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19세기의 과학자들의 저술을 직접 접하면서, 예를 들어 볼츠만이 과학철학을 진지하게 읽으려다가 욕을 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역체계를 본뜨려 했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과학과 철학의 상호작용이 강했던 그 유럽의 19세기가 부러웠고 그래서 19세기를 꿈꾸며 그렇게 철학책들을 읽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유럽인들이 경험했던 그 상호작용을 우리는 아직도 넘어서지 못한 것 같다. 분명히 과학은 철학과 동떨어져 논의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철학자들도 진지하게 과학의 성과에 대해 알고 자신들의 철학을 펼쳤는데, 대한민국엔 그런 시도가 없다. 아예 그 반발작용이랄까, 근대는 반성해야 하는 것이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을 타고 들뢰즈, 라깡으로 넘어가버렸다.
철학 본연의 주제가 존재한다는 어떤 피해의식 때문에, 철학자들은 점점 더 그들만의 리그로 파들고 있다. 이건 이 땅에 과학이 문화로 정착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분명 원인이 있다. 하지만 글쓰기가 본업인 인문학자들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래도 인문학자들 중엔 양쪽의 경험을 다 해본 이들이 과학학자들인데 이들도 과학에 대해 무척 적대적인 감정만을 보여준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기생하면서도 과학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윤리적 우월감을 표현하려 애쓴다. 과학사회학자들이 제일 심하지만, 과학철학자들도 과학사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STS류의 과학사회학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아예 공격의 고삐를 쥔 것처럼 날뛰고, 과학철학자들은 다윈에 미쳐서 환원주의는 나쁜거고, 전일론은 좋은거라며 아예 자신들이 과학자인척 하고, 과학의 패러다임을 자신들이 바꾸겠단 헛된 망상을 품고 있다. 과학사학자들 중에는 창조과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과학사에서 다윈이 틀렸던 점을 지적하며 현대진화론이 수정되어야 한단다. 다 미쳤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니다. 언제나 과학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좀 연구실 밖으로 나오라고 말한다. 교수들이라면 가능한 이야기다. 근데 꼭 그렇지도 않다. 과학자들이 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 대화할 역량을 갖추려면 적어도 대학원생 시절부터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국내에서 현재 교수직을 맡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런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게다가 국내의 문화가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다.
이공계열 대학원생들은 방학이란게 없다. 미국 애들은 방학이 있다. 근데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1년에 1주일 겨우 휴가라는 걸 받는게 전부다. 그럼 나머지 시간엔 뭘할까. 연구 또는 실험을 한다. 그럼 얼마나 할까. 하루종일 한다. 내 경우엔 아침에 나가 저녁 12시까지가 고정된 일과였다. 그럼 언제 책을 읽었냐고? 눈치 봐가며 주말에 읽었다. 사실 주말도 없다. 주말에도 실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가 내가 교수와 주변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인문학 공부를 한거다.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 인문학(대충 인문학이라 하자. 철학과던 역사학과던 문학과던 다 쳐서)계열 대학원생들은 어떻게 사는지가 좀 궁금하다. 내가 알기론 인문계열 대학원엔 방학이 있다더라. 아니 그것보다 먼저, 인문학이라는게 어차피 책 읽고 글 쓰는 게 본업 아닌가. 이공계열의 본업이 실험과 논문이라면 인문계열의 실험은 독서 아닌가? 그럼 이공계열 애들이 실험하는만큼 인문계열 애들은 독서를 하나? 좀 묻고 싶다.
절대비교를 하기가 어렵겠지만, 예를 들어 보자. 인문계열도 아닌 주제에 나는 적어도 블로고스피어에서 논의되는 철학이나 인문쪽 이야기를 다 알아는 듣는다. 근데 아무 이공계생이나 하나 잡고 그애가 연구하는 주제에 대한 프리제네이션 파일을 인문계열 대학원생에게 줘도, 아마 이해 못할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인문계열 대학원생이라 하면, 같은 이공계열 대학원생이 연구하는만큼 좀 빡세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같은 칸트라 해도 좀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실험하는 만큼 책을 읽는다면 내 생각엔 적어도 하루에 한권은 읽어야 한다. 그만큼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생활이 피폐하다.
등록금 벌려고 과외한다고? 이공계는 사정이 꽤 좋은거라고 착가하지 말자. 내가 나온 대학이 국내에서 가장 장학금이 많은 곳이었는데도 내 주위엔 과외하는 애들 수두룩했다. 연구에 지장이 생길만큼. 결혼한 애들은 다 과외를 했다. 그만큼 이공계열의 대학원도 열악하다. 이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인문계열 대학원생의 하루는 어떤가? 좀 알고 싶다. 뭘하길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그리도 학업 이외의 활동을 많이 하나. 그러면서 세상 고뇌는 자기들이 다 짊어진 듯 하는 것도 꼴불견이다. 대학원에 들어갔다는 건 공부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는 말이다. 이공계 학생들이 실험 하는만큼 공부하느냔 말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수업 듣고 남는 시간엔(사실 이공계열은 수업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험실 생활 그 자체가 수업이다) 뭘하나. 노나? 아니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나. 그것도 아니면 술을 마시나. 이공계 애들은 술은 밤 12시부터 마신다. 그 전엔 마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침엔 시체처럼 실험실에 나간다. 나도 그렇게 살았다.
적어도 인문계 대학원에서 공부좀 한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던가, 좀 창의적인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남는 시간에 차라리 이공계 실험실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라도 해라. 배울게 많을 거다. 내가 교수 되면 이런 실험 꼭 할것 같다.
방학되면 세미나들 한다고 그러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세미나라는 거 얼마나 열심히 하나? 이공계열 대학원생들이 방학도 없이 평상시처럼 실험하는 만큼 그렇게 빡세게 하나? 나는 그게 궁금한거다. 도대체 얼마나 널럴하길래 인문계열도 아닌 사람이 이해할, 아니 무시할 수준의 글들을 쓰면서 공부한다고 깝치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거다. 아니 적어도 글쓰는 게 본업이면 그보다는 더 많이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도무지 알 수가 없는거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계열 대학원생들의 하루부터 좀 알고 나서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걸 모르고서는 도무지 이들을 동정해야 할지 아닐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칸트를 공부하려면 뉴턴부터 읽어라. 그게 기본이다.
평소 김우재님의 포스팅을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진 인문학도의 입장에서 이번 포스팅은 잘못 생각하신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위 글에서는 노력에 대해서 1. 투입(Input)과 2. 산출(Output)로 측정해서 비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가지에 대해서 인문학과 과학은 다른것 같습니다.
먼저 투입에 대해서는 분명 인문학도들이 이공계에 비해 시간 투입을 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적으셨듯이, 세미나 등을 통해서 관련 논의들을 따라잡는데 많은 시간을 투입합니다. 그러니 투입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은 적어도 블로그 계에선 의미 없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도 역시 노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고, 이공계에도 있을것인데, 둘을 비교하려면 각 인문학도와 이공학도에 대해서 실증적인 측정이 뒤따라야 할 것인바, 이는 김우재님이나 저나 할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산출에 대해서 따져봅시다. 김우재님의 노력은 분명 많은 이들보다 열심히 하신것이고, 저 역시 그것을 김우재님의 글을 통해서 알고 있기에 이 블로그에 종종 들리는 편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에 있어 산출과 이공계에 있어 산출은 다른것 같습니다.
일단 동의하실진 모르겠으나, 쿤의 논의로 돌아갑시다. 쿤에 따르면 과학의 발전은 ‘교과서를 다시 씀’으로서 일어납니다. 즉, 보일의 원소론 부정을 의한 원소의 정의는 화학에서 원소론의 기본적 정의가 되는 식이죠.
