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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24일, 한 소박한 과학자 Sewall Wright를 떠올리며..
원문: Sewall Wright 서얼 라이트: 진화종합의 변두리에서 by 김우재
1930~40년대를 거치며 진화의 종합설(Modern Synthesis)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흔히 바이스만에 의해 체택된 신다윈주의(Neo-Darwinism)와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바이스만의 업적은 당시 유행을 이루고 있던 신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입지를 가진다면, 진화의 종합설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기반한 진화론을 집단유전학의 이론들과 한데 엮는 작업이 주요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물들의 위명을 접하게 된다.
멘델의 재발견과 베잇슨-바이오메트리션 논쟁등을 제외한다면, 진화의 종합설을 다룰 때 가장먼저 등장하는 삼총사는 수학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세 사람, RA Fisher(로날드 피셔), JBS Haldane(홀데인), 그리고 Sewall Wright(서얼 라이트)다. 이후 고생물학자 심슨(GG Simpson),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 도브잔스키(Dobzhansky), 줄리앙 헉슬리(Julian Huxley)등이 등장하나 이들에 관해서는 현재로서는 별다른 관심도 없고(지나치게 선동가적인 그들의 기질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현재 작업중이니 훗날 밝혀질 것이다) 별다르게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중 피셔가 아마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통계이론의 발견자로서 유전학과 진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피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피셔의 아카이브에 가보면 그의 논문집을 1. 통계학과 수학적 응용에 관한 것과 2. 유전학, 진화론 그리고 우생학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번째와 관련하여 피셔는 The Genetical Theory of Natural Selection (자연선택의 유전학적 이론, 1930)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Blending Theory(BT: 다윈을 비롯하여 멘델 이전에 유행하던 유전개념, 비탄성입자간의 섞임 현상)의 유전개념을 Particulate Inheritance(PI: 멘델의 재발견 이후 정착된 유전개념, 유전자를 탄성입자로 가정했기 때문에 각 대립인자는 섞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유전됨, 멘델의 독립유전법칙과 연결됨)의 입자유전개념과 대비하여 세대를 거치면서 변이가 감소하는 것을 설명해냈다. BT에서는 한세대가 지나면 변이는 1/2(1+r, r은 대립인자간의 연관도)만큼 줄어들게 됨으로 인해 그 손실분을 돌연변이가 메꾸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입자유전에서도 한세대당 1/4N(N은 각 세대의 교배하는 개체수)만큼 변이가 줄어들게 되지만, 피셔는 진화란 충분히 큰 집단에서 일어나므로 이러한 변이의 손실은 매우 느린과정이고 따라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내린다(후에 그의 1/4N은 실제로는 1/2N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 그는 진화에서 자연선택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나머지 진화의 원인들인 돌연변이,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random genetic drift), 이주(migration)등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홀데인은 The Causes of Evolution (진화의 원인들, 1932)이라는 책을 쓴 인물로 유리한 대립인자의 고정 가능성에 관한 이론, 성연관 유전(sex-linked)에 관한 이론등을 내놓았으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매우 설득력있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라이트는 Evolution in Mendelian populations (멘델집단에서의 진화, 1931)라는 책으로 등장하면서 유명해진다. 그는 집단유전학에 확산이론을 도입한 인물이다. 또한 진화에 있어 자연선택 이외에도 다른 원인들이 모두 관여한다는 점을 그의 Shifting-balance theory of evolution로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진화적 풍경(Evolutionary landscape)라는 색다른 방법으로 진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흔히 라이트는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를 강조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또한 이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하지만 논문에서 그는 한 종의 형성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첫 단계는 유전자 표리가 강조되는 무작위적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 종은 더 높은 적응도를 가진 점으로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쉽게 해주기 위해서 라이트는 많은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큰 집단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에는 자연선택이 주로 관여하며 이 과정에서 적응도가 낮은 집단은 소멸한다.
라이트는 두가지 단계 중 어느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전자 표리가 진화의 raw-material을 제공해주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라이트는 진화를 유전자 표리라는 무작위적인 힘과 자연선택이라는 결정론적 힘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점은 그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즉, 그의 논문의 논증구조는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박물학자들 사이에서 낮은 수준의 차이는 비적응적이라는 견해가 등장했을 때, 라이트는 그의 논증구조의 첫단계를 강조하며 이들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곧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러한 낮은 수준의 차이들조차 적응적이라고 고백하자 라이트는 다시 논증의 두번째 단계를 인용하며 자연선택을 강조했다. 라이트의 논증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현장 박물학자로 훈련받은 적도 없었고, 전문적인 수학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수학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생리유전학을 공부했고 생리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농림부에 근무하게 되었고 거기서 육종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당시 진화종합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박물학자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생물학에서 이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라이트는 이들의 견해가 바뀔때마다 전문가인 이들의 견해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자신의 논증을 적절히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화종합설이 (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견고해지면서 자연선택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자 진영의 의견이 당시의 생물학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와 이상한 동거관계를 맺고 있던 도브잔스키(그는 알맞은 집단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라이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라이트가 써준 가장 간단한 방정식도 이해하지 못했다)도 적응주의 진영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고, 라이트마저 자연선택을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한다.
