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사 세미나에서 함께 읽었던 책 Coleman, William, “Bi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의 저자 콜맨은 <확률혁명> Kruger, L, Lorenz Kruger, Lorraine J. Daston, and Michael Heidelberger, (MIT Press, 1999). 의 생리학 파트 ‘Experimental physiology and statistical inference’ 를 저술했다. 단순한 관찰과 실험의 방법을 넘어 생리학이 엄밀 과학이라는 학제로 편입된 것은 언제쯤이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만약 진화론이 다윈의 시대에 엄밀 과학의 영역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다윈주의자들의 전도에 세뇌된 것이다. 다윈의 시대에 생리화학자들과 생리학자들은 다윈의 이론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멘델의 유전학이 재발견되는 시기, 다윈주의자들은 베이트슨 같은 유전학자와 싸우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이론에 엄밀함이 있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윈주의가 정착해 가는 과정은 교조와 주장, 선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피셔가 나타나고, 홀데인과 라이트와 함께 다윈의 이론에 수학적 도구를 제공하는 시기를 지나(그들 사이에서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이어, 도브잔스키, 심슨 등에 의해 근대 종합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근 100여년 동안 다윈의 이론은 표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천적으로 실험으로의 증명이 불가능한 진화론은 수학이라는 분석적 도구의 도움과 여러가지 정치적 도구들의 도움으로 인해 엄밀 과학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디트리히의 다음 논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Dietrich, M R, “Paradox and persuasion: negotiating the place of molecular evolution within evolutionary biology.”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 31, no. 1 (January 1998): 85-111.
생리학에서의 정량화(Quantification)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확률혁명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있다고 말할 때, 과연 생리학은 어떤 방식으로 ‘확률적 사고’를 받아들였는가? 콜맨은 크뤼거가 편집했던 <확률혁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통계적 기법’이 아니라 ‘확률적 사고’를 생리학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면, 시스템 생물학이 부흥하는 1990년대 이전에는 그런 사고를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콜맨이 생리학에 통계적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평가하는 이가 라디케(Gustav Radicke, 1852-1929)다. 라디케라는 수학자가 생리학에 기여했던 역사는 거의 잊혀졌다. 그에 관해 영여로 쓰여진 논문은 단 한 편 뿐이다. Støvring, H, “On Radicke and His Method for Testing Mean Differences.” Journal of the Royal Statistical Society: Series 48, no. 2 (1999): 189-201. 라디케의 방법론은 다음 논문에서도 다루어진다. 이 논문이야말로, 라디케라는 인물은 사라지고 그의 제안만이 학문 내부에 스며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The Application Of Mathematical Formulæ To Medical Statistics,”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 no. 759 (1875): 72 – 73. 이 논문엔 저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생리화학에서 분석기법이 정교화되는 시기에 라디케는 천차만별로 표기되던 생리학의 데이터들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했다. 산술평균과 현재의 표준편차를 사용한 이 단순한 방식은 수학자들에게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생리학자들에게는 당시만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A라는 물질이 동물의 어떤 생리적 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산술평균을 내는 것으로 충분한가? 라디케는 |M1-M2|>S1+S2 라는 단순한 평가법을 도입함으로써 A라는 물질에 의한 생리적 상태의 변화가 유의미한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마련한다. 피셔에 의해서 실험설계가 등장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끌로드 베르나르가 통계적 기법은 생리학을 엄밀과학으로 정립하는 데 있어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베르나르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역사적 맥락이 있다. 생리학 뿐 아니라, 19세기말~20세기 중엽까지, 엄밀한 과학을 지향했던 대부분의 분과학문들은 ‘고전역학’의 방법론을 표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에 확률적 사고가 도입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생리학도 마찬가지다. 특히 생리학엔 생리화학으로부터 이어진 강한 실험과학의 전통이 있었다. 실험처럼 인과과관계를 잘 드러내주는 방법은 없다. 대조군을 통한 비교법과, 실험설계법, 그리고 재현가능성, 이 정도로도 생리학은 충분히 고전역학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생각 된적이 있었다. 그것이 생리학자들이 결국 라디케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다. 21세인 지금까지도, 생리학의 줄기에서 유전학과 생화학을 흡수했던 분자생물학은 라디케가 제안했던 그 소박한 방식으로 실험을 정량화한다. 분자생물학 논문에 나타나는 그 수 많은 막대그래프들엔 여전히 라디케의 제안이 남아 있다. 산술평균과, 표준편차는 철저한 실험설계에 의해 뒷받침 될때, 수학적 기법으로는 충분한 미덕을 갖는다. 분자생물학의 현장에선 여전히 라디케의 100년도 더 된 방법론이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생리학에서 실험의 위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고전역학으로부터 엄밀 과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학과 생리학의 진행방향을 엇갈리게 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과학에서 ‘실험’이 갖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리학에서의 실험과 대조군의 역할을 다룬 논문이 바로 보링의 이 논문이다. Boring, Eg, “The nature and history of experimental control.” The American Journal of Psychology 67, no. 4 (1954): 573-589.
