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에거튼(Francis Henry Egerton, 8th Earl of Bridgewater, 1756-1829) 백작은 영국에 살던 엄청난 부자였다. 그의 취미 중 하나는 개들을 위한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에거튼 백작이 천민자본주의의 화신으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국왕립학회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8,000 파운드를 기부하기도 했다. 기부의 목적은 “창조 과정에서 선포된 신의 권능, 지혜, 그리고 선함에 관한(On the Power, Wisdom and Goodness of God, as manifested in the Creation)” 학술 논문을 출판하기 위함이었다. 이 돈은 8명의 저자들에게 1,000 파운드씩 돌아가게 되는데, 그 결과물이 “브릿지 워터 논문집 The Bridgewater treatises on the power, wisdom and goodness of God, as manifested in the creation. Treatise I-VIII” 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저자 중에는 영국의 저 유명한, <귀납적 과학의 철학 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founded upon their history >의 저자이자, 성공회 성직자이기도 했던, 어쩌면 최초의 과학철학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 윌리엄 휴월(William Whewell, 1794-1866)도 있다. 8편 각각의 제목만 간단히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v. 1. On the power, wisdom and goodness of God as manifested in the adaptation of external nature to the moral and intellectual constitution of man, by Thomas Chalmers. 2d ed.
v. 2. On the adaptation of external nature to the physical condition of man, by John Kidd. 5th ed.
v. 3. Astronomy and general physics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natural theology, by William Whewell. 7th ed.
v. 4. The hand, by Sir Charles Bell. 4th ed.
v. 5. Animal and vegetable physiology, by Peter Mark Roget.
v. 6. Geology and mineralogy considerd with refernce to natural theology, by William Buckland. 2d ed.
v. 7. On the power, wisdom and goodness of God, as manifested in the creation of animals, by William Kirby. 2d ed.
v. 8. Chemistry, metereology, and the function of digestion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natural theolgoy, by William Prout. 2d ed.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의 <자연신학>과 시계공 이야기는 페일리 자신의 저술때문이 아니라, 토마스 헉슬리와 이후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지만, ‘브릿지워터 논문집’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저자들 중 한 명인 벅클랜드(William Buckland, 1784-1856)는 당시 막 전문과학 분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던 지질학,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 학파의 수장이었다. 잉글랜드 학파는 홍수설을 주장했는데, 수 많은 반론에 부딪혀 결국은 격변설을 토대로 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게 된다. 벅틀랜드의 제자 중 한명이 바로 찰스 라이엘 경(Charles Lyell, 1797-1875)이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가 비글호를 타고 떠나던 다윈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프레드 러셀 월러스와의 공동 논문을 작성하는 중재안이 라이엘에 의해 제안되었다는 일화 등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역사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현대의 관점에선 창조과학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과학자의 제자 중 한 명이, 결국은 진화론을 과학으로 만드는 데 가장 일조한 학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벅클랜드의 홍수설과 그 확장판인 격변설은 모두 자신의 제자 라이엘이 완성한 ‘동일과정설’에 의해 반박당한다. 홍수설은 2류 성서지질학으로 추락했고, 격변설은 라이엘에 의해 패퇴당하는 분위기였다. 청출어람, 그리고 또 다시 다윈이 라이엘을 앞서니 청출어람의 연속기인 셈이다.
페일리의 자연신학은 18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식인들과 대중에게 분명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자연신학>의 출간이 1802년 이었지만, 적어도 19세기 중반, 길게는 1902년까지 이 책은 캠브리지 대학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과목에 대한 시험준비용으로 요약서까지 출판되었다고 하니, 페일리의 자연신학이 영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페일리의 ‘설계 논증(Argument from Design)’이 19세기 들어 점차 그 확고한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는데 있다. 점점 더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었고, 자연과학의 각 분야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브릿지워터 논문집은 바로 이러한 ‘자연신학’ 위기의 시대(1836년)에 때마침 출판된다.
에거튼은 브릿지워터의 마지막 백작이었다. 그는 페일리의 자연신학에 심취했던 책 읽는 백작이었던 것 같다. 그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에 관한 최근의 지식과 과학적 발견으로부터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을 확증시켜 줄 수 있는 저서들이 집필되기를 바랬다. 브릿지워터 논문집의 출판과정은 다음 논문에 잘 요약되어 있다. Brock, Wh, “The selection of the authors of the Bridgewater Treatises.” Notes and Record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21, no. 2 (1966): 162–179. 저자의 선정은 당시 왕립학회의 회장이었던 길버트(D. Gilbert)와 켄터베리 대주교 호울리(W. Howley), 런던주교 블룸필드(C. Bloomfield)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선발의 기준은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이면서, 우수한 문장력을 갖추고, 대중적인 저술이 가능한, 정통파 신앙인이었다. 한 명의 신학자, 네 명의 의학자와 세 명의 천문, 지질학자들이 선정되었다. 그들 모두 왕립학회의 회원이었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기도 했다. 출판된 여덟 권의 저서 가운데, 벅클랜드와 휴월의 것은 대중적으로도 매우 인기였다고 한다. 벅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면 좋다. 브릿지워터 논문집에 관해 찾을 수 있는 국내의 유일한 논문이었다. 재미있게도 창조과학회는 이런 소중한 논문집에는 관심도 없는 듯 보인다. 박영욱, “William Buckland(1784-1856)의 Geology and Mineralogy -자연신학과 지사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12, no. 1 (September 1990).
