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정교분리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직설적인 질문에 대해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원칙을 풀어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대통령께서 종교의 역할을 그렇게 보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신자들은 물론이요, 저와 같은 성직자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 각하께서 그렇게 보시는 것은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번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나 교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첫째로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뿐입니까? 종교나 교회는 그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해 줄 것을 바라고 있고 개개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도덕과 윤리로써 정화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사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 부패로 썩어가고 있는데도 저희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직무 유기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도 되어야 하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정치, 경제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국민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정치와 경제가 윤리, 도덕의 범주밖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로서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그것이 윤리와 도덕에 어긋나고 또 인간에게 근본적인 해를 입힐 때는 발언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각하께서 지적하신 정교분리의 원칙을 교회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정부의 인사나 경제 정책 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성직자가 정치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그 나름의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이 있고 그 원리에 따라야 인간과 사회, 또는 세계의 발전과 구원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가 여기에 위배될 때에는 발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앞서 추기경에게 독일에서의 유학생활, 그중에서도 바티칸 공의회의 혁신은 매우 깊은 각인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를 하게 되는 계기는 1960∼1965년까지 있은 가톨릭 교회의 최고 종교회의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마련되었다. 이 공의회는 요한 23세 교황이 교회의 쇄신, 현대화를 부르짖으면서 개최하였고, 그 다음에 교황 바오르 6세에 의하여 4년 동안 이어진 회의였다. 그 공의회의 결론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교회는 비록 그 기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세상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서,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있고 따라서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종교의 정치참여의 정당성이나 불가피성, 그 어떤 쪽에도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결국 정치를 악용하는 종교적 집단성도, 정치를 바로잡는 종교적 집단성도 아름다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가 정치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어도, 종교적 맹목성이 없이도 사회에는 정치를 향한 비판적 목소리가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꼭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의 힘일 필요는 없다.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머무는 것으로 아름답다. 종교가 윤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그것 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종교의 활동 또한 언젠가 종교로부터 국가가 가져와야만 하는 의무에 불과하다. 어떤 형태로든 종교는 개인화되어야만 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적 진보의 필연적 결론이다.
따라서 추기경이 걸어야 했던 길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의 스탠스가 시대적 요청에 적합한 방향이었다는 점에서 정당하게 고려될 수 있을 뿐, 궁극적으로 종교의 정치적 참여는 사라져야할 악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의 고민은 처음부터 고민일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고, 우리는 그 고민으로부터 비극적 시대상황을 읽으면 그뿐이다. 그리고 마땅히 정의로운 실천 속에서도 고민해마지 않았던 김수환 추기경의 사고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군부독재의 서슬퍼런 공포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의 행위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역설: 누가 추기경을 움직였는가?
추기경의 글에서, 그리고 현대사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추기경이 고민을 깨고 민주화의 길로 나서게 했던 한 사람의 이름이다. 추기경이 회고하고 있듯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당시 천주교계의 의견이 분분함에도 불구하고 추기경을 움직이게한 자극제가 되었다.
74년 7월의 지학순 주교의 구속 같은 큰 사건(이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고 한국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 터졌을 때, 그것은 한국 교회로서는 처음 당하는 큰 충격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의견의 차이 없이 모두가 함께 대처하였다. 그러나 정의 구현사제단이 생기고 거의 모든 시국 사건에 개입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에, 그들을 두고 교회 내부에서도 상층부에서부터 찬반 의견이 심각하게 갈라졌고, 때로는 서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로까지 발전하였다. 참여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 모든 일의 탓이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나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로마 교황청에 나를 고발하는 편지를 연명으로 보내기도 하고, 정부 에서도 여러 차례사람을 보내 나에 대한 견책 또는 그 이상의 무엇을 상신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 외무부 장관 둘이 로마에 간 일이 있고 국회의원, 그밖의 가톨릭 신가 장관 등이 갔었다. 이런 사정은 로마에서 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이 때 교회 안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과는 다른 의미의 사제단인 구국사제단과 평신도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대건회가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사회참여에 반대하는 입장 취하였다. 또 교회 밖의 단체인 국제문화교류협력회라는 데에서는 구라파의 합스부르그 왕가의 왕자 되는 사람을 초대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권력욕과 허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글을 구라파 신문에 싣게 한 일도 있었다. 그 신문을 본 이들이 나에게 보내 주어서 알게 되었다.
