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트위터에서 오고간 부차적인 발언들이 논쟁의 핵심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이것을 ‘과학과 인문학’ 혹은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충돌 쯤으로 치부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장황하게 글을 쓰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도대체 그런 장황한 글의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도 않은 말들의 의도를 짐작해 글을 쓰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닐 듯 싶다. <논증과 권위>라는 글에서 나는 ‘논증’보다 ‘권위’를 강조했다. 그 글을 읽고는 과학적 방법론과 논증을 혼동하고, 그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비과학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는 심각한 오독이 아니면, 편향확증의 사례가 될 듯 싶다. 어차피 모든 것을 과학과 비과학의 잣대로 판단하려는 편협한 사고 속에서는, 그러한 태도가 과학도 인문학도 구제할 수 없다는 글의 의도가 왜곡되어 읽힐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앞으로는 그러한 장광설에는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장광설들에 대답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싶다.
논쟁 아닌 논쟁 이후 지속된 블로그의 일련의 글들은 그 공부의 과정이다. 나는 이 글들 속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다루어질, 그리고 쓰여질 글들이 어떠한 모양새가 될 것이라는 측면을 드러내 주려고 노력했다. 본업인 연구를 마치고 남들은 휴식을 취할 그 시간에, 틈틈히 논문과 책들을 읽고, 참고문헌들을 정리하며 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내가 평생 탐구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생리학의 정량화 역사>이며, 이를 위해 틈틈히 하는 그 공부가 나의 본령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내가 주말을 할애해 먼거리를 오가며 공부를 하는 이유도, 본업에는 도움도 되지 않을 논문들을 읽으며 휴식을 방해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특히 생리학과 유전학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학문이며, 자신의 학문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과학자는 그 자체로 철학자라는 콜링우드와 왕님의 말을 따라, 내가 현장에서 경험했으며 따라서 과학을 경험하지 못한채 과학에 대한 장광설을 내뱉는 학자들은 가지지 못한 그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학문을 사유해 보는 그 과정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곧 포스팅을 하게될 것 같지만, 최근 콜맨의 논구와 라디케로부터 확장된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학자들의 고민들이 진짜로 나를 흥분시키는 주제들이다.
나는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즐기고 있지도 않고,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분명 나는 그 인문학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음과 모음>이라는 계간지를 통해 C.P. 스노우라는 과학자의 나이브함을 비난했었고, 역사속에서 나타나는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려고 힘을 쏟았다. 아마 다음 편이면 마무리가 될테지만(물론 그것으로는 단행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할 것이기에, 출간 전에 많은 것들이 보충될 것이다) 한 권에 5000원 밖에 안하는 그 책들 사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듯 싶다. 그것들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 같은 허황된 발언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오독의 자유라고 여기겠다. 나는 그 곳에서 어느 정도는 문제들을 명확히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기 블로그에 실린 글들은 그에 비하면 완결된 주장을 담고 있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이 글들을 읽고 어떤 판단을 하건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해아만 하는 말들이 그동안 블로고스피어에서 지속되었던 라캉논쟁의 연장선상에 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과학적 방법론을 무기 삼아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문화비평에 적용하는 시도에 인민재판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또한 정신분석의 비과학성을 애써 지적할 생각도 없으며, 이 논쟁을 과학과 정신분석 혹은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구도로 끌고갈 생각도 없다. 논쟁의 구도를 스노우의 나이브한 관점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그런 구도를 즐기는 이들이 스노우에서 출발하여 고등미신과 지적사기 그리고 과학전쟁의 맥락을 잘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20년 전의 논쟁을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재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되풀이하며 인문학자들이 되풀이해온 대리전을 지속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한국에 근대학문이라는 것이 도입된지 그래도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는데, 언제까지 우리가 외국 학자들의 꽁무니만 쫓아가란 법도 없을 뿐더러, 선학들의 과오를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는 듯 하다. 게다가 앞으로 쓸 글들에서 때때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나름의 문화비평까지 엄두를 내볼 생각인데, 내가 문화비평 그 자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런지도 잘 모르겠다. 훈수를 두고 싶은 이들은 적어도 과학전쟁의 맥락을 넘어 그 이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아래에 펼쳐질 글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주장의 핵심을 담은 아래와 같은 글들은 읽히는 것 같지 않으므로 의도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나의 의도만을 읽을 요량이라면 위의 단락들로 이미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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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과 논증
