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의 사상적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 (이하 아나키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의 민족운동은 해방 후 남북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민족주의가, 북한에서는 공산주의가 각각의 전부를 수립하는데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수용되지 못하고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ref] 성주현. 2010. “아나키스트 원심창과 육삼정 의열투쟁 – Anarchist Won Shim-Chang & Gallant Fight at the Restaurant Yooksamjeong.” 숭실사학 24: 77–109. [/ref].
그러나 아나키즘이 맑스주의자에 의해서는 공상적,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 매도당하고, 보수적 국가주의자들에 의해서는 무정부와 국가소멸을 외치는 돈키호테적 낭만주의자로 격하되면서 아나키즘의 실용성 혹은 적실성은 잊히거나 과소평가되어왔다. 아나키스트 자신들도 당대의 엄혹한 현실에서 행동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deed) 을 테러리즘이라는 극단적 직접행동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기에 허 무주의자나 현실 파괴주의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아나키즘 또한 시대착 오적 이상주의로 치부된 것이다… 우리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실용적 아나키스트의 전범이다. 일제 하 아나키스트들의 무장 독립 투쟁 자체가, 독립운동의 다른 방안이었 던 외교론 및 실력 양성론과 비교해보았을 때, 가장 극렬하지만 동시에 실질적으로 가장 유용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이론적 잡종화는 아나키즘과 대칭적 혹은 대립적 차원에 존재하는 이념들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 아나키즘과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인가? 맑스주의와의 불화와 결별은 끝낼 수 없는 숙명인가? 만약, 우리가 파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아나키즘과 다다이즘적 반방법을 진실로 이해하고, 솔직하게 따른다면, 아나키스트가 타협하고, 잡종화하지 못할 세상만사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ANYTHING GOES![ref] 김성국. 2012. “잡종화로서 아나키: 방법론적 아나키즘과 실용적 아나키즘을 위하여.” 사회와이론 21: 423–55. [/ref]
이와 더불어 최초의 철학으로서의 아나키즘을 정립했다는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정치적 정의>가 맬서스의 <인구론>에 의해 멸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니[ref] 박진근. 2002. “고드윈, 윌리엄 (Godwin, William (1756∼ 1836)).” 경제학대사전.[/ref] 왜 현대의 아나키즘 연구와 실천에서 과학적 아나키즘의 전통이 중요한지, 즉 왜 크로포트킨이 동아시아에 널리 수용되었고, 왜 파이어아벤트라는 독특한 인물이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에서 중요해지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과학적 아나키즘은 소수이기에, 또 서로 용인되기 어려운 사상의 잡종이기에 중요하며 독특하고 창조적이다. 아나키즘 연구가 문학과 시에 매몰된 한국의 현실은 또 한번 나를 괴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