그렇다면 브릿지워터 논문집은 구체적으로 당시의 영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대중적으로 이 출판물은 잘 팔리는 대중과학서로서 구실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많은 지식인들이 9번째 브릿지 워터 논문집, 10번째 브릿지워터 논문집 등의 이름으로 청하지도 않은 저서들을 출판했다. 그 영향력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면 된다. Topham, Jonathan, “Science and popular education in the 1830s: the role of the Bridgewater Treatises.”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25 (1992). 간단히 초록을 옮겨둔다.
As is widely known, the Bridgewater Treatises on the Power, Wisdom and Goodness of God as Manifested in the Creation (1833–36) were commissioned in accordance with a munificent bequest of the eighth Earl of Bridgewater, the Rev. Francis Henry Egerton (1756–1829), and written by seven leading men of science, together with one prominent theological commentator. Less widely appreciated is the extent to which the Bridgewater Treatises rank among the scientific best-sellers of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ir varied blend of natural theology and popular science attracted extraordinary contemporary interest and ‘celebrity’, resulting in unprecedented sales and widespread reviewing. Much read by the landed, mercantile and professional classes, the success of the series ‘encouraged other competitors into the field’, most notably Charles Babbage’s unsolicited Ninth Bridgewater Treatise (1837). As late as 1882 the political economist William Stanley Jevons was intending to write an unofficial Bridgewater Treatise, and even an author of the prominence of Lord Brougham could not escape having his Discourse of Natural Theology (1835) described by Edward Lytton Bulwer as ‘the tenth Bridgewater Treatise’.
브릿지워터를 자세히 읽을 생각도, 크게 권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이러한 논문집의 출판과정과 그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좀 배웠으면 하는게 있다. 첫째, 영국 부자들의 학문에 대한 애호다. 이건 한국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8,000 파운드가 당시 돈으로는 약 20억원을 넘는 돈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돈을 자신의 진지한 학문적 관심을 위해 쾌척할 부자들이 한국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자식들 유학비용으로나 쓰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겠다.
둘째,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보여주는 지적 성실함이다. 이런 저작이 있다면, 학술적 논쟁이 가능해진다. 물론 과학은 이미 세속화되었고, 과학자들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이론 건설에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 되었지만, 내 말은 창조과학 같은걸 하고 싶으면 무려 180년 전의 선배들보다는 좀 수준 높게 하라는 것이다. 창조과학은 지적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지적설계론자들은 학계에서 가끔 논쟁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지적 성실성 때문일지 모른다. 유치하게 성경무오류설 같은 구닥다리 논증이나 그것도 외국에서 빌려다가, 순진한 중/고등학생들을 현혹하는 한국창조과학회의 수준은 브릿지워터 논문집과 비교하면 너무나 확연하다.
나는 창조과학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것이 생물학자라도 마찬가지다. 창조과학에 뜻을 두고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열심히 함께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유치한 이론을 가지고, 즉 과학적인 토론의 장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그런 이론들을 가지고, 심지어 교과서에 창조과학을 집어 넣어야 한다던가 하는 쓸데 없는 난동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혹은 대학교의 과학 강의에서 버젓이 창조과학을 가르칠 생각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공적인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사적인 영역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추구는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대학의 과학 강의실이나 과학교과서는 아니다. 게다가 그런 공적인 영역에서 토론하기엔 한국창조과학회의 수준이 너무나 낮다. 그들은 과학의 영역은 커녕, 철학의 영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브릿지워터 논문집이 보여주는 논증의 수준, 아니 그보다 윌리엄 페일리가 보여주었던 논증의 수준에서 그들은 오히려 퇴보해버렸다. 진정 창조과학을 분과학문으로 끌어올리고 싶다면, 우선 180년 전의 선배들이 쓴 이런 책이나 읽고 스스로의 수준을 반성해 볼 일이다. 페일리는 당신들처럼 유치한 뽕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중세 교부나 토미즘 전통이 많이 세퇴한 것도 창조과학 드립이라든지 도킨스나 호킹의 신드립이 창궐(?)하는 데에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교가 교육기관의 역할을 상당부분 상실하였기도 하고 말이죠. 꽤 예전에 트위터에서 Gary Gutting이란 사람의 글을 본 기억도 있고 신학 내부에서 여전히 긴 역사와 급변하는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신학 쪽에서 적극적이고 유의미한 반발이 제기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뭐 딱히 창조과학이 신학쪽에 ‘표면적’으로 해가 되는 것도 없겠고. 자연과학진영에서는 ‘무시’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맞지 않나 싶은데 이건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 믿음(신앙?)과 객관적 사실 사이의 문제라니 사실 군침이 줄줄 흐를만한 떡밥이긴 하지만 말이죠; -蟲-
왕님이 저보다 이 작업에 대해 더 능통하시고, 이미 하고 계시니 그 쪽을 참고하시면 더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블로그는 아실테죠?
진즉에 즐겨찾기 해두었지요^^ 찬찬히 살펴 보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蟲-
저기.. 왕님의 블로그가 바뀌었나요? 언젠가부터 접속이 안 되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http://blog.daum.net/good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