예를 들어, <논증과 권위>를 비롯한 블로그의 많은 글들이 찰스 샌더스 퍼스라는 학자와 스티븐 툴민이라는 두 학자에 대한 언급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 인문학자가 주된 업으로 삼는다는 문화이론 연구, 그리고 그가 여러 논문들을 통해 주장하고 싶어하는 듯한 문화비평과 문학비평의 비교, 나는 과학자였던 툴민이 과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부터 말년에는 그 지점에까지 이르렀다고 간단히 언급했었던 것 같다. <인문좌파를 위한 논증 가이드> 그리고 실제로 툴민의 여러 저작들은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라깡과 함께 다루어지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논증과 권위> 그렇다면 학자로 살고 싶어하는 어떤 인물은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읽기 전에, “툴민이라는 문제적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호기심을 가져봄직도 하다.
그렇게 툴민의 저작들을 한번 훑어 보았다면 -읽는 맥락에 따라서는- 그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향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툴민의 다음 논문이나 Toulmin, Stephen, “The Construal of Reality: Criticism in Modern and Postmodern Science.” Critical Inquiry 9, no. 1 (September 1982): 93. 프롬의 다음과 같은 논문 Fromm, H., “Stephen Toulmin’s Postmodernism.” The Hudson Review 43, no. 4 (1991): 654–660. 을 찾아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위의 두 논문들에서 툴민을 비판해야 하는 지점들을 포착하는데, 이 사태를 과학과 인문학의 대결로 즐기는 인문학 바닥의 이들은 툴민의 포스트모던 과학에 대한 지적이나,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판단하는 그의 글들로부터 일종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도대체 아무도 그런 지점들을 지적하지 않아 무척 신기해하고 있었다. 즉 모두가 논쟁의 감정적 측면에 경도되어 내 글들의 논거가 되는 툴민을 제대로 읽고 비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영어로 된 논문들을 읽는 것이 귀찮고(논쟁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몇몇 당사자들은 도무지 논문을 참고로 주장을 펼칠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심지어 한국어 이외의 논문들을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실은 어떤 논문도 제시된 적은 없었다- 그들은 순전히 사유로만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거나, 과거 학자들의 주장들은 경청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의 천재들일 것이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 시간이 없었다면 적어도 지난 글에 언급된 오형엽과 이병주의 논문을 따라 한글로 작성된 꽤 많은 공부거리를 마련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그 누구도 그런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충실하게 그런 공부들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김영건 선생 뿐이다. 그의 글들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논쟁의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의 글들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며, 그의 글들을 따라 새로운 공부거리들이 누적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많은 개념들이 명료해지고 있고, 오래전에 읽고 말았던 고전적인 텍스트들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툴민의 저작들 중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책은 <이성으로의 귀환> Toulmin, Stephen Edelston, “Return to reas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243. 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논변의 사용> 툴민스티븐, “논변의 사용.”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에서 고민했던 주제들이 평생동안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저작에서 툴민은 “수사학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서문만 읽고 내팽개쳐 두었던 이 책을 이렇게 다시 집어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 다시 꺼내보니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이사야 벌린에게 빚지고 있다는 고백이 새롭게 다가온다. 벌린이 <낭만주의의 뿌리> 이사야 벌린, 강유원 역, “낭만주의의 뿌리.” 이제이북스 (2005).라는 저서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이고, 이미 몇번의 글을 통해 그 저작을 소개했던 터라 감회가 새롭다. 툴민의 부인이자 과학자인 굿필드의 강연에서도 언급되었던 벌린의 역사기술과 관점은 <과학을 여행하는 인문학도를 위한 안내서>를 참고 그가 과학자건 인문학자건 철학자이건 상관 없이 본받을 만한 것임에 틀림 없는 듯 하다.
