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Creative Geneticist (2013), 아카이브 (2002-2013)

황우석과 초파리: 홍혜걸 한국최초 의학전문기자’님’의 글을 읽고

https://medium.com/science-scientist-and-society-korean/939c2aae514b 원글

나도 황우석과 인연이 깊다. 2002년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카카오톡도 없던 시절, 지금은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된 한메일은 왠일인지 인간복제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대학원 석사과정에 불과한 나에게 접근했다. 아마도 인터넷에 만들어둔 ‘진화론과 동물행동학’에 관한 홈페이지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던 탓인 듯 하다. 지금 기억으론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인간복제를 시도한다고 화제가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측과 찬성하는 측의 인터뷰가 실렸다. 나는 인간복제에 찬성하는 측을 맡게 되었는데, 2002년이면 한창 내가 리처드 도킨스에 열광하며 과학 만능주의자로 종교의 무지를 비웃고 대중을 계몽하려던 전사로 살던 시절이었기에, 그러려니 한다. 물론 인간복제를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그런 인터뷰는 아니었다. 인간복제에 대한 반대입장은 박병상 박사님의 인터뷰가 실렸다.

물론 중요한 건 석사과정에 불과한 내 인터뷰가 아니다. 인간복제에 대한 중도적 입장을 견지한 과학자로 인터뷰한 것이 다름 아닌 황우석이었던 것이다. 그는 막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었다는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언론에 관심을 받는 과학자로 급부상중이었다. 그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을 읽고, 황우석 사건을 생각해보면 마치 싸이코패스의 전언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과학은 과학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과학은 공익성을 최상의 목표로 삼을 때만 아름다운 과학이 될 수 있겠죠. 상업성으로 이용될 때 과학은 왜곡되고 굴절됩니다. 반드시 경계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대중들에게 투명한 진실을 전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복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전적으로 과학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이 홀로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입니다. 시민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소상히 알리고 서로 공감해야하는 것이 과학자들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당연히 나는 줄기세포와 배아복제 연구 따위엔 관심조차 없었다. 내 연구분야는 세포의 번역 기작에 관한 것이었고, 내 과학적 꿈은 이미 행동유전학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우석이 내 기억에서 잊혀질 무렵, 이 과학자가 무려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실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2004년의 일이다. 반가웠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천대받던 수의사 출신의 과학자가 한 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가 연구하던 대학에 와서 두 번이나 강연을 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가 과학자로 성공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 진심으로 믿었다.

내 의심은 2005년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논문이 출판되고, 황우석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시작되었다. 훌륭한 과학적 연구성과를 가진 과학자가, 지나치게 정치인들과 언론에 의지하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정치인들은 (이명박 서울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다퉈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며 별의별 아부를 다 떨기 시작했고, 그는 순식간에 한국의 영웅이 되었다. 내가 그의 논문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쯤이다. 나는 사진에 조작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 매일 들락거리며 놀던 이상하 박사의 ‘과학과 철학’ (지금은 사라졌다) 사이트를 통해 그의 논문이 지닌 성과가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있다는 글을 썼다. 2005년 논문은 과학적으로는 2004년 논문과 하등 다를바가 없었다. 단지 더 많은 난자를 사용해 더 많은 수의 체세포 복제를 이루었다는 기술적 성과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황빠들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관하지 않았다. 황우석의 말처럼, 과학은 과학으로 평가받으면 그 뿐이고, 나는 그의 과학적 성과에 대한 합당한 비판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황우석에 대한 의심이 커져가던 무렵 피디수첩이 난자매매 의혹을 보도했고, 황우석 사건이 터졌다. 브릭과 디씨인사이드에 사진조작이 들통나기 전까지도, 나는 과학적 검증이 아니라 윤리적 검증으로 과학자를 매도시키려는 피디수첩에도 비판적 칼을 겨눴다. 여전히 피디수첩의 촛점은 잘못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문제의 날 뒤에, 나도 한국 과학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했다. 그렇게 황우석의 연구에 대한 비평을 써내려갔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한국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설때마다 글을 썼다. 광우병 파동, 천안함 사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그 흔적들은 위키로 정리해두었다.