그러나 철학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데, 이는 쿤이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가 있기에 패러다임이라는 개종의 과정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은채로 철학이 존재할수 있다고 논한 부분이 됩니다. 즉, 칸트에 대해 김우재님이 잘 아시는 논의만 나오는건, 애초에 칸트에 대한 현재 한국의 논의가 협소한 탓이고, 굳이 비전문가들이 잘 모를만한 주석서들에 대해 언급해서 깔 정도로 논의가 깊이있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굳이 원전을 언급해가면서 깔만큼 블로고스피어가 “학문적으로” 의미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정태라는 분의 실력도 이에 대한 감안 요소가 될수 있겠죠.)
그렇기에 단순히 자신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 없고, 창의적인 철학을 내놓지 못하였단 이유로 인문학도를 까는건 적어도 현재 상황에선 온당치 못한 비판입니다. 철학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쿤의 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개종 이나 사회적인 변환을 겪는 대신 새로운 텍스트에 대한 해석 등으로 끊임없이 갈라지기 때문이고, 이에 대해서 “비과학적”이라는 말을 할수야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론이 틀린것이고 새로운 산출이 없다고 비판하는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론이 “틀림”을 논증하셔야 하는데, 이 논증을 “과학적으로”, 즉, 측정량에 기초하셔서 할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혹 가능하시다면 개요라도 적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국내 철학자 사회가 협소한 탓도 잇습니다. 이를테면 김영민 등은 새로운 철학을 시도하고 있지만, 과연 김영민의 텍스트를 해소해서 비판하는 이들은 몇이나 있습니까? 이를테면 함석헌 등의 철학은 지금 어떻게 취급되고 있습니까? 이런 점을 생각하실때 물론 세계 수준에 비하면 적긴 해도, 하나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일반 물리학 분과에도 최소한 한국내에 수백명이 있는 과학과 비교할때 새로운 텍스트를 내놓고 그에 대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기란 (수적으로) 지극히 힘든 상황입니다.
철학과 대학원생일 때 놀았으니 할 말 없음. 다른 사람들이 노는지는 잘모르겠음. 칸트 “연구”를 하려면 뉴턴부터 읽어라, 뭐 어느 정도는 동의. 나도 반복해서 말하지만 철학은 개념 가지고 노는 건데, 개념의 뿌리인 지식 체계에 대해서 공부 안하는 건 참 뭐라고 할 말이 없음. 하지만 “제대로” 한다면 세상에 철학 공부 만큼 어려운 건 없을 듯. 그게 안되니까 그냥 “사람” 연구하고 끝내는 거야. “주제”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그건 2년이면 정리가 되니까 (먼산).
그런데 블로고스피어의 글 수준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듯. 이론물리학 하는 엑스트라E님이 있다고 해보자구. 그분이 전공자들하고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들이대면 왠만한 이공계들도 못알아들을 거 아냐. 게다가 인문학에는 프리젠테이션이라는 잘 안 맞기도 하고 (텍스트 중심이라, 요지만 이해하는 건 인문학 공부가 아니라는).
내가 잘 모르니까 대충 아는 예만 들면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 공부하는 사람이 제3인간 논변에 대한 블라스토스의 해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쓴다거나 칸트 전공자가 연역 문제나 도식 문제에 대해 글을 쓴다거나 그러면 누가 대화를 할지 잘 모르겠음. 셀라스님이 네이버 블로그에 철학 문제를 쓰고 있는데, 그게 쉽게 써서 그런거지 “업자”들하고 대화할 때처럼 브랜덤하고 맥도웰 이야기하면 아마 댓글이 하나도 안 달릴 것임.
사실 프리드만의만 하더라도 굉장히 쉽고 명쾌하게 씌어진 책이기도 하고, 대체로 초월적 감성론 부분을 “기하학/물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건 좀 쉬운 편임. <90분만에 읽는 칸트> 정도의 논의에서도 다루어지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스트로슨의 Bounds of Sense 이후 칸트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과언이 아닐 헨리 앨리슨의 의 앞부분만 하더라도 배경 지식이 없으면 좀 거북해지거든.
음, 그러니까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도킨스나 리들리, 그린, 데블린, 이언 스튜어트 책 등을 읽고 “생물학, 물리학, 수학 분야에서 하는 이야기를 다 알아듣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철학이나 인문학도 그런 점이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뭐 철학이나 인문학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 물론 많은 인문학도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허송세월보내는 것도 사실이긴 하겠지만, 철학이나 인문학은 인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직업/취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열폭하기 쉽지 않은 것도 이해해주어야 함. 가끔은 사고 체계 전체를 바꾸어야 어떤 개념 하나가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꼬여있고 비효율적인 학문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일단 차치하고) 그런 ‘eye opening’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거지. 칸트3비판서만 해도 다 읽는데 1년 넘게 걸린다구. 그것도 혼자서 열심히 “대부분 이해해가면서” 읽는 경우고. 극악의 텍스트인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면 한 학기 내내 서설을 끝낼 수 있어도 다행이랄까. 그거 끝나면 서론이 있고, 아직 책의 본문은 시작도 안했는데 1년이 지나는, 그런 끔찍한 분야니까.
요약하면, 나의 변명 혹은 옹호, 혹은 “좀 봐줘”라는 간청은 (1) 원래 인문학이 (철학은 더) 심하게 비효율적이고 진척이 더딘 학문이라는 거. (2) 블로고스피어에서 쓰는 글은 “업자”들 이야기는 이미 아니라는 거. 뭐 전공 서적과 교양 서적의 거리가 다른 분야에 비해서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작정하고 전공자들 이야기로 들어가면 같은 분야에서도 말은 잘 안 통한다는 것 (일단 텍스트를 읽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 (3) 뭐,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더 많이 하긴 해야겠지. 그게 쉬운 게 아닐 뿐.
이건 명백히 윤아에 대한 편애라능. 서현이와 유리사진은 왜 안올려주시냐능!!!!!!!!!!!!!!!!!!!! ㅋㅋㅋ
글을 쓰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국내 철학자들 논문을 읽어봐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임. 여하튼 알레프가 수준이 높은 거지, 다른 애들은 안그럼. 그냥 인문계역 대학원생들의 하루일과가 궁금하다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평균적으로라도 주워들은 얘기로는 대부분 논다고 들어서.
유리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능.
저는 아래 알레프님의 이야기에 동의합니다. 그정도면 답이 되었다고 보며. 그냥 하루일과를 말씀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많이 놀죠.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쳐 피우고… 학부생이지만 너무 부끄럽습니다.T.T…
근데 아주아주 궁색하게 변명하자면… 많이 읽으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데 어쩌겠어요.
그러다 그게 시간 좀 들이면서 딴일도 하면서 묶혀 놓고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걸 핑계로 책을 아예 손에서 놓고 놀아버린다는게 문제지만.-_-;;;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전 이 댓글 단 후에 누군가의 전집을 손에 대는게 아니라 마우스에 손대고 스타나 하고 있을 겁니다.-_-;;;
아. 딴 진로를 알아보든가 아님 정말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놀아도 교수한테 안혼나고 그러나요? 이공계는 조금만 놀면 교수한테 쫓겨나는데.
어디까지나 학부생이라는 걸 전제로…
전혀 신경 안쓰던데요?–;;; 대학원은 분명히 다른 것 같긴 한데…;
제가 다니는 학교 분위기가 그런 건지 다른 학교는 다른지는 잘 모르겠네요. 근데 이공계쪽은 교수가 대학원생도 아니고 학부생에게까지 공부안한다고 혼낼 정도로 신경써주나요? 되게 부러운데요…; 저 같은 경우는 완전히 길거리에 내다 놓은 버린 자식들…
5분여에 걸친 장문의 댓글을 쓰다 날려버려서…(에잇!)