툴민의 <이성으로의 귀환>은 서구의 사상을 쥐고 흔드는 ‘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구다. 툴민에 따르면 이 책의 주된 과제는 “이론과 실천(Theory and Practice), 논리학과 수사학(Logic and Rhetoric), 합리성과 합당성(Rationality and Reasonableness)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확립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관한 긴 논의는 관두고, 박은진의 해설을 따라 툴민의 논의를 간단히 맛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박은진, “수사학의 부활, 철학적 사유를 위하여!” 철학과 현실 57 (2003). (박은진은 국내에 얼마 안되는 믿을만한 학자 중 한명이다)
툴민에 따르면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근대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은 ‘이론-논리학-합리성’의 추구과정에서 ‘실천-수사학-합당성’의 추구를 놓치고 ‘이성의 불균형 상태’에 놓였다고 한다(데카르트에 대한 툴민의 탐구는 <코스모폴리스>에서 자세히 논구되니 함께 읽으면 좋을 듯 하다.) 이러한 ‘이성의 불균형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이성으로의 귀환’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상황에 따른 ‘실천’의 과정 속에서 문제해결은 ‘합리성’보다는 ‘합당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그 방법론으로는 ‘논리학’보다는 ‘수사학’이 어울릴지 모른다는 것이 툴민의 생각이다.
수사학에 대한 강조는 그의 처녀작 <논변의 사용>의 확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저작을 통해 툴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부활시키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수사학>의 앞머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은 변증론과 상대항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수사학은 각 대상에서 설득력 있는 요소를 인식하는 능력이다.”라는 말도 했다(자꾸 설득력을 기준으로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도 될 듯하다). 그의 <변증론>의 목적은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에게 제기되는 온갖 문제에 대해서 통념의 입장에서 추론할 수 있고, 또 우리 자신이 하나의 논의 형식을 유지하려는 경우에 모순되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변증론.” 까치글방 (1998).
<수사학>이 <변증론>의 상대항이라는 것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대항 혹은 짝패라는 말은 오히려 둘 간의 유사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법에 편입시킴으로써 수사학이 기술들 축에 속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은 이론의 측면과 능력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수사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사학의 목적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수사학의 주된 관심은 어떤 방법으로 설득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대상에서 설득력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논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석환,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의 철학적 기초.” 철학 74 (September 2003).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논증 이론이 수사 이론의 핵심이어야” 한다. 한석환, “아리스토텔레스와 수사적 논증의 문제.” 서양고전학연구 25 (September 2006). 하지만 ‘수사학’에 대한 오해는 ‘표현’을 강조하는 쪽으로 잘못 흘러갔다. 수사학을 논증이라는 틀 속에서만 사유하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수사학을 표현의 기예로만 사유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수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수사학의 세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그 특징을 밝혔다. 하지만 수사학은 ‘표현’이라는 한 쪽 측면만을 강조한 채 발전되어 왔다. 하병학, “보편교양학으로서의 수사학의 재정립.” 철학탐구 (September 2004). pp. 351.
수사학의 세 가지 측면, 즉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는 무엇을 뜻하는가?
