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실험철학 Experimental Philosophy‘이라는 신조어를 만난다. 고전을 다시 읽어내는 것만으로 학문이 가능한 철학계에도 언젠가부터 첨단학문이라는 유행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긴 하지만 (지젝, 지젝, 지젝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불과 10년전이었다면 그대는 들뢰즈, 들뢰즈, 들뢰즈를 읽었어야만 하는 것이다. 철학에도 과학의 종설논문이 등장해야 할 때다. 특히 프랑스 이론을 선호하는 철학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지젝 다음에는 누가 될 것인지 100달러 내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실험철학이라는 주제는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것이라 잠시 시간을 내어 이 신조어의 정체를 추적해 본다.
실험철학이라는 용어는 조슈아 놉(Josua Knobe)의 2004년 논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Knobe, J. (2004b). “What is Experimental Philosophy?” The Philosophers’ Magazine, 28. 조슈아 놉이라는 젊은 철학자가 인지과학 협동프로그램의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이 분야를 이끌고 있는 것 같으며, 그가 션 니콜즈(Shaun Nichols)와 공저한 <실험철학 Experimental Philosophy>에 실려있는 <실험철학 선언>에 따르면 실험철학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It used to be a commonplace that the discipline of philosophy was deeply concerned with questions about the human condition. Philosophers thought about human beings and how their minds worked. They took an interest in reason and passion, culture and innate ideas, the origins of people’s moral and religious beliefs. On this traditional conception, it wasn’t particularly important to keep philosophy clearly distinct from psychology, history, or political science. Philosophers were concerned, in a very general way, with questions about how everything fi t together.
인간의 조건에 관한 질문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일상적인 활동이었던 적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해 고민하곤 했다. 그들은 이성, 열정, 문화, 본유관념,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종교적 믿음의 기원에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에 대해서라면 철학이 심리학, 역사학, 정치과학 등과 경계를 짓는 것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매우 일반적인 측면에서 철학자들은 모든 것이 잘 들어맞는지에 관한 질문들에 관여하곤 했다.
The new movement of experimental philosophy seeks a return to this traditional vision. Like philosophers of centuries past, we are concerned with questions about how human beings actually happen to be. We recognize that such an inquiry will involve us in the study of phenomena that are messy, contingent, and highly variable across times and places, but we do not see how that fact is supposed to make the inquiry any less genuinely philosophical. On the contrary, we think that many of the deepest questions of philosophy can only be properly addressed by immersing oneself in the messy, contingent, highly variable truths about how human beings really are.
새로운 운동인 실험철학은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지난 세기의 철학자들처럼, 우리도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고려하려고 한다. 이러한 질문으로 말미암아 우리 철학자들이 난잡하고, 불확실하고, 시공간에 따라 천차만별인 현상들의 연구에 둘러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것은 진정한 철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대로 우리는, 많은 철학의 심오한 질문들이 난잡하고, 불확실하고, 인간의 존재에 관한 매우 다양한 진실들에 발을 담글 때에만 제대로 대답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험철학 선언> 중에서
실험에 관한 요구, 아니 ‘엄밀함’에 대한 철학에의 요구는 오래된 것이다. 칸트에게 그 요구는 뉴턴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권위로 나타난다. 헤겔에게 그 요구는 역사학에 대한 요청으로 등장하며, 마르크스는 이러한 엄밀함에 대한 추구를 세포생물학자의 현미경 관찰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비유로 표현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엄밀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조차 정신분석을 그러한 엄밀함의 도구로 여겼는지 모른다. 철학에 대한 엄밀함의 요구는 분석철학에서 가끔씩 사고실험으로 등장하곤 했다. 존 설의 ‘중국인방 논변’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실험주의자들로부터 벗어난 이 철학이란 무엇이었을까? 분석철학이 지배하던 시절(제2차 세계대전 전후 수십 년)에 그 대답은 이러했다. 현재 철학은 최고의 철학이 항상 취해왔던 형태, 즉 개념분석이다. 이것은 개념을 명료하게 설명하거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의미란 화자가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아는 것이므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자신의 언어적 능력 너머를 보지 않고도 이미 개념 분석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가령 “지식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다”와 같은 철학적 주장들은 (만약 참일 경우) 그 속에 들어 있는 단어의 의미로 인해 참이 된다. 그것은 칸트가 ‘분석적’ 진리라 부른 것으로, 칸트의 말에 의하면 술어는 (비록 은밀한 형태이긴 하나) 주어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방식의 철학 연구는 특정한 의미 이론을 전제로 한다. <윤리학의 배신> 25쪽.
