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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해, 오해, 기대, 그리고 광신 by 김우재
황교주 해프닝은 결국은 과학적 성과에 대한 이해의 문제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일반대중에게 어떻게 인지시키는가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초까지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대중의 이해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던 과학자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연구의 중요성과 이 연구가 가지는 철학적, 윤리적 함의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어디에나 정상분포에서의 변이는 존재하고 그러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당시에도 나치의 등장과 우생학, 골상학, 인종차별등의 문제가 과학자들의 저술 속에 등장했다. 이러한 실수들에 대한 인류의 각인은 너무나 커서 과학은 위험하며 따라서 제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20세기의 후반부를 지나면서 과학은 분명 거대화되고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에 의해 직접 대중에게 알려지던 낭만의 시대는 (어느정도 전통이 살아 있었으나) 사라지고 이제 과학자들의 업적은 다른 루트를 통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과학의 전통이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시작된다. 과학은 거대화되기 시작하고 국가주도의 과학전통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수입되기 시작한다. 국가주도의 거대과학이 가지는 몇가지 한계가 존재한다. 첫째, 과학자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 계획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둘째, 과학은 경제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셋째,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들의 사회에 대한 참여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위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어느때보다 과학의 성과를 전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언론의 과학부 기자들을 통해 전해진다. 과학언론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들은 모두 인지하겠지만 이들은 위에서 제시한 세가지 조건을 그대로 따른다. 예를 들어 발암유전자가 밝혀지면 기자는 이 발견을 암치료에 획기적인 도약으로 포장하고 해당 과학자와의 인터뷰는 양념으로 첨가된다. 이런 관행이 지속되면서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경제논리와 연결시키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몫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주도적 거대과학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이전에, 이미 언론이 과학을 일반대중과 연결시키는 역할에서 주도적이고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19세기에 과학자들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전통을 한줌쯤은 물려받은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언론의 역할은 -내가 보기엔- 상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현대의 일반 대중들이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여건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언론이 이를 중립적이고 정확하게 대중에게 알린다면 더더욱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와 일반대중을 연결시키는 데에 언론이 중요해졌다는 데서 언론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성이 생긴다. 언론은 그 특성상 “자극”적인 기사를 원한다. 만약 과학자의 성과를 포장없이 있는 그대로 내보내게 된다면 그건 기사로서의 가치가 없다. 또한 경제논리가 중요한 자본주의의 특성상 언론의 과학관련 기사는 자극적이지 않은 과학적 발견조차 자극적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압력 속에 존재하게 된다. 황교주 해프닝은 이런 일련의 맥락속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창조된 케이스다.
만약 일반 대중이 황교주의 과학적 업적을 있는 그대로 알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좋은 일이란 지금처럼 한 과학자를 신성화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안 좋은 일이란 지금처럼 과학자라는 존재가 과학의 후발국인 이 나라의 주목을 받는 일이 조금 늦춰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은 시간의 문제다. 이는 과학이 일반대중에 제대로 알려졌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비교해보면 사소한 것이다.
황교수가 알려지기 시작한 복제소 영롱이의 경우는 분명한 경제적 효과가 있다. 이 경우 소의 난자채취는 손쉬운 일이고 실제로 효율이 매우 높으며 실용적인 이익이 분명히 존재한다. 영롱이 연구는 그래도 제대로 전달된 경우다.
인간 체세포의 핵을 난자의 핵으로 치환해 줄기세포라인을 만들어낸 2004년의 연구는 어떨까. 먼저 이 연구만으로 인간복제가 가능하리라는 것은 헛소리다. 200여개의 난자로 겨우 몇개의 줄기세포라인이 만들어졌다면 핵치환에만 200여개의 난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착상 -> 발생 -> 탄생 -> 성숙 으로 이어지는 모든 단계를 통과해서 한 개체의 인간이 복제될 가능성은 현재의 기술로는 이룰 수 없는 한계다. 이건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제도적 한계이기도 하다. 하나의 인간을 복제하기 위해 수만개의 난자를 구할 수 있다 해도, 이로부터 환성된 인간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백명의 산모가 필요하다. 그 산모를 구할 수 있다 해도 확률은 여전히 낮다. 그렇다면 수만개의 난자로 시작한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복제가 어떤 경제적 이익이 있는가? 그 많은 돈을 누가 댈 것인가? 과학적으로 인간복제라는 것은 이미 그 복제 가능성이 영장류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따로 검증이 필요없는 기정사실이다. 즉 이를 실현한다 하더라도 첫째 과학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고, 둘째 경제적으로 이익이 없다.
2005년 황교주의 연구는 2004년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체세포를 복제해서 실제 임상치료에 응용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의 체세포로부터 다양한 줄기세포 라인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실험기술과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사이트에 따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직접 임상에 사용될 수 있는가? 있다면 언제쯤인가?