가) 로고스(logos):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와의 관련성을 소홀히 한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절대적 진리만을 추구한 플라톤의 변증론이라는 두 극단으로부터 중도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수사학과 관련된 진리가 어떤 유형의 진리인지를 밝혔다. 그는 수사학이 필연적 진리에 대한 진술은 다루지 않는다 할지라도, 개연성이 높으며 신뢰할 만한 진술과 연관된 모든 영역에 대해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수사학은 진리와 무관하다는 편견을 제시하면서 수사학이 다루는 진리의 특성을 정립하였다. 그에 따르면 수사학은 필연적 진리에 대한 탐구를 특징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사회와 관련지어 참도 거짓도 될 수 있는 주장들이 제시될 때 그 중 보다 더 신뢰할 만한 주장을 밝혀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후략
나) 에토스(ethos):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용, 선한 의지 등 도덕적 과목이 수사학에 있어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수사학은 그에게 따르면 윤리학과 정치학에 속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훌륭한 변론가는 선한 성품의 사람이다. 말을 잘 하는 능력과 말을 하는 의도를 구분함으로써 수사학에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플라톤이 지적했던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단절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는 화자의 도덕적 근거는 화자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도 일조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이는 설득이란 한갓 멋진 표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화자에게 갖는 신뢰에 뿌리는 두고 있음을 말한다… 후략
다) 파토스(pathos):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과정에 있어서 청자의 심리적 작용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추론을 할 줄 알고 성격과 덕망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감정의 움직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이 설득수단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주목하고 <수사학> 2권에서 분노, 너그러움, 두려움 등 다양한 인간의 감정과 이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인간의 유형, 상황 등을 논의하였다. 이는 수사학에서 탐구해야 할 파토스의 영역은 표현 자체를 넘어 ‘표현과 인간 심성과 상황’의 관계라는 점이 확립되었다. 하병학, “보편교양학으로서의 수사학의 재정립.” 철학탐구 (September 2004). pp. 356-359
강조한 부분으로부터 그간의 논의에서 내가 주장했던 것들이 조금은 명료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못알다 듣는다면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현재의 구체적인 의사소통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아니 적어도 해당학문에 대한 학자의 글이 철저한 수사학적 기법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했을 때,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무엇이 될까?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수사학자들이 파토스 중에서도 표현의 기법에만 주목한 것과는 달리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를 균등하게 설득력의 근원으로 규정함으로써 수사학을 보편적으로 안착시켰던 것이다. 수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규정은 수사학을 ‘말의 현란함’이나 ‘말을 통한 기만의 기법’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해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수사학을 “표현”에 국한하여 정의내리는 것이 얼마나 협소하며, 특히 로고스와 에토스를 얼마나 간과해왔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설득력의 근원은 오늘날 우리가 구체적인 의사소통 상황을 분석하고 바람직한 의사소통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기준을 제공한다. 하병학, “보편교양학으로서의 수사학의 재정립.” 철학탐구 (September 2004). pp. 359.
툴민이 <논변의 사용>과 <이성으로의 귀환>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진리와 관련된 논의는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전의 괘변론자들이 해왔던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기술도 아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실천은 이론적인 논의와는 달리 철저히 논리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설득을 논리적인 토대 위에 이론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논의는 가능하다. 즉, 설득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이 꼭 필연적이거나 합리적 근거에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설득의 원리는 이성을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은진, “수사학의 부활, 철학적 사유를 위하여!” 철학과 현실 57 (2003) pp. 244.