요만 다시 쓰자면요,
동기 대학원생도 있는 학부생으로서 요바닥 한참 구경한 결과로는,
(한때는 저도 대학원 가고 싶었었거든요)
수업 준비도 나름 빡센데다;;
특히나 조교할 경우는
교수의 24시간 따까리 하느라 쉴 틈 없고,
교수 잘못 만나면 논문도 대필에 준하게 써줘야 한다는 소문에;;
학부생들 페이퍼 – 요거 두당 10장에 100명짜리 수업이면;; – 검사및 채점, 중간/기말고사 채점도 죠교가 하는 경우가 다반사구요;;
결국 이바닥은 의미없는 착취당하느라 시간이 허비되는거죠. 방학에도 이 처지는 계속되구요.
-뭐, 이공계는 실험데이터나 남지, 이바닥은 그런것도 없어요 –
게다가, 이바닥은 ‘실력’보다 ‘인맥’이 더 강하니 착취의 강도도 훨씬 심하구요.
아, 그리고 스비나님 말씀에 공감.(저도 학부생이라 그럴지도^^;;)
책을 읽어도 이해 한되던게,
정말정말, 검은건 글이고 흰건 종이다가
그냥 검은건 잉크고 흰건 종인데,
그게 한 일주일쯤 묵혀두고 있다가
어느날 어느순간 갑자기 아하… 할 때가 있습니다.ㅋ
그래서, 사실 인문학에서는
그냥 딸딸딸 외우고 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 느껴질 때가 있어요;;
(써놓고 보니 도선생 같기도 하고..ㅠ)
그러니, 뭐, 놀아도 노는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어요
(횡설수설;; 첫 댓글인데, 왜 이런대요ㅠ)
아. 근데 생각해보니 그게 인문학의 경우만은 아닌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수학문제 풀던 경험을 생각해보면 이공계쪽 학생들도 도저히 뭔지 모르겠는데 시간두고 보니까 언젠가 문제도 풀리고 이해도 되는 경험이 충분히 많을 테니깐 말이죠. 결국 애초부터 궁색한 변명이었네요.
평균적으로 주워들은 이야기로 판단할만큼 노력의 측정이라는게 간단한지 싶습니다. 평소에 측정량을 강조하시는 분이 이런 류에 대해선 나이브한 기준을 들이대는게 잘 이해되지는 않는군요.
암튼 잘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우선시 된 후에 남의 얘기를 받아들이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권위에 의존하여 책 읽기가 되는거 같아요.
내 삶에서 정말 칸트의 저서가 반드시 필요할까. 그것이 없으면 먹고 싸고 자는게 불가능할까. 이 의문에 대해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먹고 싸고 자는데 있어서 칸트의 저서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의 저서를 읽어야 할 필요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칸트가 안드로메다에서 주워다온 개념을 읊어대는 신선놀음으로부터 일상에 통용되는 상식과 경험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했기때문에 칸트의 저서에서 칸트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즉, “그에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려는 좋은 아이디어가 담겨져있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는 위대한 철학자이기때문에 그의 책은 필독서다라고 주장한다면 곤란합니다. 권위에 의존하여 독서하는 자들을 기피해야겠죠. 그런 사람들은 온갖 알려진 이름 읊어데는 것이 독후감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ㅋㅋ 노씨와 이씨 ?
루시엘/ 측정량이 좌표계(coordinate system)에서 적용되는 의미랑 지금 코멘트에서 적용되는 의미가 동일한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측정을 좀 해보려고 했던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할 때, 경험과 사례를 근거로 드는 것은 차선이기도 합니다. 안그런가요?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얼마나 많은 인문대생들이 치열하게(?) 공부할까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물론 인문학도 수업은 거의 형식적인 형태로 진행이 되고 세미나가 중심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문학생들은 유목민의 처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사람이 자기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사료로 증명해 내야 하니 나만의 성을 쌓는 작업이니까요. (역사학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이론과 자기 이론에 맞는 사료를 찾는 작업이 필요한데, 요즘엔 이론 공부는 거의 방기된 상태이고 사료도 아주 극히 일부만 찾는 경향이 큽니다. 역사학에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인데 요즘 민족은 버려진 고아 상태가 된 지 오래죠. 그래서 기호에 맞는 일회성 목적론적 연구가 대부분입니다. 역사에서는.
교수가 닥달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석사를 마친 입장에서 본다면 교수에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안납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니까요. 교수들은 학생들이 학문 수준이 어느정도 인지 관심은 가지지만 공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석사과정 때를 생각하면 낮에야 물론 도서관에서 전전하고 있었지만, 밤에는 늘 술로 시간을 보낸 듯 합니다. 그렇다고 술마시면서 공부를 소재로 삼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고 대학원에 들어왔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다른 대학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간혹 과정 때 들었습니다. 인문학생의 생활이 궁금하시다기에 적어 봤습니다.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문학도들이 다른 학문을 읽어내는지 저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언제인가 인류학에서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것을 보고 그럴 필요성을 많이 느꼈는데 역사쪽에서는 철학과 문학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물론 사회과학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데, 교수들 조차 그러하니 대학원생들이 안보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역사 외부에서는 한국사에서 민족은 만들어졌다고 지속적으로 말하지만, 역사학 안에서는 아직도 철옹성입니다. 경제학에서는 조선시대에 자본주의 맹아는 없다고 몇 해전에 실증했지만, 역사학에서는 아직도 자본주의 맹아가 뇌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잇죠. 인문학의 전반적인 분위기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푸념이었습니다. ㅎㅎ
열심히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이 열심히 할 수는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인문대 대학원생들이 이공계나 고시생들만큼 열심히 살지는 않죠. 그래서 “너희들이 고시공부하듯이만 한다면 먹고 살 길이 왜 없겠냐?”라고 하는 교수님도 있음. 기본적으로는 맞는 얘기라고 생각함.
근데 칸트 읽기 위해서는 뉴턴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일견 맞는 소리이지만 결국엔 틀린 소리임. 그렇게 치면 칸트를 읽기 위해 읽어야 하는 도서만 파려고 해도 한 세월이 걸릴 거임. 어릴 때 좌파들이 마르크스 좀 읽으라고 하면 “엄훠, 헤겔도 안 읽었는데 마르크스는 읽어서 뭐해? 나 아직 아리스토텔레스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어. 알아서 읽을 거임. 신경끄삼!” 이라는 식으로 내쳤었는데, 뭐 그게 386 좌파 꼰대들 충고를 회피하는데엔 유용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쓸모있는 자세는 아닌듯. 뉴턴이랑 뭐랑 뭐랑 먼저 읽어야 하기 때문에 칸트를 안 읽고 있는 거보다는 그냥 닥치고 칸트를 읽는게 더 나은 자세임. 물론 알렙 님 말씀처럼 선행작업과 맥락이 있다는 점은 당연히 숙지를 하고 있어야 할테고. 그게 아니면 들뢰즈 공부하면서 들뢰즈가 뭘 욕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에서는 익숙한 풍경이 생기죠.
결국 윗 글은 “인문학, 지지를 받으려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도 맞는 소리이기도 하고 틀린 소리 이기도 하고 그렇음.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1) 정치평론을 하고 있다. -> 2) 거기 사용된 인문학적 개념이나 이론들에 대해서 과학도가 시비를 건다. -> 3) 그 이론이 쌩 엉터리라고 한다. -> 4) 아니라고 한다. -> 5) 논쟁이 진흙탕이 된다.
뭐 이런 테크트리를 타는데 인문학은 어떤 종류의 분과학문에라도 기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관심사를 탈 수밖에 없고, 인문학 이론의 사회적 적용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버겁지 그가 과학철학에 대해 식견이 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함. (알렙 님처럼 지도 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따라서 인문학도의 정치평론에 대한 반박은 그녀석이 데이터를 못 읽어서 그걸 가르쳐줘야겠다던지, 하는 소리가 아다리가 안 맞는다든지, 반박할 수 있는 경험적 자료가 있다든지, 이런 경우엔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네 이론이 과학이다 아니다 논의로 가면 대단히 짜증스러움.