실험과학자들의 실험과 물리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실험이 철학에 필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이러한 필요성에 관해서도 수많은 탐구가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리고 그러한 탐구야 말로 철학의 진정한 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철학의 역사에서 주장의 합당함은 ‘논증’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왔던 것 같다. 적어도 논증의 형태로 주장이 전개되는 경우라면, 굳이 실험을 통해 근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혹은 타 분야 학문의 실험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실험철학의 요구는 상당히 완화될 것임이 분명하다.
실험철학이 제기하는 철학에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보면, 이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철학이라는 순수한 학문의 존립근거가 위협되는 것이 분명하며,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단순히 “철학의 순수함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분과 학문들의 성과를 충분히 활용하라”는 명령으로 대체할 수 있다. 특히 존재론의 영역에서 이론물리학과 생물학에, 인식론의 영역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에 많은 자리를 내어준 철학의 역사를 생각해 볼때, 실험철학의 요구가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는 찾기 어렵다. 아마도 이러한 요구는 철학이 자리를 내어주길 꺼려하며 과학의 성장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철학이 과학의 시녀가 되고,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세기에 등장했어야 옳을 것이다. 실험철학의 요구는 ‘분과 철학에 대한 적합성’이라는 틀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엄밀함에 대한 철학에의 요구가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분야는 아마도 윤리학일 것이다. 윤리학은 텍스트에 대한 요구를 넘어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실제로 법과의 공조를 통해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철학의 유일한 분과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주장들이 단순히 텍스트와 논증의 권위에 기댈 뿐이라면, 윤리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러한 요구에 따를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것이 콰메 앤터니 애피아(Kwame Anthony Appiah)와 같은 윤리학자가 실험철학에 관심을 두는 연유일 것이다. 또한 아마도 그것이 어니 소사 (Ernie Sosa)와 같은 사변철학자들에게서 실험철학이 공격받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의 책 <윤리학의 배신>에서 애피아는 철학에서 ‘실험’이라는 개념이 도대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키워드인 ‘실험’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에서 내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여러 장에 걸쳐 우리는 도덕적 기질과 관련된 다양한 실험 연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자로서 철학이 이러한 논의에서 차지할 역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과정에 임했으며, 인정하건대 심리학이나 경제학적 관점보다는 철학적 관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다른 학문 분야에서 제시된 다양한 통찰과 발견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만, 그들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 철학자들이 그 특유의 견해를 읽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여러 실험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은 기꺼이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독자적인 실험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나는 독자들이 이 책 전체를 하나의 실험으로 생각해주기를 원한다. <윤리학의 배신> 6쪽.
그리고 도대체 왜 윤리학에 실험이 요구되는가에 관한 애피아의 대답은 아래와 같다.
경험주의의 독단적 견해를 버린 콰인은 우리가 ‘사변철학과 자연과학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보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이후 발표한 논문 <자연화된 인식론>에서는 인식론이 기존의 규범적 목표를 버리고 ‘자연과학에 포함’될 거라고 제안하는 동시에 “물론 각기 의미는 다르겠지만, 인식론은 자연과학에 포함되고 자연과학은 인식론에 포함되는 상호 포함이 나타날 것”이라고 인정했다. 콰인의 견해에 대한 전망, 아니 사실상 이 견해가 지닌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규범성이 가장 주된 요소가 되는 도덕철학이 그러한 상호 포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매우 분명해졌다. 철학의 대대적 분리는 순수 분석철학가들에게 유예 기간을 부여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유예에 불과했다. <윤리학의 배신> 40-41쪽.
물론 철학에 논증조차 허용하려 하지 않는 한국 (일부 혹은 상당수의) 철학자들에게 실험철학은 요원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논증이 철학의 최소한의 요건이 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험철학은 철학에 어떤 실천적 요구를 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를 묵살한 채, 실험철학을 수입해 이를 또다시 하나의 분과로 삼아 밥벌이의 도구로 혹은 몇편의 논문을 공짜로 얻으려는 순간의 오락으로 삼으려는 이들의 태도는 그러한 의미에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특히 “철학적 실천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된 논문을 발제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실험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실험철학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강단과 책상을 벗어나 현장과 실험실로 달려가라는 실천일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을 위해 나는 어떠한 실험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이는 애피아와 놉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것이 철학의 엄밀함이 반드시 실험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