즉, 툴민은 “수사학의 부활을 통한 합당성의 회복은 합리성의 영역을 넓혀 논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을 하고 있다. 다루는 대상이 이질적인 학문들의 방법론이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특히 그 방법론의 기준을 과학으로 규정하는 자들이 가장 유치하다. 그들은 종국에는 에드워드 윌슨류의 나이브한 <통섭>의 막다른 통로에서 헤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단순히 라깡이라는 권위에 의존하거나, 수사학적 괘변을 늘어놓아도 상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설득력을 지니느냐의 여부는 부차적이다. 모든 것을 과학 혹은 논리학의 틀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하지만 논리적 논의의 대상이 비논리적이라면, 수사학을 통해서 논의 대상의 합당성을 따져 불협화음을 해소하는 대안이 있다. 그 곳에서 툴민이 주장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수사학의 부활이다. 그것이 대상에 상관 없이 학문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툴민은 주장하고 있다. 여기 어디에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이 있고, 과학주의의 잔상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이쯤에서 멈춰도 좋겠지만, 비평의 영역은 방법론적 제한 없이 수사와 설득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오형엽의 논문 하나를 언급하도록 한다. 이 논문은 문학비평에서 카임 페렐만, 스티븐 툴민, 제임스 크로스화이트의 ‘논증의 수사학’을 함께 다루고 있으니 도움이 될 듯 하다. 툴민은 ‘문채의 수사학’에서 ‘논증의 수사학’으로의 전환을 위해 언급된다. 특히 “제임스 크로스화이트는 미국 오리건 대학 영문과 교수이며 캘리포니아 대학과 오리건 대학에서 철학 및 글쓰기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지도해 왔다”고 하니 경청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아서 읽으리라 믿으며, 결론의 일부만을 옮긴다. 다음의 책들은 이 논문의 준거가 되는 저술들이다. 매우 친절하게도 이미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하니 참고할만 하겠다. 제임스 크로스화이트, 오형엽 역, “이성의 수사학.” 고려대학교출판부 (2001)., 질 고티에, 필립 브르통, 장혜영 역, “논증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이상에서 살펴본 카임 페렐만 스티브 툴민 제임스 크로스화이트 등을비 롯한 논증의 수사학’과 김인환의 대화적 맥락의 비평’을 참고하여 논증의 수사학’과 연관된 문학비평의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모색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비평적 기여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논증의 수사학과 관련된 문학비평은 문체 문채 전의 등 표현 중심의수사학 즉 문채의 수사학’과 관련된 문학비평과 상호보완성을 추구 할 수 있다. 문학작품 자체의 표현의 영역’인 문채 및 기법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내재적 접근방식을 작가‘ 독자 사회 혹은 숨은 화자 표면 화자 내포 청자 표면 청자 등의 논증의 영역 즉 의사소통의 관계망으로 확대 된 접근방식과 결부시킴으로써 비평의 전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말해, 주장하기 질문하기 청중 갈등 등을 중심으로 의사소통의 과정에 주목하는 논증의 수사학을 통해 작품 자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수행하는 내재 비평 혹은 미시비평의 방식에 의사소통의 맥락과 관계망을 폭넓게 고려하는 맥락의 비평 혹은 횡단적 비평의 방식을 결부시킴으로써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현대문학비평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오형엽, “현대문학비평과 논증의 수사학.” 어문논집 5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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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이 ‘최소한’의 합의점이라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 툴민, 박은진 선생님(직접 가르침 주셨던 분이라 존칭을 붙입니다) 모두 동의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최소한의 기준을 좀 덜 엄격하게, 그러나 좀 더 확장시켜 보자는 것,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자는 것 이상의 주장은 도출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고요. ‘과학=논증/비과학=논증없음’이라는 이상한 틀은 저도 거부합니다만, ‘논증/논증 없음’은 부정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비논리적 대상’은 ‘개연적 대상’일 수 없을 것이겠고요. 후자는 논리적 대상에 기초한 파생적 대상 정도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논증의 범위를 확대시키자는 것이 ‘논증이 없는’ 어떤 입장을 학문이라 칭해도 좋다는 얘기로까지 비약하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논증이란 방법론과 ‘학문’이라는 정체성이 무슨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문화비평을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비평’으로 규정하더라도 이것은 일종의 폄하라고 생각할 필요 또한 없어 보입니다. 다시, 타 분과학문들과 ‘소통’하자면 논증을 거부할 수 없다고 보고요. 각 학문의 상이한 대상과 방법론, 역사적-사회적 특수한 맥락 등을 인정하더라도 이게 최소한의 합의점으로서 ‘논증’을 고집하는 입장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지 않을까요? -蟲-
이번에 쓰신 글을 읽고 단숨에 고대문화에 올리신 글과 그 글에서 링크된 June Goodfield 의 글까지 한꺼번에 읽어버렸습니다^^. 특히 Goodfield 의 글을 읽으면서 경탄했던 건, 메타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19세기 영문학의 낭만주의 시인들이나 디킨스와 같은 작가들만이 아니라 F. R. 리비스Leavis(물론 1977년의 영국이면 리비스의 영향력이 아직 어느 정도 건재할 때이긴 합니다만)까지 언급할 정도로 폭넓은 공부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문학작품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는, 현대의 영문학도가 봐도 그럭저럭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견해를 지녔다는 건 이제사 과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인문학도로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합니다.
