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한국 독자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양의 선천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다분히 인종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단정의 허구성을 역사적으로 까발린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울러 과거 세계경제에서 아시아가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나의 전망에도 공감하는 한국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일부 서양 학자들은 내가 유럽중심주의를 아시아중심주의 내지는 중국중심주의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라고 비판하지만, 이것은 온당한 비판이 아니다. 만일 아시아 독자들이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이 되는 ‘과학적’ 테제는 글로벌 경제는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적어도 이 책에서 분석한 시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중심은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런 중심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증거로 미루어볼 때 1800년까지는 또는 그 이후까지도, 유럽과 서양은 세계경제의 중심이 결코 아니었다. 중심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고 싶다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용어로 지칭될 자격이 있는 지역은 주변에 불과했던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심성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글로벌 경제를 파악하지 않는 한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이 책에서 부르짖는 으뜸가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중심주의 내지는 생태중심주의라면 또 모를까 특정 지역이나 인종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리오리엔트> 안드레 군터 프랑크, 이희재 역, 26-27
나의 테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성이 어떻게 다양성을 낳고 또 끊임없이 변화시키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세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그 가치를 인식할 수도 없다.
<리오리엔트> 안드레 군터 프랑크, 이희재 역,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