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heterosis.egloos.com/934911 원문
원문; 정직의 두 이름: 황우석 사태를 보며 by 김우재
과학자 하나를 두고 나라가 떠들썩 하다는 것이 이젠 생소하지 않다. 이 땅엔 과학의 전통이 없다. 이미 물리학의 혁명적인 날들이 다 지나가고 생물학의 여명이 싹트던 시절에도 일제의 식민지였고, 이 후에도 전쟁으로 정신 없던 이 땅에선 과학이 정치와 경제논리에 밀려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전통은 부재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 과학자가 언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미 2004년 체세포 핵치환 기술을 통해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발표했던 그 과학자는 2005년에는 치료용 복제세포의 가능성을 앞당기는 논문을 발표했고, 연이어 복제개 스너피를 탄생시켰다. 실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황교수 연구팀의 연구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스너피 탄생 이후 그의 이름이 주요저자로 등록된 논문만 이미 7개다. 그에 관한 세간의 소문들, 그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들, 정치적 선동, 모두 뒤로 하고 싶다. 최근의 사태는 어찌 보면 그가 불러온 사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과학적 성과물을 다루는 것은 과학적 전통 속에서 기능하는 과학의 모습을 왜곡하는 일이며 나아가 앞으로 한국에서 탄생할 모든 과학적 연구성과들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국내 언론의 반응은 뚜렷하게 둘로 나뉜다. 한 쪽은 네이쳐와 사이언스지, 그리고 이들의 반응을 야기한 새튼 교수의 말에 집중해서 황우석 교수의 윤리적 비정직성을 부각시키고, 한 쪽은 이러한 윤리적 비정직성은 불법이 아니었으므로 연구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후자에서는 자발적 난자 기증운동까지 시작하는 모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의 논리 중 비정직성에 대한 부분은 분명히 나누어보아야 하는 문제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후자의 논리는 결론은 맞지만 전적으로 황교수를 옹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네이쳐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 물론 권위를 가진 학술지에서 내는 논평이기에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의미 있을 수는 있지만, 네이쳐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이익당사자가 아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난자증여의 경우 황우석 교수는 관련 연구를 모두 사이언스지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속 방안들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사이언스지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접근하는 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된다.
사이언스지는 18일 새튼과 황우석 교수의 결별소식을 다루면서 새튼이 제기한 난자제공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18일자의 글은 논평이 아니라 도쿄 통신원의 뉴스였으며, 도날드 케네디 사이언스 편집장의 말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새튼교수가 제기한 의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편집자들은 황교수팀의 논문을 승인할 때 세심하게 조사해 왔고, (새튼의) 의혹에 대한 답변이 (황교수에게서) 나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이 적절한 조치가 논문의 취소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지와 네이쳐지의 정책을 들여다 보아도 연구에 사용된 재료들을 어떻게 채취했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별로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구한 재료들을 불법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의 정책인데, 이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그런 정책을 찾아준다면, 그래서 이런 경우 논문이 취소된 경우가 있었는지 알려준다면 나의 무식을 인정할 것이다.
과거 네이쳐지나 사이언스지에서 논문이 게재 된 후 취소된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논문 게재가 취소되는 경우는 연구자가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행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견될 때이지, 연구자가 과학의 테두리 밖에서 행한 비윤리적인 행위에 관해서가 아니다. 이 말을 쉽게 풀자면, 게재된 논문의 데이터 등이 조작된 경우 논문이 취소될 뿐, 이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연구자가 행한 과학 외적 윤리적 행위에 관해서는 논문 게재취소를 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황교수의 난자 기증 거짓이 밝혀지자마자 프레시안에 글을 두 편이나 기고한 피츠버그대의 이모 교수는 이를 “과학자의 정직성”이라 칭하며 둘을 혼동하고 있다. 물론 황교수가 결과적으로 거짓을 말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가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이교수가 황교수를 거론하며 예로든 미국 교수의 해고는 아마도 최근 뉴사이언티스트지를 뜨겁게 달군 Luk Van Parijs라는 MIT교수의 경우일 것이다. 파리즈 교수가 해임된 것이 “과학자의 정직성”과 직결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정직성의 종류가 다르다. 또한 그 정직성을 지키는가 아닌가에 따라 과학자에게 가해지는 피해의 종류도 다르다. 파리즈 교수는 데이터를 조작했고 이런 식으로 수 많은 논문을 출판했다. 이것은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의 비정직성이다. 황우석 교수는 난자를 얻은 방법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몇 마디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는 과학 테두리 밖에서의 비정직성이다. 전자의 경우 이는 과학의 미덕을 해치는 행위이며 후자의 경우보다 과학자 사회에서 더더욱 금기시되는 행위이다. 후자의 경우 사회적 비난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과학의 미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 교수는 이 둘을 함께 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 둘을 섞을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자의 특정 연구성과가 과학 외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간주될 때 그 연구의 과학적 의미조차 훼손된다.
또한 이 교수는 황교수가 2005년 발표한 논문의 연락저자(corresponding author)가 누구인지 착각하고 있다. 난자 기증의 문제가 제기된 논문은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고, 2005년의 연락저자는 새튼과 황우석 교수 공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연구의 책임은 새튼과 황우석 교수 모두에게 있고 윤리적 정직성이니, 도덕적 무게니 하는 모든 책임이 둘에게 공통으로 주어진다.
이 교수가 어떤 과학자 사회에서 어떤 논문들을 어떤 정직성의 기준으로 발표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과학자 사회에서 “정직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단 하나다. 그것은 한명의 과학자가 그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재생산” 가능하고 시대를 넘어서도 “재현” 가능한 결과를 만들었는지에 관해서이다. 과학자가 사회적으로 져야할 윤리적 의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금전을 지급하고 난자를 제공받는 것이 그러한 윤리적 기준에 준하지 않는다면 이에 관해 그를 비판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과학적 정직성”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게 되면 과학이 가진 전통은 사라진다. 과학에서의 정직성은 연구에 관한 것이지만, 연구에서의 정직성 중 과학자들이 민감하고 또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은 그 “연구결과의 신빙성”이지 연구자의 “개인적 정직성”, “윤리적 정직성” 따위가 아니다. STS출신의 한 사회학자가 이 교수의 글이 단연 돋보인다고 말했다면 그가 과학적 전통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도 가지지 않았으며, 이 교수가 의도했던 아니던 과학적 정직성을 모호하게 뒤섞음으로서 과학을 깍아내리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 사이언스지에서 황교수의 논문을 취소하지 않겠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여전히 과학자 사회의 전통이 살아 있다면 논문게재가 취소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교수는 논문 게재가 취소되고, 황교수가 그가 예로 든 다른 미국의 교수처럼 해직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그런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다.
과학적 정직성을 일상생활에서의 정직성이 가지는 의미와 혼합하지 말것, 이를 통해 과학자만이 특별히 정직해야 한다고 대중을 현혹하지 말것, 또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결과가 조작된 것이라는 인상은 더더욱 심지 말것. 만약 과학에 관해 정직성을 말한다면 분명히 두 종류의 정직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황교수의 논문 결과가 조작되었음이 추후 밝혀진다면 나는 위의 모든 말들을 깨끗히 취소할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황교수에게 안타깝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과학적 양심을 믿으며, 그가 과학자 사회의 보이지 않는 견제를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견제 속에서 과학이라는 지식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과학자 사회의 자유견제라는 그 울타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