여튼 이번 글을 읽으면서, 대체로 공감하면서 든 단상들을 리플로 남겨보면… 현재 웹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학전쟁'(‘라캉논쟁’을 포함한)의 양상에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셨지만, 제 생각에는-아마 박사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실거라 믿습니다만-여전히 이 글은 ‘과학전쟁’의 자장 안쪽에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밝히신 태도가 지금까지의 대체로 동어반복적이고 단지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인 언쟁들보다 명백히 더 뛰어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는 이 글이 현재의 ‘과학전쟁’ 안쪽에 있는 여러 네티즌들에게 충실히 읽히기를,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논의의 양상이 함께 전진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다만, 이 글만 아니라 Goodfield 의 글을 읽으면서 같이 들었던(이 글에서 밝히신 입장과 Goodfield 의 강연문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거의 같다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작은 아쉬움은, 다소 ‘과학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인문학도들에게는 어쨌든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사명 및 그 기초적인 방법론(책 목록을 포함해서)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느낌이 들고, 저도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래의 과제 중 하나로 제시해주신 책들을 읽으면서 메타과학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 논쟁에서 (비록 바보같은 구도이지만)다른 편에 서 있는 사람들, 즉 과학도들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 글이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라캉 논쟁의 주축이 되었던 모 블로거 분과 그분의 포스팅에서 전투적인 댓글들을 달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럼 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가(지금 그대로의 태도로 머물러 있어 주는 건 좀 곤란할텐데), 이런 생각이 들긴 하네요. 이 점은 방금 읽은 Goodfield의 글에서도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은 듯 하고요-과학과 사회를 고민하는 논의에서 과학자들은 마치 단순한 논의’대상’에 불과한 것처럼 그려졌다는 인상이 듭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피력하셨음에도 단순히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번에 올리신 글만 놓고 생각했을 때 위와 같은 생각들이 드네요^^;;
버러지 님//
아마도 ‘문화비평’에 좀 더 가까운 입장에서 버러지 님의 리플을 읽으면서 든 물음들입니다만, 먼저 “논증의 범위를 확대시키자는 것”과 “‘논증이 없는’ 어떤 입장을 학문이라 칭해도 좋다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이 될까 의문이 들었어요. 물론 저런 구도로 딱 나눠놓으면 일이 굉장히 쉬운 것 같지만, 무언가가 ‘논증이 없는 어떤 입장’인지를 구체적으로 선별하기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일단 제가 버러지 님께서 말씀하시는 ‘논증’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어쨌든 제가 속한 학문전통은 논증 개념의 이해 자체를 강조하지는 않으니까요) 미리 밝히며,
물론 오늘날 온갖 글들이 ‘문화비평’이란 이름 하에 작성되고 만족스러운 글 못지 않게 불만족스러운 글도 많긴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글들이 읽는 이들에게 글쓴이의 논지를 이해/설득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당연히 좋은 문화/문학비평, 좋은 문화/문학연구는 그러한 설득의 방법으로 일정정도 논리적 틀을 갖추도록 요구받고요. 적어도 논지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논리를 갖추지 못하는 글이 좋은 비평문으로 생각되는 일은 없습니다. 논증의 꼼꼼함의 정도가 다른 학문들과 다르다거나, 다른 학문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른 설득수단이 문학/문화비평에서 통용되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논증과정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로 쓰여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죠(사실 비평에서 논증과정이 완전히 없어지는 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맨 처음에 제기한 바와 같이 ‘논증이 없는’ 어떤 입장을 구별할 때, 논증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논증이 없는 것을 말하는지가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자 그대로 ‘논증 자체가 없는’ 것을 지칭한다면, (비록 모든 부분이 논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그 안에 논증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비평은 그 실례로서 적합하지 않겠지요.