이미 위에서 언급한 글에서 다루었듯이, 넘어야 할 산은 한 둘이 아니다. 세포분화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고, 이물질의 유입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결해야 하고, 체세포 핵치환만으로 정말 면역거부반응이 해결되는지를 인간에 대해 실험해야 하고, 모든 질병이 치료가능한지를 따져봐야 하고, 한명을 치료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기타 여러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연구팀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언론에서와는 다르게 실제 그들의 논문에서는 이러한 허들을 신중하게 디스커션에서 다룬다. (논문을 읽어보라)
그렇다고 모든 이들에게 이 논문을 읽고 연구에 대해 상식적으로 판단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관련된 일에 종사한다는 생명윤리학자나 과학철학자들도 이 논문을 100% 이해 못한다. 그 많은 자곤들과 약어들을 읽고 이를 이해할 학자가 관련종사자 이외에는 없는 것이 현대 과학 전문화의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일반 대중은 언론과 해당 연구종사자의 입을 통해 사실을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황교주 사건은 이런 맥락속에서 터진 해프닝이다. 이미 이전에 많은 언론들이 암이나 당뇨병, 고혈압, 치매 등에 관련해서 네이쳐, 사이언스, 셀등에 게재된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들을 포장했지만 이보다 더 국민들을 사로잡은 경우는 없었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한 이들은 이제 국내에도 꽤 많다. 내가 있는 이 대학의 생명과학 교수들중에도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황교수의 연구에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거나 아니면 그의 정치적 수완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결론은 둘다 기능했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황교주는 언론을 수동적으로 이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언론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넘어 정치권과 연계했고, 이 땅에 어떤 이상한 괴물과 같은 “희망”의 분위기를 창출해 버렸다. 물론 그의 연구가 센세이션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난자가 핵치환되었고, 이를 통해 난치병 치료에 어떤 돌파구가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난자의 핵치환은 실제로 영장류 개체를 복제한 것에 비하면 과학적, 이론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다. 실제로 발생을 통해 개체가 되는 것을 본것도 아니지 않는가. 다만 그것이 센세이션할 따름이다. 또 난치병 치료에 관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장애가 수도 없이 산적해 있다. 따라서 이번 해프닝은 그의 연구가 가진 이런 매력적인 점을 이용해 황교주가 벌인 자작극이다. 백신이라는 기법이 개발된지 수백년이 지났어도 우리가 가진 백신은 몇개 안되고, 바이러스가 발견된지 백여년이 흘었지만 우리가 치료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몇개 안된다. 우리는 아직도 타미플루에 조류독감의 위험부담을 걸어야 하는 빈약한 처지다. 제약산업이 그렇게 발전하고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아스피린이나 비아그라와 같은 약이 탄생할 가능성은 그리 큰 것은 아니다. 그만큼 기초과학의 영역을 임상에 응용한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현상 자체가 가진 복잡함과 다양성을 넘어서야 하는 어찌보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이 사실을 알까?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작정 “과학자들이여 대중과 대화하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무지한 대중들이여 과학을 좀 공부하라”라고 할까?
스페인에서 수천만명을 죽였던 과거의 바이러스가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유사하다는 사이언스의 논문 하나만으로 닭 소비가 떨어지고, 조류독감이 유행했던 제작년에는 아예 닭이 팔리지도 않았던 그런 해프닝을 보면서 실제 현장의 과학자들은 웃는다. 오히려 그들은 삼계탕을 먹으러 간다. 하지만 그들이 일반대중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 과학이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과학자들이 그렇게 비웃을 수 있을까?
혈액형으로 성격을 판별하고 이를 통해 취업에도 불이익을 준다는 이 땅에서 이 말이 가진 비과학적 면을 보면서, 과학자는 웃고 있어야만 할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조과학회가 대학에 판을 치고 진화론이 사기학문으로 대접받는 분위기가 살벌한 곳에서 과학자는 뭘해야 할까? 언론은 뭘해야 할까?
이런 세태에 불만을 느끼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게 도대체 뭘까. 뭐 얻어먹는 게 있다고 이딴 짓을 할까? 누구는 이런 일을 해서 논문도 쓰고 책도 쓰고 돈도 번다는 데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이런 일을 한 과학자는 왜 할까?
차라리 황교주처럼 잘먹고 잘사는 일을 교묘하게 더 영악하게 해서 완전범죄로 만들어버리는 게 과학자가 할일은 아닐까? 이미 과학자가 국가에 종속된 노예처럼 전락한 상황에서 과학자는 더 비참한 인문학자들과 공학자들을 고려해서 입다물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뭔가를 해야 할까.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건 과학의 참된 모습을 찾아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학이 가진 역사의존적인 성격보다 독립적 성격에 대해 강조하게 되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그건 일종의 전략이 아닐까? 그런 전략때문에 본질이 흐려질까. 여기저기서 다 쥐어터지면서 이 따위 일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사람은 왜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