그러면 뭐 결국엔 그럼 가라 이론 말고 진짜 이론을 가지고 있고 그게 결국엔 모든 걸 설명할 거라고 믿는 양반들이 어떤 정치평론을 하고 있나 들여다보면, 상식인 수준의 소리나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 저 방면에서 논쟁이 되지 않아도 죽어도 그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데에 있음. 과학자, 혹은 과학도라도 멋드러진 정치평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전공분야 지식만 천착하지 말고, 사회문제에 대한 데이터도 주의깊게 살펴서 해석을 전개한다면. 근데 그러는 경우는 거진 본 적이 없음. 사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그 일상에서 그런 걸 해내라는 것도 무리겠지. 그리고 외국 이공계에 비하면 훨씬 교양수업도 안 듣고 실질적인 성과를 빼내라는 압박에 시달려서 머리가 굳은 것도 알겠고.
다 알겠는데 그 시비를 왜 우리에게 거는 거야? ㅡ.,ㅡ;;; 과학도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폼 잡고 싶은데 너희들 걸리적 거린다는 거 아냐? ㅡ.,ㅡ;;;
-> 대충 정서는 이렇게 나가죠. 그리고 노편집장 님은 일반적인 대학원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닥. 직장다니면서 대학원 다닐테니 나름 무척 바쁘겠지만 인문학 공부에 집중할 시간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물리학자 파인만의 사고 방법을 본받을만한데 그와 같이 사고하려면 창의력이 뒤받침되지 않고는 힘들듯 합니다.
그의 공부 방법은 교재에 파묻히기보단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직접 해결하면서 스스로 배운다네요. 그러니까 노벨상 받을만하지….ㅋㅋ
Class: Why not use Feynman’s lecture notes?
Gell-Mann: Because Feynman uses a different method than we do.
Class: What is Feynman’s method?
Gell-Mann: You write down the problem. Then you look at it and you think. Then you write down the answer.
학생: 왜 파인만의 강의록을 안 쓰죠?
겔-만: 파인만은 우리랑 다른 방법을 쓰거든요.
학생: 파인만의 방법이 뭔데요?
겔-만: 일단 문제를 적어요. 문제를 쳐다보며 생각해요. 그리고 답을 쓰는 겁니다.
출처:파인만과 겔-만 (http://extrad.egloos.com/1803241)
한국사학도 석사 1학기인데, 되게 고민 많이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우선 제가 겪은 바로는, 교수님들이 뭔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시는 수업이 없더군요. 연구자 출신 교수가 대부분이라 그렇겠지요. 그래서 정규 코스웍은 그저 교수님이 참관하는 세미나와 비슷하단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수업 돌아가는 모양새도 그렇고, 원생들끼리 자유롭게 모여 만든 세미나와 내용상의 차이도 크게 없구요. 물론 이건 교육 방식이나 수업 형식의 문제겠고, 교수의 전공 지식이나 학적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코멘트에 있어 원생과 교수의 질적 차이는 확실히 구별되죠.
일주일에 단행본(300-800쪽) 한 권 씩을 읽거나, 주제를 놓고 관련 연구성과를 정리해 글을 쓰는 일을 한 학기 내내 했습니다. 분량이나 내용 상의 지침이 거의 없기 때문에, 관련 논문을 한 부를 읽어가도 되고 30부를 읽어가도 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수업 때 어느 정도는 뽀록이 나죠. 수업 참여자들의 논평이나 지적은 날카로운 편이어서 크게 상처입기도 하고, 그만큼 도움도 됩니다. 매주마다 전원 발제를 하거나(7-8쪽 분량), 한학기에 한두번 주제발제를 하고(8-16쪽) 나머지 주에 쪽글(2-3쪽)을 써내는 식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얼마나 제 공부에 공을 들이느냐에 따라 절대공부시간이나 여가시간의 정도는 굉장히 탄력적입니다. 영어원서책을 일주일 내내 몇 시간씩 읽어서 발제를 해간 적도 있었고, 내내 샤이니만 처보다가 3시간만에 300쪽을 통독하고 쪽글을 써간 주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제가 경험한 바로, 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주기적으로 공부에 관한 능력치를 검증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그다지 마련돼있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의 깜냥이 연구자 개인의 자기관리에 기대 있습니다. 이/공학쪽은 잘 모르지만, 통계를 전공하는 사회학과 원생 친구들의 생활은 저와는 퍽 다르더군요. 그 중에 어떤 쪽이 학습에 더 단/장기적으로 효율적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인문학에도 단기적인 효과를 채근하고 도제식으로 교육시키는(나쁜 뜻에서 한 말은 아니고 딱히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이를테면 어떤 강제를 두어 성과를 뽑아내는 시스템이 있긴 한데 보통 BK21 지원과들이 그럽니다. 여론은 일단 성과가 쌓여서 활력이 있다는 의견과 겉만 번지르한 학술회의/논문만 양산했다고 보는 의견으로 갈리던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주체적으로 공부할 자기관리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지, 학사가 너무 풀어져있어서 그랬는지, 형식적으로라도 스케쥴을 다잡아줄 그런 강제장치가 얼마간은 그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인문학을 아는 과학도가 있는데 과학을 아는 인문학도가 왜 그리 적으냐고 물으신다면 그야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공 들으면서 타 전공강의(국문 부전공, 서양사총론, 통계사회학, 미시경제학)를 적잖이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학/공학 쪽은 손도 못대봤습니다. 정말 낯뜨겁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제게 과학은 뭔가 평생 넘지 못할 산만 같고, 그래서 과학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설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주위에 칸트와 데카르트를 읽는 수학도가 있고, 정치학에 정통한 일문과 친구가 있긴 한데, 그들에게 자극을 받으면서도 결국 제 깜냥에 단기적으로 선을 긋는 선택을 하게 되더군요. 해서 석사과정 연구자로서 제 단기 과제는 국문과와 서양사 이론의 성과를 한국사에 녹여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흔히 고시생들이 건드리는 법, 정책학, 경제학 모델링 등 사회과학의 유산을 흡수하는 데 도전하고 싶지만, 아직은 요원하고 부끄러운 목표일 뿐입니다. 그러니 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한국 인문계 대학원 이야긴 아니지만, 어쩌다가 대충 알게 된, 미국 아이비리그(학벌 따지자는게 아니라 ‘공부 빡시게 시키는 명문대’라는 전제하에) 영문학과 대학원 일년 과정을 이수한 어느 미국인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나는데, 다음주 월요일(7월 13일)부터 8월 말에 가을 학기 개강할 때 까지 총 5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물론 그 대학원생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상황일 겁니다. 교수 뒤치닥거리(직접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처절한 예를 들자면, 룸싸롱 앞에서 차 안에 앉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든지)따위는 절대 없고, 박사 끝날때 까지 총 5년 동안 전액 장학금 받은 상태인지라 과외를 따로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어릴 적 부터 사용해 오던 언어가 ‘원어’이니 따로 ‘원서’를 읽거나, 번역서와 ‘원전’을 대비 해가며 읽어야 하는 공을 들일 필요도 없고.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교수가 대학생/원생에게 공부하라 마라 혼내거나 갈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안 나오면 교무과에서 규칙에 따라 그냥 자르면 되는 일이지요. 아, 근데 그러면 학생 수가 줄어서 그 교수가 속해있는 과가 폐지가 될라나요?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공계에서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실험에 매진하는 상황이 실험자 본인의 전적인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무 상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1989년 개정된 근로기준법 법정 노동시간 1주 44시간에 비추어 볼 때 ‘정상’이 아닌 상황이라고 생각 됩니다. 1년에 겨우 1주일 받는 휴가 일 수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이공계 대학원은 열악한 데 인문계쪽은 어떠냐? 라는 말이 마치 징병제로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군미필자들에게 니들은 왜 군대를 안 가냐?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들립니다.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급진적’인 생각은 모병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왜 중요한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게 관례가 된 이후에(매번 설명하려니 귀찮으니까), 너무 “열심히 공부만” 하다보니 그 중요성을 잊어 버린 게 아닐까요?
