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학철학은 현장의 과학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 문제는 해결가능하다. 그들이야말로 과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질래야 질 수 없는 학문적 긴밀함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는 과학철학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므로, 과학철학의 비현실성은 언젠가 수정될 운명에 처해 있다.
2. 과학사는 그 반대의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논리적 체계, 즉 내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연구한다는 특성, 특히 역사학적 방법론을 통해 과학에 접근한다는 특성 덕분에, 과학사는 점점 독립된 인문학의 영역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하버드의 총장 코넌트의 도움으로 쿤이 등장할때까지만 해도, 과학사를 통해 과학의 내부를 관통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사가가 현재의 과학에 조언을 하는 행동은 비웃음을 사게 마련이다. 조언이 가능한 부분은 과학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과학기술정책 혹은 연구윤리와 같은 부분들이 그것이다.
3.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사회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몇번에 걸쳐 지적한 바 있듯이, 과학사회학이 한국 사회의 과학계에 던지는 조언들은 지나치게 개인화된 윤리들 뿐이다. 과학자 개개인의 윤리의식이 고양되면 과학계가 바뀔 것이라는 나이브한 희망을 지닌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학자적 무능을 표시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과학사학자들의 어이없는 조언으로 대표적인 것이 박성래 등이 주장하는 ‘중인의식‘이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그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다룬다면서도 이처럼 근거 혹은 인과관계조차 제대로 댈 수 없는 주장들로 과학자들에게 꼰대질을 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중인의식(中人意識)을 극복해야 한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 부조리가 한국과학계의 문제점을 만들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민족과학운동’이다.
중인은 실생활과 관련된 일을 하니 부를 축적하기 쉽고, 이를 통해 연구와 출판이 가능한 여건을 확보한 계층이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같은 중인들과 결혼하며 계층을 존속해 왔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부자 ‘변승업’ 역시 중인 계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중인층 족보기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실존인물이었다. 중인은 부와 실력을 갖춘, 양반에 비해 천대 받긴 했어도 특혜 받는 계층이었다. 이런 중인들의 생활방식이 이공계학, 인문학을 철저히 구분 짓는 한국 특유의 문화를 낳았다.
과학기술인과 그 밖의 지식인은 서로 아는 척할 필요도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갈래 지식인을 만든 것이 바로 중인의식.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모든 지식인이 사회활동에 참여토록 노력해야 한다.
중인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평소 주장해 오던 ‘민족과학’ 정신. 중인의식을 극복하고, 교육을 통해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늘여야 한다. “아직도 한국 과학계엔 조선시대 中人의식이…”에서 부분 발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처럼 과학자들에게 모욕이 되는 강연을 과학자들이 돈을 쳐들여가며 초청해 듣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진정 박성래의 지적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성래의 ‘중인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한국과학계의 문제를 개인적 윤리의 차원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이다. 과학사가들만 이런 것은 아닌데, 과학사회학자들 중에서 이런 무능한 분석에 능한 이들이 더욱 많다. 특히 생명윤리학자들이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이런 학자적 무능함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일일이 지적하기도 어려우니 최근에 송성수가 쓴 칼럼에서 이러한 행태를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논문 투고자는 물론이고 논문 심사자, 학술지 편집인 등 모든 연구자들이 연구윤리에 더욱 민감해져야 하며, 자신이 속한 연구계에 적합한 연구윤리규정을 정비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연구계는 진정한 전문가집단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며, 연구윤리의 문제가 필요 이상으로 정치화되는 폐단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연구윤리의 바람직한 정착을 위해“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송성수가 생각하는 연구윤리의 정착방안은, 개개인이 윤리적 인간이 되고, 논문심사자와 편집인이 윤리적 인간이 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미국의 문제도 미국 개개인이 모두 윤리적 인간이 되면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세계평화를 이루고야 말 것이다. 이런 헛소리는 황우석 사태 이전부터 지금까지 10여년을 이어져 오는 것으로, 따로 거론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지겨운 종류의 것이다.
생명윤리학자들의 헛소리는 더욱 즐겁다. 예를 들어 최근 발표된 이영희의 논문 <황우석 사태는 얼마나 한국적인가?>의 진정한 아스트랄함을 느껴보도록 하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른 한편으로 논문조작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황우석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지속되었던 점에 초점을 두고 황우석 사태를 보면 황우석 사태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현상의 근원에는 대체로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한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우석 사태는 얼마나 한국적인가?>의 요약문에서 발췌
과학학자들이 한국의 과학계와 관련된 꼰대질에서 개인화된 윤리에밖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준다는 나의 지적은 이런 학자들의 여러 논문들을 오랫동안 읽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과학자 개인의 윤리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이젠 황빠현상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한국인의 ‘한의 정서’로 환원시키고야 마는 이런 학자들의 파렴치함을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홍성욱, 이영희, 김환석, 김동광, 송성수, 김영식, 박성래 등등의 한국 과학학 우두머리들의 글을 읽어보라. 많은 것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실상 내가 가장 어이없어 하는 부분은 과학에 염증을 느낀 많은 과학도들이 이들의 밑에 들어가 과학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현실이며 (그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과학학을 탐구하는 것이라 믿고 싶지만), 이들의 텍스트를 읽으며 컨텍스트 없이 과학을 피상적으로 경험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칭 진보적이라 규정하는 이공계 대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진보적 세계관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에, 손쉽게 인문좌파들의 이론을 빌려오려는 게으름을 보여준다. 어이없겠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한국사회에 여전히 과학이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는 퍼스가 ‘과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자신의 과학철학에 왜 집어넣었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