추기경은 <종의 기원>이라는 혁명적 저서를 목전에 두고 수십년을 고민했던 찰스 다윈을 닮았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고, 결국 지학순 주교라는 급진적 인물의 구속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알프레드 러셀 월러스의 편지로 인해 종의 기원을 급히 출판할 수 밖에 없었던 다윈과 겹친다. 추기경은 스스로 고백하듯이 정치적 인물도 아니었고, 진보에도 보수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예수와 같은 래디컬한 면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인물은 얼핏 보기에도 급진적이었던 지학순 주교다. 그의 행동이 고민중이던 추기경을 자극했고 결국 추기경을 민주화의 투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상 지학순 주교 역시 학자적 인물은 아니기에 그로부터 천주교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어떤 이론적 토대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그는 김추기경처럼 <경향잡지>에 많은 글을 썼지만 대부분의 글이 호소문일 뿐 학자적 성향을 짐작케 하는 글은 거의 전무하다. 특히 그의 글 <카톨릭과 공산주의>와 <내가 겪은 공산주의>[footnote]아마도 지학순 주교는 잠시 <경향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 중 대부분이 권두언을 장식하고 있다. <카톨릭과 공산주의>라는 짧은 글은 경향잡지 1982년 7월호(통권 1372호)에 실려 있고, <내가 겪은 공산주의>는 경향잡지 1972년 2월호(통권 1247호)에 실려 있다. 두 글 모두 인터넷을 통해 읽을 수 있다.[/footnote]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실천적 사상가는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각론하고 우리는 추기경을 움직인 것이 지학순 주교라는 천주교 사제의 구속이었다는 점에 직면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결국은 민주화의 투쟁에서 방패막이로 기능했던 천주교의 움직임이 천주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만약 박정희가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도 추기경은 명동성당을 개방하며 독재와 싸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지 모른다.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추기경은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할 분은 못되었던 듯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민주화로 이끈 커다란 움직임의 원인이 이익단체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그 조직이 천주교회라는 종교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나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그리지는 못한다.
제도화된 종교 역시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인류의 본성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것이 최고의 윤리적 기준으로 무장했다고 자부하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인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지우고 거리로 나섰거나, 혹은 이익이 우리를 움직였노라고 솔직히 밝혀야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건이라면 말이다.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가 걸려 넘어지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시대가 그러한 역사적 질곡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교가 그 맹목성을 사회에 침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이 내 꿈이고 시대적 고민 속에서 조심스레 사회참여를 결정한 김수환 추기경이 존경스러운 이유다. 시대적 요청속에서 정치판을 넘나들고 싶어하는 종교인들은 추기경의 조심스러움을 배울 일이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그의 고민은 처음부터 고민일 필요가 없문 질문이었고’에서 ‘없문’은 오타인 듯 합니다.
글을 읽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으나, 좋은 글이라 교정이 필요할 듯해서요.
“점차 세속화가 진행되는 유럽에 토대를 둔 종교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었는지”
요 핵씸적인 질문이 뭘 나누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해 보입니다. 혹시 ‘세속화’가 유대의 구습과 교회의 폐단을 탈탈 털어낸 보편화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섭리와 자유의지가 아닌 힘과 행동의 관계라고 바라본다는 의미에서의 자연화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서술로는 제가 본 것 가운데서는 홉스의 <시민론> 15장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보편화는 분명한 경향일 듯 한데, 자연화는 여전히 (종교 내에서는)논쟁적일 듯 합니다. 혹시 그 책의 한국어판이 필요하시다면 며칠 뒤에 교정이 끝나는 대로 부쳐드릴 수도.
감사합니다. ^^
수정했습니다. ^^
당근 보내주셔야죠~~~ 제 메일주소는 korean93 at postech.ac.kr 이랍니다.~~~~저련님 항상 감사!
보편화 문제는 아마도 보내주실 저서가 도움이 될 듯 하고, 자연화 문제는 제 기억에 빅토리아 시대의 세속화 문제를 다룬 서적이 있었습니다. 주로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진정한 과학의 세속화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론으로부터의 탈피, 서양학자들은 주로 종교로부터의 탈피) 읽어볼만 했습니다. 찾고 연락드리죠.
교황 이름에 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순서대로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라고 해야 할 듯 하네요.
부쳐드렸습니다. 오역과 비문이 모두 제거되었길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