아무튼 그건 칸트 책임은 아니고 어쨌거나 “사람들 수준에 맞춘” 입문서들을 쓰지 않은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실질적인 논쟁과 갈등”에 철학적 개념이 끼어들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을 걸요.
농담삼아 “파인만 알고리즘”으로 알려진 방법이지요. 하지만 겔만이 파인만의 강의록을 쓰지 않은 이유는 둘 사이의 오랜 갈등 때문이었을지도. 겔만이 파인만을 무지 싫어했어요.
물리”학자”로서 더 모범적인 사람은 겔만이었을 겁니다. 전 겔만이 더 좋아요 ^^;
많은 분들의 소중한 의견 잘 들었습니다. 계속 고민해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어떤 학문을 이유없이 무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인터넷을 하게되어 들렀더니 그동안 뭔가 산으로 가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네요.
옛날에 학교를 다니면서 웃겼던(하지만 매일 그랬던) 일이 있었죠- 학교 앞에 있는 이공계건물에는 보통 10시쯤 되도 거의 모든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는데(그 중에는 교수님방이든 뭐든 아무튼 70-80%는 불이 켜져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인문대, 사회대 등의 연구실 건물들은 불의 거의 다 꺼져 있어서 비교가 되었습니다. 연구실에 있는 시간을 가지고 비교하자면 그랬던 거 같아요 개개인에 대한 얘기는 알 수 없으나 그리고 불켜놓고 딴짓을 하는 개인이 있을 수 있으나(제발 이런 얘기할 때, ‘난 안 그랬어요’ 뭐 이런 일반화의 오류스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최소한 공대쪽이 연구실에 있는 시간은 더 길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다니다 중간에 석사하다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서 박사과정중입니다. 직장다니며 박사한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이공계 입장에서는 불가능(?)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게 인문계열 특히 경영쪽이구요.그냥 절대적으로 이공계와 인문학 특히 경영 쪽을 보자면 수치로는 아마 이공계 보다는 적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석사시절 교수님방 아침에 밀대질로 시작해서, 교수님 수업준비 하고, 전화받고, 제안서나 자료나 데이터 준비하고, 수업갔다가 교수님 퇴근시키고 하면 대충 8~9시였던 것 같습니다. 방학에는 한 일주일 정도 놀구요 나머지는 학기 중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지금 석사하는 후배들 봐도 큰 변화가 없네요. 힘들기 보다는 맥빠지더군요. 이게 공부하러 온건지 시다바리하러 온건지.. 이거도 공부라고 침튀겨가며 이야기들 하지만요.
이런 원인을 생각해보면,
1. 우선 인문학과 이공계의 프로세스 차이에서 차이가 납니다. 인문계 쪽에서는 이공계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꾸준히 관찰해야하는 연구가 적어도 국내에서는 별로 없어보입니다. 어디 아프리카 토인 부족에 들어가서 하는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 이상 일정 포인트만 체크하면 되니까요. 통계를 진행해도 거의 설문방식 위주라 해당 시점에만 집중합니다.
2. 이공계는 대부분 랩 단위로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인문계 쪽에서는 사실 랩을 보기도 힘들 거니와 랩다운 랩도 그다지 없습니다. 따라서 연구가 중장기적인 플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냥 교수님들 땜빵으로 들어가죠. 여기에는 인문계 자체에서 유통되는 연구비라는 것 자체가 매우 적은 것도 원인입니다. 이공계는 억단위로 움직이지만 인문계는 백단위로 움직이는 과제가 수두룩합니다. 이러니 교수님들도 애들 묶어서 학비 대줘가며 공부시킬 환경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수와 학생들 간의 링크가 매우 약합니다.
이렇게 인문계 자체의 방법론과 현실적인 빈곤(?)이 연구만 진행하기 힘든 상황을 만듭니다. 인문계 학생들 중에서 학비 걱정안하고 다니는 친구가 드뭅니다. 왜냐면 비댈 랩도 없기 때문이죠. 이러니 연구환경이 이공계에 비해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고 느슨한 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학생이 따로 플레이해도 교수가 그리 강하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문계는 뭐랄까 학연지연이 이공계 보다 더 강합니다. 연구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이런저런 외부활동에 목메는 풍조도 있습니다. 특히 경영 분야의 경우 학교에서만의 연구보다는 외부 업체와의 연계활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게 학굔지 인턴하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에 가까운 학문들은 공부가 큰 의미가 있지만 경영이나 마케팅 같은 실용적인 학문들은 그냥 주구장창 책만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학문의 성격에 따라서 다른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이공계적 관점의 연구시간은 분명히 인문계가 적습니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 공부를 더한다 덜한다는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p.s 인문계 학생들이 즐거워서 술마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실용적?? 경영학에서도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시키기위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나요? 즉, 경영학에서도 표나 그래프같은 추상화된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기법이 이용될텐데 이 기법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경영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라고 단언하여 다른 학문과 비교해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님께선 데이터 수집 장소가 기업이다보니 실용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위의 토론에 뭔가 더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김우재님에 대한 생각만 적고 갑니다. 제가 보기에는 김우재님이 특별한 분입니다. 저도 공대 출신이지만 실험 별로 안한 연구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은 커녕 전공 공부도 제대로 안했던 것 같습니다. 우재님이 대단하신 겁니다 ^^
진지한 글, 심각하게 쭉 따라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시대 ‘아가씨’사진에 너무나 놀랬잖아욧!
한두번 겪은것도 아니지만….늘 놀란다는. -ㅅ-
다음엔 좀…경고를 살짝 넣어주심 안될까요.
댓글 토론읽으면서도 계속 소녀시대 사진이 튀어나올까봐 두근두근 조마조마.
그리고…
전, 지방 국립대 출신입니다. 아주 튼튼한 밥그릇을 갖고있는 국립대죠.
연구실적발표는 대학원 선배들꺼 뺏어서 내고
9시 출근,4시 정시(?)퇴근하시는 교수님들도 많아요.
인문계 아니고 자연과학계열인데도 말이죠.
제대로 실험한번 안해보고 졸업도 했는데요 뭘…..
김우재님 이야기 들으면 정말…..늘…..부럽다는…
인문계 ‘대학생’의 하루를 궁금해하시는 줄 알고
경험의 소치를 인생의 큰 보물로 여기고 사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의견이라
생각했었네요 며칠 교육다녀와서 다시보고 깨닫네요
전 난독증인가요 ㅎㅎㅎ
이런 문제제기와 논쟁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각성하게 하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생산적인 의견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저한테는 어려운 글이 많아 일일이 덧글 달지 못하지만 늘 정성스러운 글에
아직도 여전히 이런저런 생각하고, 이것저것 배우고 있어서 감사하답니다.
참! 며칠만에 들어왔는데도 새글이 없어서 순간 무슨일이 있으신건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한국엔 장대비가 들이쳐 한강이 빨개졌어요 모쪼록 상쾌한 여름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공돌이입니다만, 제 경험상 김우재님 말씀이 구구절절 맞습니다.
물론 같은 잣대의 계랑적인 척도를 내세우는 게 답이 될 수는 없지만… 솔직히 인문학 쪽 친구나 아가들 보면 척도 이전의 것들도 잘 안 합니다.