모랑쥬의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는 분자생물학의 성립을 ‘유전학’과 ‘생화학’의 결합으로 본다. 문제는 분자생물학자들이 ‘생리학’이라는 유규한 전통 속에서 여전히 사유하고 있다는 점을 모랑쥬가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모랑쥬가 언제나 강조하는 프랑스 분자생물학의 전통은 오히려 ‘생리학’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제이콥과 모노의 오페론 실험에서 이해될 수 없는 바로 그 부분에 생리학의 전통이 있다. 분자생물학자들은 분명히 유전학과 생화학의 결과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리고 물리학자들의 실험도구들을 철저히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뿌리는 ‘생리학’에 있었다. 그것이 분자생물학이 생화학이나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은 한가지 이유가 된다. 생리학이 과학으로 정초되는 과정의 투쟁은 다음 논문에서 잘 다루고 있다. Schiller, J., “Physiology’s Struggle for Independence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History of Science 7 (1968): 63.
수학자 라디케의 제안이 생리학자들에게 아무런 반대 없이 받아들여졌는가? 끌로드 베르나르의 통계학에 대한 적대감이 보여주듯, 고전역학을 표준으로 하는 엄밀 과학의 기준에서 과연 통계학적 기법은 그렇게 쉽게 생리학 내부로 스며들 수 있었는가? 바로 이 지점에 재미있는 생리학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라디케와 베르나르의 사이에서 통계적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생리학을 엄밀 과학으로 세우려는 시도를 모두 성공시킨 인물. 그 인물은 누구일까? 그 인물 역시 생리학의 정량화 역사에서는 잊혀졌다. 분자생물학의 현장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막대그래프들, 그리고 라디케와 베르나르. 내가 측정량과 확률혁명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이유다. 아마도 질적방법론과 양적방법론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생리학사 혹은 사회학의 정량화 역사는 많은 것을 시사해줄 지 모르겠다. 사회학에 관해서는 얼마전에 포스팅을 한 것 같다. 케틀레라는 인물이 뒤르켐에 의해 사장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질적방법론과 양적방법론이라는 헛된 이분법을 살펴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양화’의 역사는 있어도, ‘질화’의 역사 같은 건 없다. 질적방법론을 운운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편하게 공부하겠다는 헛소리를 교묘한 언변으로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아무리 그들이 ‘윤리학’ 혹은 ‘도덕적 과학’이라는 신념 속에서 ‘질적 방법론’을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양화’를 추구했던 학자들은 ‘비도덕적’이란 말인가? 어림없는 헛소리다.
여하간에 “교과서 위주로 과학철학을 공부했다는” 어떤 철학도에게 이런 것은 과학철학이 아니다.
그나저나 맥주는 역시 벨기에산이 최고다. 영국식 맥주라니, 맥주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펍을 들먹이며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멋진 정리. 그나저나 일에 치여서 시간이 없다. 공부도 해야 하고, ‘가외’의 일도 해야 하는데.
올해말까지 한다며 -_- 블로그 글은 또 왜 다 지워버리셨대
질적인 방법론에 대한 댓글은 처음에도 밝혔듯 한 수 배우고자 올린 것이었습니다. 질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해주신다면, 경청하겠다는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인신공격 위주로 심하게 엇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댓글을 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삭제하였습니다.
어찌되었든 제가 대화를 청한 것이었고, 대화를 잘 컨트롤을 잘 했어야 했는데 불필요하게 서로의 신경만 긁는 해프닝을 만든 것 같습니다. 노여움이 있었다면 푸셨으면 합니다.
이미 말했지만, 질적인 방법론을 따로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 관심사는 오로지 생리학의 정량화 역사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살펴보는 것 뿐이며, 인류학의 질적방법론은 그 속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질 뿐입니다. 저는 질적인 방법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예 알지 못합니다. 그런 방법론을 정립하고 고민하는 것은 인류학자로 보이는 님의 과제입니다.
무엇을 배우실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과학문의 정량화 역사에 대한 텍스트들을 언급해드렸고, 크뤼거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한 확률혁명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방대한 과제들에 대해 저는 모두 알지도 못할 뿐더러, 관심이 제가 몸담고 있는 생리학과 유전학에 쏠려 있는 제한 속에서, 이러한 공부는 그 탐구의 지렛대 역할 정도를 해주게 될 뿐입니다.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는 생리학과 유전학이며, 제가 몸담고 현장의 지식을 가진 분야도 그것이며, 따라서 남의 분야에 대고 왈가왈부하는 짓은 자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의 한 인문학자와의 논쟁은 그러한 과정에서 그의 작업들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건드릴 뿐이지, 그 이상에 대해 전 훈장질을 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습니다. 때가 되면 드러나겠지만, 그 인문학자는 한국사회에서 과학의 위치와, 과학자들의 현실을 다루는데 있어 하나의 사례로 사용될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곤란합니다.
많은 글을 쓰느라 시간이 거의 나지 않지만, 조만간 생리학의 정량화 역사에 관한 또다른 간단한 요약이 올라가게 될 겁니다. 그 속에 질적인 방법론에 대한 힌트가 될만한게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생리학자들도 질적인 방법론?만을 추구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며 분과학문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전 그 역사를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비교하며 한번 그려보려 할 뿐입니다. 배우실 게 있다면 아마도 그 역사에서뿐이실 득 합니다. 전 생리학의 정량화 역사 이상을 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생리학사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무엇을 배우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인류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다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