더불어, “문화비평을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비평’으로 규정하더라도 이것은 일종의 폄하라고 생각할 필요 또한 없어 보입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서 분과학문들 간의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논증을 꼽으셨으니, 버러지 님의 논리 안에서라면 학문이 아닌 문화비평은 다른 분과학문들과 소통을 기대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적어도 문화비평이나 문학연구자들에게 이것이 ‘폄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진 않을 듯 싶고요^^; 더불어 실제로 (뭐, 많이 툭탁거리긴 하지만)문화비평이나 문학연구가 다른 분과학문들과 소통이 안 되고 있는 상황도 아님을 감안한다면 버러지 님의 입장은 의도하셨으리라 짐작되는 바보다 훨신 강력한 주장을 도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네요.
어쨌든, 김우재 박사님은 모르겠고, 저나 버러지 님이나 학문에 있어서 최소한의 논증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입장이 같으리라 생각되긴 합니다^^(뭐, 제가 여기서 사용하는/받아들이는 ‘논증’의 개념과 버러지 님의 그것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없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만…)
박은진 선생은 이름 걸고 낸 번역서 중에 폭탄이 좀 있는게 흠임;;
1. ‘논증’은 근거와 주장이 논리적으로 관련지어진 것이겠고, 제가 ‘논증이 없다’고 말할 때에는 1)정말로 아무런 논리적 형식도 준수하지 않고 있는 경우, 2)중심(핵심?) 주장이 근거들을 통해 논리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경우 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 두 경우 이외에 ‘정도의 차이’를 가늠할 기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2. 비평 쪽은 문외한인지라, 섣불리 말씀드린 점은 사과드립니다. 다만 문화비평의 수단으로 종종 활용되는 여러 특수한 개념들 혹은 용어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의미를 갖는 사상체계들이 ‘사용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자주 받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경우만 염두에 두어 말씀드린 것이고, 또 ‘비평’이 학문과 소통하지 않더라도 독자들, 대중들과 ‘감성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독립적인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아무튼 BeGray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蟲-
지적하신 문제거리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버러지 님//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1. 말씀하신 정의 대로라면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문화비평/문학연구의 경우 ‘읽을만한 글’이라고 합의된 것들 중의 다수는 논증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적어도 제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곳에서는 이 덕목이 강조되고 있으며, 오히려 동학들의 글을 볼 때 지나치게 논증의 안정성에 신경을 쓴 나머지 ‘새로움’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2. 말씀하신 바와 같은 사례가 일부 있음은 저도 인정합니다(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이 아닌 학계로 시선을 돌리자면 대세를 점하는 쪽은 그러한 사례와 정 반대의 성향이라고 봐야겠지요). 다만, 예컨대 최근의 논의의 가운데에 선 라캉의 이론을 들자면, 개인적으로는 그쪽에 별다른 흥미가 없지만 그러한 이론틀에서 (부분적으로나마)착상을 얻어 주목할만한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초점은 이론연구자들이 이론틀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에 달려야 할 것 같은데, 문학/문화비평 내에서 논쟁이 붙는 대신 분과학문들간의 대립으로 나가면서 특정 이론틀의 사용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물론 덕택에 저는 귀중한 공부거리들을 듬뿍 얻는 소득이 있었지만요ㅎㅎㅎ).
역시나 비평분야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제가 여러 실수를 한 듯합니다. 하여간 저 역시도 BeGray님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견들 주시는 분들 틈에서 많이 배우게 되어 기쁩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