우선 제가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 중에 저만큼 안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점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 생활을 말씀 드리기 전, 노정태님에 대한 우선 옹호를 하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아직 그분은 석사과정입니다
석사 과정에서 칸트를 보기 위해 뉴턴을 보라는 주문은 주제와 연관이 된다면 모르겠으나 매우 무리입니다
독법이 다르다는 말을 이해시켜 드리기는 어려울 것이고, 장담컨데 석사과정 내에서 삼대 비판서만 다 본다고 해도 매우 많이 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철학과입니다 (이공계 학생처럼 한다면 하루에 한 권이라고 하셨는데… 미친 듯이 열심히 하는 이공계학생처럼 하면 하루에 15-20 페이지가 더 맞을 겁니다. – 원문 독해기준입니다- )
물론 박사 과정에서 칸트를 하시는 분들 중 제가 아는 한, 뉴턴을 읽지 않는 분들은 없습니다. 단 주제 선정에 의해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칸트의 공간 개념으로 박사 논문을 쓰신다면, 그분은 아마 당대에서 시작된 칸트의 공간 개념에 대한 철학사의 비판들에서부터 심리학에 대해 당연히! 공부하실 겁니다.
철학한다는 사람들이 과학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오해십니다. 석사급 말고 박사급을 상대해보시면 생각이 좀 다르실 수 있고 라깡이나 들뢰즈, 현상학 말고 다른 철학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시면 더 뚜렷이 아실 수 있을 겁니다.(인터넷에서 보기는 힘들죠 그런 사람들.)
그리고 노정태님의 질문에 아이츄판다님은 대답하실 것이 남았습니다. 노정태님이 쓰신 글을 이해하셨다고 하시니까 아시겠지만, 삐에르 자네까지 나온 마당에 여기서 멈출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새로 하실 필요는 없어 보이고 포스팅의 이론에 대해 좀 상세한 설명을 해주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삐에르 자네의 후속 작업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적 배경을 얼마나 반영한 것인지.. 사실 삐에르 자네는 심리학자지만 철학과 출신이고 멘 드 비랑에게 영향을 받고 베르그송과 학문적 성과를 공유한 절친이었습니다.(꼴레즈 드 프랑스 실험 심리학 교수 자리에 지원했을때 그의 후원자가 베르그송이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공간 개념에 대한 비판은 전적으로 그 스스로 밝힌 바 ( 꼴레즈 드 프랑스, 인격에 대한 1929년 강의) 그 사상적 기원을 멘 드 비랑에게 두고 있습니다. 물론 멘 드 비랑은 그 윗대의 철학자들 가령 꽁디악 등등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뭐.. 잡설이 길었고.
궁금해하시는 철학과 대학원생의 생활은 이랬습니다
결혼 전에는 수업이 없는 날 아침 9시에 고시원에 들어가서 12시까지 책보고, 12시에 밥 먹고 12시 30분부터 다시 책보고 6시에 밥 먹고 7시에서 새벽 2시까지 책을 봅니다. 물론 저는 술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하루정도 빠지기는 했는데 인문학의 특징은 주말이 따로 없다는 것이죠. 저는 토요일 일요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4시간이 맥시멈이었던 것 같고, 성격이 화끈해서 저는 아예 접는 날(가령 데이트)은 있었어도 12시간 이전으로 공부하는 날은 술 마시는 날(이 날은 수업 있는 날과 겹칩니다) 하루 정도를 제외하면 석사 2년간 거의 없었습니다.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에 9시에 가서 12시까지 책보고, 12시에 밥 먹고, 과사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노닥거리기도 하면서 3시에 수업 들어가서 6시까지 수업 듣고 밥 먹고 술 먹고(주로 술은 수업 끝나고 먹습니다).. 사실 이 수업 있는 날은 개인 공부를 접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방학때는 위의 수업 없는 날과 동일한 스케줄이었습니다.
결혼 이후는 확 달라졌습니다. 아침에 아내 출근 시키고 9시에 학교 도서관에 도착, 12시까지 책 보고, 12에서 13시까지 점심시간. 다시 책 보기 시작해서 6시 아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함께 집으로 오고. 9시까지 저녁 식사와 아내와의 산책 등등. 아내가 잠든 9시에서 10시 사이에 공부시작 2시에 취침. 맥시멈이 12시간이고 대개 하루 10시간 공부합니다.
제 아내는 이공계 학생이었고 연구원이었습니다. 이공계생들의 생활을 알고 있지요. 실험. 어떤 실험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연구실에서 기계 돌려놓고 다들 놀잖아요.(물론 그 시간에 논문 찾아 읽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는 것, 때때로 그런다는 거 압니다만 사람들 모여있으면 대개 그렇죠 뭐..) 실험을 몇 시간 했네, 하는 말 죄송하지만, 제 아내가 불성실한 학자고 연구원이어서 그랬던 거겠지만, 별로 고생스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아서 하는 것들일텐데 뭐가 고생입니까? 반면 책을 읽으면서 잡담이 가능합니까? 실험 10시간한다고 했을 때, 가령 컬쳐해서 기계에 넣어놓고 한가해진 시간이 몇 시간있겠지만, 책 10시간 읽었다고 할 때는 머리가 멍해져서 커피와 담배로 환기시켜주는 몇 분이 아니라면 단 1분, 1초도 없습니다.
요즘은 하루 10시간에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도 생겼고 예전보다 좀 느슨해진 이유도 있어서 주말에는 좀 쉬어주는 편이지만(주말에는 4-5시간 합니다) 무엇보다 체력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위에서 시체처럼 실험실에 간다고 하셨는데, 도서관에서 거품 물고 쓰러지는 전설을 기록하는 이들은 사실 이공계생들이 아니라 인문학도들이죠. 저는 실험하다 과로도 쓰려졌다는 이공계생을 알지는 못하지만, 도서관에서 응급실로 실려간 인문학도(도올도 그중 하나네요 그러고 보니..)는 몇 알고 있고, 유학 중 미치거나 자살하는 이공계생들은 모르지만 인문학도들은 또 몇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비화들은 제가 이공계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쪽에 속해 있었다면 누가 실험하다 과로로 쓰러졌고 미쳤고 자살했네 등의 이야기를 분명 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비율이 인문학도들보다 많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공계생들은 하는 만큼 데이타가 쌓이고 쌓이는 한에서 어쨌든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문학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친듯이 읽고 연구해도 지가 스스로 뭔가 써 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공계에서는 성실하기만 하면 뭔가는 됩니다. 어쨌든 실험하고 데이타를 꾸역꾸역 쌓아두면 똥깥은 논문일 지라도 쓸 수 있고 박사도 될 수 있지만, 인문학 쪽에서는 성실하고 읽은 게 많다고 해서 논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는 읽었는데 뭔가가 나오지 않을 때, 아는 건 많은 데 쓸 게 없을 때, 그 막막함. 그건 이공계생들이 놀고먹고 인문대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막막함입니다.
쓸 데 없는 이야기고 쓸 데 없는 논쟁입니다. 니가 더 고생하니 내가 더 고생하니…
철학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로 쓰여졌고 누구에게나 이해되기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이미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분야지요. 그러나 또 다른 모든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아는 만큼 보이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학계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에서도 전문성을 보지 못하신다면 한번 역으로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몰라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물론 아니실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철학과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공을 ‘칸트’요 ‘데까르뜨’요 등으로 답하고 좀 더 세밀하게 가면 ‘칸트의 공간’이요 ‘데까르뜨의 불연속성’이요 등으로 답합니다. 여기도 전문 분야가 있고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즉 왜 철학한다는 것들이 칸트의 공간에 대해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냐는 비판은 뇌신경 생물학 하는 사람에게 왜 길거리에 있는 나무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냐고 말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비판일 수 있습니다.