라이트가 자연선택 이외에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를 주목한 것은 그의 육종가로서의 연구경험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제대로된 품종을 만들기 위해서 육종가들이 실제로 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육종가들은 귀가 긴 당나귀를 만들기 위해서 귀가 긴 당나귀끼리 교배하는 단순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귀가 긴 형질을 골라내면 다른 형질에도 영향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들은 귀가 긴 형질을 골라내면서 여러 그룹의 계대를 만들고 이들간의 interbreeding으로 원하는 형질을 갖추었으면서도 다른 형질에 이상이 없는 계대를 골라낸다. 즉, 자연선택(육종가의 선택)으로 최종적인 종이 걸러내진다 하더라도 무작위적 유전자 표류(육종가 맘대로 되지 않는 형질의 변화와 복잡성)를 무시할 수는 없으며,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많은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집단(여러 계대를 만들고 이들간의 interbreeding을 하는 육종가들의 방식)에서의 진화였던 것이다. 라이트는 피셔가 상정한 매우 이상적인 집단(특별한 구조 없이 모든 개체가 랜덤하게 교배하는)에서 각각의 유전자가 가진 매우 작은 유리함이 개체로서 결국 선택된다는 관점에 맞서 라이트는 그의 육종가로서의 지식을 이용한 것이다. 하나의 순종계대를 얻는과정은 피셔가 상정한 것처럼은 되지 않으며 그것은 육종가들에게는 상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균형잡힌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항상 유전자표류와 엮이게 되고 유전자표류에 의한 효과에 서얼 라이트 효과(Sewall Wright Effect)라는 이름까지 명명되게 된다. 포드(EB Ford)오 피셔의 연합공격으로 지친 라이트에게는 마땅한 대비책은 없었다. 그는 때를 기다렸고, 죽기전 그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거의 모두 벗어버릴 수 있었다.
라이트와 피셔와의 논쟁은 두단계로 진행된다.
1. 피셔가 Theory of Dominance를 발표한 직후 American Naturalist지를 통해 라이트, 홀데인이 이를 반박한다. 라이트는 근친교배 혹은 근연교배(inbreeding)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라이트의 Shift-Balancing Theory가 등장하고 그의 이론이 유전자표리와 엮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선택을 강조하던 피셔진영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포드가 라이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올리는 파일들은 서얼 라이트의 대작인 1931년작 Evolution in Mendelian populations와, 1932년 작 The roles of mutation, inbreeding, crossbreeding, and selection in evolution, 그리고 Statistical Theory of Evolution이다. 라이트가 구제되는 데에는 그 자신이 일흔이 넘어 집필한 책들도 큰 몫을 했지만, 진화학계에서 서서히 등장한 다층선택 이론등도 큰 몫을 했다. 게다가 윌리암 프로빈(William Provine)이라는 훌륭한 전기작가로서의 과학사가를 만난 덕에 라이트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프로빈의 “Sewall Wright and Evolutionary Biology (Science and Its Conceptual Foundations series”에 대한 굴드의 리뷰논문도 함께 들어 있다.
진화종합의 변두리라는 말은 굴드에게 서얼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했던 말에서 따왔다. 굴드가 진화종합에서 당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을 때 라이트는 굴드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거기에서 배제되었다네”
그의 영어이름은 서얼이다. 물론 이런 언어유희를 하면 고인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진화의 종합설에서 그는 말 그대로 ‘서얼’이었다. 그는 전문적인 박물학자도 아니었고, 수학자도 아닌 일종의 서얼이었고, 그의 이론도 종합설에서 묘하게 ‘서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래는 유용한 링크를 모은 것이다.
Sewall Wright: Darwin’s Successor – Evolutionary Theorist
William B. Provine
Sewall Wright and Evolutionary Biology (Science and Its Conceptual Foundations series)
The Origins of Theoretical Population Genetics
William Provine and the Biological Meaning of Genetic Drift
Collected Papers of R.A. Fisher, Relating to Genetics, Evolution, Eugenics and Miscellaneous
Sewall Wright Papers
Michael R. Dietrich
primary sources: e-texts
Where can I get Provine’s paper? Show me the 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