황우석 사건이 한국에 남긴 상처는 크다. 이 땅의 역사에서 과학이 전국민적 관심을 받은 최초의 사건은 논문조작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니 그가 연구하던 생물학의 연구자들의 위신은 하루아침에 동반하락했고, 과학자들은 언제나 대중의 의심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제대로 된 과학문화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과학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다만 당시 그를 비호했던 정치인들의 발언과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한국 과학을 망치는지 정도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노무현 :“나도 MBC ‘PD수첩’의 이 보도가 짜증스럽다”
박근혜 :“우리 나라의 보배 중 보배인데 편찮으면 안 된다”
손학규 :“숱한 시련을 안겨주고, 신화를 전복시키려는 보이지 않는 악인들에게 강하게 말하고 싶다”
유시민 :“부당한 방법으로 과학자를 못 살게 구니까 방송국이 흔들흔들하고 광고 끊어지고 난리 아닙니까”
이해찬 :“연구단계에 있는 과학적 결과물을 과도하게 취재하고 파헤치려 함으로써 우리 학계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과학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 사태”
정동영 :“황 교수는 앞서가는 사람이자 우리의 희망이므로 보호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

홍혜걸을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인터넷을 시작한 이후 한글로 된 문서에서 종종 등장했고 의학전문기자라는 타이틀을 붙히고 다녔다. 그의 글을 꽤 읽었고, 큰 흥미를 갖지는 않았다. 홍혜걸은 특이하다. 과학적으로 무지해서 황우석을 지지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황우석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느 과정에서 “진실보다 애국심이 먼저”라는 말로 나에게 충격을 줬다. 마치 “과학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로 잘못 알려진, 황우석이 즐겨 사용하던 수사를 보는 듯 했다. 이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 과학엔 조국이 없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해 검증을 하려고 할 땐, 조국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로버트 머튼은 과학자들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제도적 장치가 과학의 자율규제장치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 제도적 장치는 과학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합의한 규범들이다. 그것을 CUDOS라고 부른다. 공유주의(communism)는 연구의 결과물이 완전히 공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편주의(universalism)는 과학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인종, 성별, 정치적 성향 등의 사회적 요인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적 검증만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무사무욕(disinterestedness)은 연구에 있어 과학자는 오직 해당 연구의 과학적 진리성만을 염두에 둘 뿐, 정치적 혹은 개인적 이해관계와 연구결과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미 위에서 소개된 조직적 회의주의(organized skepticism)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 없이는 그 어떤 권위, 도그마, 믿음도 과학적 검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머튼이 이상화된 과학자 사회를 상정했다고 비판하던 말던간에, 산업화된 현대 과학기술 시스템에서도 이 장치는 작동한다. 그리고 오염되기는 했지만, 규범 중 하나인 보편주의는 한국 과학자들이 외국에서 연구를 하고자 할때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보편주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과학의 연구는 ‘반드시’ 나이, 인종, 성별, 국가, 정치적 성향, 기타 등등의 사회적 요인과 무관하게 ‘철저히’ 과학적인 검증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과학자의 연구성과는 그가 흑인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되며, 그 연구성과가 국익에 우선한다고 해서 부정을 용인해서도 안된다. 홍혜걸은 머튼의 보편주의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걸 안다면 “진실보다 국익이 먼저”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보카타의 네이쳐 논문이 네이쳐에 실리기도 전에 네이쳐지는 황우석의 근황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지인에게 들은 바, 그는 네이쳐지에서 파견나온 기자들 앞에서 그 특유의 ‘돼지 새끼 받기 쇼’를 또 벌였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중병이다. 리비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2011년엔 리비 민중을 상대로 1500억원을 들여 줄기세포로 난치병 치료를 하겠다는 사기극을 벌이다 도망을 나왔고, 러시아에 가선 매머드를 복제하겠다는 헐리우드 스케일의 쇼를 벌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인천 시장 송영길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정도 되면 끝인 것이다. 황우석에 대한 기대는 접어도 좋다.

마지막으로 홍혜걸에게 말하고 싶다. 황우석 같은 영웅이 다시 등장해서 한국 과학계를 부흥시켜 주길 기대하기 전에, 건강보조식품의 과학적 근거는 무엇인지 한번 더 공부하고, 스스로는 한국 과학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한국에 과학적 영웅이 등장하길 원하지 않는다. 정치가 썩어빠졌고, 경제적 불평등이 어느 곳보다 심각하고, 과학이 정치와 경제적 논리에 좌지우지되는 이런 땅에서 영웅이 등장한 들, 그 영웅은 또 다른 황우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썩어빠진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 한국 과학계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개인이 아니라, 구조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