제발 쓸 데 없는 것들로 싸우려고 하지 좀 맙시다.
ps. 소녀시대 저도 좋아합니다
인문학 대학원생의 하루를 일반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책 읽고 글쓰고 술마시고 넋두리하고 가끔 토론하고 세미나하고 프로젝트하고 연애하고 숙제하고 여행가고 늦잠자고 늦게자고 게임하고 섹스하고 싸움하고 뒷담화까고 라면먹고 커피마시고 등등 합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합니다. 그래서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조금 많이 불쌍하더군요. 약간의 피해의식도 있는 것 같고. 어떤 후배는 인문계는 너무 공부를 안 하고 놀고 먹는 것 같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럼 너도 인문학 해라. 뭐하러 그 고생하며 사냐?”라고 해줬습니다. 인생을 빡세게 굴리든 널널하게 굴리든 그건 기본적으로 개인의 가치관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널널하게 뉴턴 안 읽고 칸트 읽으면서 혼자 헛소리 해대면 이 세상에 뭔가 큰일 생깁니까? 또 실험실에서 12시간씩 개처럼 실험 안 하면 세상에 뭔가 큰일 생깁니까? 각자 자기 사는 방식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칸트를 공부하려면 뉴턴을 읽어라? 읽고 싶은 사람은 읽겠죠.
위 ‘감투사’님의 코멘트 중,
인문학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친듯이 읽고 연구해도 지가 스스로 뭔가 써 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공계에서는 성실하기만 하면 뭔가는 됩니다. 어쨌든 실험하고 데이타를 꾸역꾸역 쌓아두면 똥깥은 논문일 지라도 쓸 수 있고 박사도 될 수 있지만, 인문학 쪽에서는 성실하고 읽은 게 많다고 해서 논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는 읽었는데 뭔가가 나오지 않을 때, 아는 건 많은 데 쓸 게 없을 때, 그 막막함. 그건 이공계생들이 놀고먹고 인문대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막막함입니다.
참 공감가는 문장입니다.
─
인문학 분야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늘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우선인데,
김우재 님의 글을 보면
그 쪽 분야의 공부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인문학이란 푸념이나 늘어놓는거군. ㅋㅋ
인문학 분야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늘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건 듣도보도 못한 소리인 걸요. 모든 학문이 다 그래야 하거나, 현실은 상당히 그렇지 않거나 둘 다겠지요.
김우재님의 비판을 까기 위한 말로는 굉장히 빈약하다는 거에요. 괜히 되도 않는 이야기로 오히려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인문학에 별 도움 안될 듯하다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공부가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존경이 우선일 듯 싶습니다.
당신의 실험과 연구가 우수하더라도 당신의 생각이 그토록 배타적이라면 당신의 기술 또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일 뿐입니다.
당신의 글에는 분명 자만감이 가득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죠.
─
굳이 “비판(?)을 까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소리”─제가 속해 있는 곳만 그런걸까요?─가 아니라 어떤 분야이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aleph 님은 ‘비판’이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비판’이라고 친절하게 언급을 해주시니,
김우재 님의 글은 더더욱 ‘변질된 코미디’처럼 비춰지는군요.
우선, 글 잘읽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그리 어려운말을 골라가면서 쓰고 싶지는 않네요.
글쓰신 분께서 정말 궁금한 것은 인문계열의 하루, 인문계열 대학원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라고 하시니 저의 대학원 생활을 기본으로 해서 제 주변에 대해서 잠깐 말씀올리죠.
인문계열 대학원에 들어온지도 어언 6년이 넘었습니다. 석사과정 2년 반, 박사과정 2년을 보내고 지금은 학부생들을 가르치면서 개인연구를 한지도 1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적어도 제 지도교수님은 석사같은 경우 4학기만에 졸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믿었던, 그리고 지금도 믿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본인이 연구해야 할 분야에 대해서 제대로 정착되기 힘든 2학기에 석사논문계획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대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앞둔 4학기 정도는 되어야 내가 무엇을 공부해야 하며, 내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본인 또한 그러한 생각에 백분 공감하여 한 학기를 더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채찍질에 따라가기 위해서 단 한 번도 마음도, 몸도 쉰적 없습니다. ‘공부’는 내 업이다라고 믿고 지금껏 나아왔습니다.
또한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스터디(세미나)의 중요성을, 적어도 제 주위의 대학원생들은 다 잘알고 있습니다. 물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도 있죠. 학원가를 전전하던 사람들이 일종의 증을 따려고 인문계열 대학원으로 들어오기도 하니깐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학자라고 볼 수는 없지요. 완전 예외입니다. 그런 곳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할말 없습니다.
건물에 불이 켜진 것을 예로 들면서 어느 계열이 공부를 더 많이하고 오래하는가를 판단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많습니다. 적어도 저희 학교 같은 경우, 인문계열에는 대학원생들이 오래남아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해서 제 주위의 사람들음 모두 집에서 밤을 새야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금전의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각출을 해서 월세방을 얻어 연구실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구요. 이런 사람들은 그럼 뭐가 되는 겁니까??
일주일에 4개의 스터디를 하기 위해서,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새는 것은 기본으로 합니다. 김우재님께서는 12시 이후에 술을 마신다고 하시는데, 적어도 인문학 연구자인 저는 12시 이후에 술마시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잘 것입니다. 12시 이후의 술한잔은 다음날까지도 여파를 몰고 오니까요. 물론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술 한잔하면서 공부얘기도 하고 그런 것, 저 또한 한때는 종종했습니다. 하지만 연구가 업이 되면 그런 시간들도 다 불피요하게 생각되며, 시간 낭비이기때문에 최대한 불필요한 것은 피하게 되죠.(물론 꼭 남자라서 그런 것 아니지만 보통 남정네들이 술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피력하기는 합니다. 어느정도는 저 또한 인정하지만요.) 하루 24시간이 부족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기분상이라도 하루가
48시간이라면 좋겠다며 시간을 만들어볼까도 생각할만큼.
과외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본인만, 이공계열 대학원생만 그럴거라고 생각하나요? 적어도 제 주위의 선후배들은, 그리고 저는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도, 학과 강의조교를 하고, 아르바이트(과외 및 학원 파트타임)를 하고, 스터디를 3~4개하고 수업 3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문계열 대학생의 공부의 본분이 책읽고 글쓰는, 즉 독서하고 글을 쓰는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잘못알아도 아주 잘못알고 계시네요. 독서와 연구는 엄연히 다릅니다. 누군가가 하루에 인문계열을 통들어 철학서를 하루에 한권씩을 읽고 넘긴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냥 독서를 하는 거거나 천재이거나. 적어도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철학서 한 권을 읽는데 일주일도, 한 달도 넘는 시간을 보냅니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담긴 의미 하나하나 판단하는데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인문계열에서 연구하는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독서하고 감상문쓰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공계열에서 하는 건 연구이고 논문이고, 인문계열은 독서이고 감상문(그냥 글)이라고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저는 통열하게 고민하고 고민해서 글을 읽고, 쓰고, 논문을 씁니다. 만약 인문계열에서 하는 건 독서하고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국문과에서 배우는 건 소설 읽고 소설쓰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정정해 주셔야 겠네요.
김우재 님 주위에 있는, 그리고 김우재 님이 들리는 얘기로만 판단해서 인문계열 대학원(학부생 비롯)생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 주위의 이공계열 대학원생들은 모두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 ‘증’을 따기위해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본인이 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가지는 인정해 드리고 싶네요. 인문계열 학부 학생들을 가르쳐본 선생으로서, 적어도 김우재 님만큼 인문학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는 없었으니까요.
