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트윗이 문제였던 듯 싶다.
j.mp/RJNmQK “우리들의 염려가 깊을수록 파시즘적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 파시즘적 체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염려를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탄생할 수도 없다.” 참 자신있게 말씀하시어요…
— 초파리형 좌파 (@RevoltScience) 7월 9, 2012
<자유주의와 불안(anxiety) 및 공포(terror)의 개념>이라는 글은 강신주의 <지금 우린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라는 글이 전제하고 있는 견해들을 정치사상적으로 다시 풀어내어 설명한다. 그러니까 강신주가 염려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배경에는 자유주의가 존재하고, 자유주의의 부패는 (칼 슈미트와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파시즘의 도래로 이어질 것이므로, 염려가 초래하는 파편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을 조장하는 이 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으니 오늘 여기 로두스에서 뛰라는 뜻으로 읽힌다. 강신주의 글에서는 명료하게 이해가지 않았던 부분이 새롭게 읽힌다. 그러니까, 강신주의 글은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칼 슈미트 그리고 벤야민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거나, 혹은 강신주를 변호하는 사람이 강신주의 글을 저렇게 창조적으로 해석해냈다는 뜻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무엇이건간에, 내가 아주 짧게 강신주의 기사를 ‘디스’한 것은 염려사회와 파시즘의 인과관계에 대한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답한다. 특히 나는 여전히 파시즘의 도래를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저런 사고방식이 그다지 유익하지도 건설적이지도 않은 철학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신주의 <염려사회>에 조소를 보낸 이유는, 도대체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대중의 행동양식을 ‘파시즘’으로 낙인찍는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디워빠, 나꼼빠, 황빠, 노빠 등의 신조어를 양산해내면서, 이러한 모든 사건들에 파시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런데 도대체 파시즘이 무엇인가. 우리는 파시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도대체 파시즘에 대한 경제사회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채, 자유주의적 개인들의 염려가 파시즘으로 흐를 것이라고 ‘염려’하는 철학자의 저런 안일한 지적 유희를 뭐라고 평가해야 하는가.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제멋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강유원은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을 번역하면서 그 머릿말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서 파시즘 논의는 서구의 파시즘 논의가 가진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적 수용과정에서 생겨 난 난점들까지 더해져 그 혼란이 더없이 크다. 군사독재에 대해서도, 파편화된 대중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취 향을 강요하는 짓에 대해서도, 심지어 일상에서 벌어지는 억압적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라는 표찰을 붙여왔 다. 아예 파악해보려는 생각을 접는 것이 파시즘을 파악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인 듯하다. ‘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강유원 옮김)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오르테가는 파시즘을 정의하면서 “파시즘은 항상 A이면서 A가 아닌 것이다”라는 말로, 파시즘을 정의하는 난해함을 표현했다.
“(파시즘은) 스킨헤드와 지식인에게 호소하고,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도 부르주아를 비난하며, 마초 스타일을 채택하면서도 많은 여성들을 끌어들이고, 전통으로 복귀하자고 요청하면서도 기술에 열광하며, 대중을 이상화하면서도 대중 사회를 경멸하고, 질서의 이름으로 폭력을 설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강유원의 <파시즘> 강의록’중에서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전간기 서구에서 몇 번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다. 강유원에 따르면 파시즘은 서구 역사가 이념들의 격전장이 되었던 전간기에 다양한 경제사회적 조건들을 지닌 국가들에서 잠시 등장했던 집단적 사건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런 잡탕 덩어리가 전간기戰間期 서구에서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지배층, 지배기구의 구성원, 피지배집단(이들의 참여를 감안하면 ‘피지배’라는 말을 붙이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을 규정할 때에는 치밀하고 적극적인 대중동원과 열광적이고 긍정적인 대중참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이는 파시즘이 참여 민주주의적으로 작동했다는 판단도 가능케 한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념체계 실현 에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실행과정 역시 명료한 파악을 저해하면서 동시에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밀고 나간 인간 군상의 심성구조 이해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는 요소다. ‘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강유원 옮김) 옮긴이의 말’중에서
내가 이해하는 한, 파시즘은 서구 역사의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등장한 집단적 사건이다. 즉, 파시즘이 등장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들을 우리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조건들을 파악하는데 경제사회적 고려는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서도, 베버주의적 해석에서도, 파시즘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폭넓게 파악된다. 한나 아렌트의 박사학위 논문이 무엇이건 간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들>이 파시즘의 원인을 밝히는데 취약한 지점은, 바로 그녀의 이론이 전체주의(중에서도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이념으로만 파시즘을 설명하려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시즘이라는 이념을 창출하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접근법이 파시즘 이해에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부패라는 틀로 파시즘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추상적인 분석틀이 정치사상사의 접근법이라면 할 말이 없다.
예를 들어, 파시즘에 대한 여러 이론적 관점을 모두 고려한 패시모어의 책에서 파시즘의 특성을 “이론적 측면에서의 초민족주의,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종주의, 일당독재 엘리트주의, 준군사주의, 대중동원, 카리스마적 지도자” 등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도대체 염려사회에서 이러한 특성은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 것인가. 특히,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파시즘의 특성과 기원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이런 복잡한 집단적 사건이 어떻게 개인들의 염려라는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가 말이다. 별의별 사건들을 다 유사파시즘으로 설명하는 국내의 시도들도 우습지만, 위키피디아의 파시즘의 기원 항목만 한번 읽어도, 도대체 염려사회라는 틀로 파시즘을 언급하는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개인들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식으로 파시즘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파시즘과 같은 집단적 사건을 개인적 윤리 차원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철학자의 지적 유희 속에서 그러한 작업은 유명진보언론의 칼럼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수용될 정도로 용인되어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도대체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한국의 철학자들은 도대체 현재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려고 했는가 말이다. ‘파시즘 만능주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하니 닥치고 강유원의 말을 따르자는 말이다.
사실 뭐라 이름 붙이건 그런 사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사람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그릇된 이름붙이기는 불명료한 사태파악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명료한 사태파악은 부적절한 처방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준거틀이라도 마련해두는 것이 공부하는 이의 현명한 태도겠다. ‘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강유원 옮김) 옮긴이의 말’중에서
강유원의 말처럼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始點”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자면 예를 들어, 나는 이런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 그러니까 오늘은 힘이 들지만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신념에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잠복해있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모레가 또 내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약속해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온통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데이트도, 근사한 지역으로의 여행도 그에게는 별다른 기쁨을 줄 수 없으니까. 또한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다.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웃의 불안도 그에게는 별다른 느낌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를 불행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독한 자아로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우리의 사랑과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좌우명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카가 망쳐놓은 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좌우명으로 이 사태를 바라봐야 한단 말인가.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지 말라는 뜻인가. 염려를 하라는 뜻인가 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럼 도대체 강신주는 왜 우리의 염려사회를 염려하고 있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