진실은 항상 가려져 있는 법입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왜 철학이 있고 인문사회과학이 있겠습니까. 제 말에 어느정도 가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눈에 핏발을 켜면서 매일같이 밤을 새우는 제 학우가 안돼서 하는 말입니다.
제 글을 통해 김우재님이 편견을 버리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어머, 정체나 밝히시고 비아냥거리세요. 점잖은 척 하면서 이죽거리지 마시구요.
인문학 공부했으면 적어도 글 뒤에 있는 투박한 진정성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아요? 말마따나 제대로 못 배운 이공계생이 잘난 맛에 딴지거는 게 영 아니다 싶으면 한 수 높은 양반답게 가르쳐 주시면 되지요.
뭐 그리 대단한 위기 의식을 느끼길래 이죽거리고 지랄이세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김우재님 글에 그런 식으로 말을 하시진 않으셨겠지요. 그러므로 게임 셋.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욕 드시지 말고 (어차피 누군지 모르니까) 다시 진지하게 글을 쓰세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 어떤 분인지는 진지하게 댓글을 써준 다른 분들인 것 같죠?
당신은 절대로 아냐.
모든 댓글을 읽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에 대한 글을 씁니다. 저는 신문에 칼럼 나부랑댄다고 남의 말 무시하는 어린 똘아이가 아닙니다.
이 블로그에서 봤던 글 중 가장 이 블로그의 다른 글들과 상이한 글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다른 글들과 다르지않으나 다른 글들에선 두드러지지 않았던 저의까지 보여주는 글. 본문보다 댓글읽는데 더 시간이 걸렸지만 댓글읽는 시간이 더 길어 다행인 듯.
사회과학계열 대학원생입니다. 저는 이 글 읽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퍼 갑니다. 두고 두고 읽어야 겠습니다.
솔직히 이런 글을 발견할 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마디로 숨겨진 결절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런 발견은 10시간 맨날 돌리다고 발견되는 건 아니지 싶군요. 여튼…
블로그 주인장님께서 표면적으로는 좋은 이야기하지만 실상 가지고 있는 본인 내면의 의견은 폭력의 연장선임을 증명해주는 글인것 같습니다.
그냥 한마디로 반박하겠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위 글에 대한 답을 하자면
모든 공부하는 사람들이 10시간씩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상식을 먼저 생각해라라입니다.
공대생이던 인문학 하는 사람이건… 열심히 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블로그 주인장님께서 인문학에는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대 전제에서 이런 글이 나왔겠지요.
제 생각에 주인장님께서 먼저 증명하셔야 될 명제는 ‘모든 공대생은 10시간씩 존나 열심히 한다’라는 명제부터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부터 하고 인문학도 까야지 논리가 구성될 것 같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것은 인문학 고전 좀 읽었다고 하는 알레페나 블로그 주인장님이시나 똑같이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시각을 가지고 뭔 급진입니까? 그냥 내 맘대로 내 기준에 안 맞는 사람들 까서 죽이고 싶다고 하시는 것이 솔직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폭력적인 시각을 버리자고 존나게 인문학자들이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책 읽었다는 것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뿐인데…
그래요 아무리 폭력적인것 벗어나자고 해도 인간이 하는일 다 폭력적인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학문을 한다는 것, 지식인라는 사람들은, 그리고 지식인이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것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존에 가진 막연히 가지고 있는 편견과 싸워서, 세상일이 단순치 않다는것 그래서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래도 더 나은 설명으로 단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겠지요. 우리가 죽으면 다음 사람이 날 까고 새롭게 단정할테고…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단정하고 폭력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래서 너무 촌스런 이런식의 의견피력은 좀 창피하지요. 고민 좀 하고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알레페님은 확실히 ‘서로를 늘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시고 계시군요.
제가 보기엔 너무나 폭력적으로 보입니다.
제가 아직 학부생인지라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쨌든 졸업반에 학부 수업도 거의 없는지라 대학원생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살폿 말씀드려 봅니다(일종의 변명이랄지=_=;). 주변에서 ‘공부 열심히 한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대학원생의 경우에는 보통 학부생 때 자신의 전공과 관련한 제2외국어와 영어에 대해 기본적인 독해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입학을 합니다(유럽철학 쪽이면 독어나 불어, 동양철학 쪽이면 중국어, 그 외에 그리스어나 라틴어도 요구되는 경우가 있고 일어의 경우 일본쪽 자료가 꽤나 한 깔끔 하는지라 환영받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중역본이거나 번역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자료들이 많기도 하고, 또 워낙에 개념이나 용어에 따라 이해가 크게 바뀌는 분야인지라 한국어(한자어까지 포함해서)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감은 원전을 통해 잡아내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주제넘지만=_=).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일단 해당 원전에 대한 천착이 대학원생의 주된 일과입니다. 에, 이걸로 충분히 피터지게 바쁘다고 말씀드리면 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영어에서 it이나 that이 어느 단어를 받는지, 뭐 그런 문제들로 심하게는 전체 내용에 대한 이해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독해에 투자되는 시간이 많습죠. 약간은 문헌학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겠습니다=_=; 원전독해를 중심으로 연구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관련되는 논문들을 살펴보는 것이 대학원 생활 내내 지속되는(어쩌면 평생=_=?) 일과입니다. 제가 전공하고자 하는 그리스고대철학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원전에 해당하는 텍스트의 여러 편집본(옥스포드 것이 통용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 외에 띄어쓰기나 오, 탈자 수정에 대해 다르게 편집한 판본들이 종종 있습죠), 2차문헌에 해당하는 라틴어역, 독역, 불역, 영역 텍스트들, 이에 대한 각각의 사전들, 다행히 기존 국역본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고대 그리스어는 단어의 용례가 많고 문법이 복잡한지라 종종 한 단어를 해석하기 위해 하루 온종일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 번역 작업 자체가 문맥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설이 될 수도 있는)를 요구하고 또 그에 따라 번역의 결과물도 달라지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라는 것은 텍스트만 붙들고 있어도 항시 돌리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덧붙여 위에 덧글 중에 ‘세미나’ 혹은 ‘학회’, ‘스터디’ 등의 이야기가 나온 듯합니다. 감히 첨언하자면 앞서 말씀드린 번역을 중심으로 모두 모여 강독을 하는 형식의 세미나의 경우 밤잠 설쳐가며 번역해서 가면 하루종일 한 문장 가지고(심지어는 한 단어 가지고) 내내 싸우기만 하다 끝나는 일도 많습니다. 흐, 신세한탄 같군요=_=;
위에 여러분들께서 말씀해 주셨던 내용들이 겹치는 듯하여 죄송스럽습니다만 우울한 마음에 적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해석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이 이공계열과 인문계열 사이의 소통을 막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영미철학 계통에서는 인식론이나 언어철학이 인지과학 등과 관련하여 활발히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경우 논리학을 공통기반으로 두고 경험적 지식과 상식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라는 점이 도움이 되는가 보다 짐작만 하고 있습죠. 아무래도 복잡한 문제로 보입니다. -蟲-
글 잘 봤습니다. 많이 화가 나신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공계든 인문계든 대학원생의 연구내지 실험이 학부때보다 범위가 좁지만 깊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얘기는 뭐냐면, 칸트를 전공한다면, 뉴턴이해가 많은 도움되겠지만, 그걸전공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지요, 꼭 철학이란 학문에는 과학과 연계되어있는 칸트철학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공부하는 철학은 사회학과 관련이되어 있습니다. 너무 과학입장에서만 인문학을 보신거 같아 아쉽습니다. 그리고 황우석사태가 과학도만의 문제가 아니듯, 인문학의 위기를 굳이 인문학도들의 과오문제로만 보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동경하시고 좋게 보셨듯, 이런 문제앞에서도 이공계와 인문계의 상호협조와 이해가 필요한 법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