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아니 세계 어느곳에서든 학문적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선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예수의 가르침을 현실로부터 멀리 쳐내버린 기독교의 역사가 부른 결과다.
왠
일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SBS가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특집다큐를 방송하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그 첫회를 보았는데
나레이션은 문성근이었고 (잘 알다시피 그는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다) 내용은 예수가 신화 속의 인물인지 실존 인물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소박하다. 예수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 혼란에 빠진 유대의 가난한 자들을 대변했던
혁명가였고, 그의 메시지는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져 존재하던 “천국”을 “땅”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구약을 세속화하고자
했고, 그것은 그가 처한 시대에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로마는 천국을 세속화함으로서 군중에게 혁명의 희망을 심어주는 예수를
죽였다. 당연히 죽여야 했다. 그는 로마에겐 위험인물이었을게다. 내
가 공부하고 아는 바론 방금 끝난 저 다큐의 내용은 매우 소박한 진실이고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저
내용보다 더 극단적인 내용들도 많다. 요즘 도올이 Q복음서를 들고 나와 한바탕 논란을 일으켰었으니 어찌보면 저 다큐는 상당한
뒷북인 셈이다. 문제는 도대체 왜 SBS가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우는가라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
째, 의병을 조직 중인 이문열과 같은 보수논객에게도 작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이미 그닥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은 웃기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사람의 아들”만이라도 제대로 읽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다큐 안봐도 착한 사람들이다. 둘째, 작금의 상황에서 광신화되어가는 기독교만큼 섹시한 주제는 별로 없다. 이들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통통 튀어오르는 통통볼 같아서 건드릴 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의 길’ SBS와 한기총 간의 입장 ‘전문’을
보면 참으로 웃기다. 기독교 폄하와 언론의 자유가 충돌하고 있다. 지랄하고 자빠졌다. 기독교 폄하도 아니고 이런 걸 내보낼 수
있는 게 언론의 자유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대한민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못박아 놓은 멋진 나라
아니었던가? 다큐의 내용 중 한 목사의 인터뷰가 참
매력적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는 마태복음 13장 44절을 인용해서 천국의 세속적 성격을 참으로 잘 논파한다. 그렇다. 실상
천국(天國)은 전국(田國)이다. 예수가 설파한 메시지는 농부가 항상 마주치는 그 밭이야말로 천국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 천국은
숨어 있다. 그 은닉성의 해체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박한 실천에 의해 획득된다. 기
실 붉은악마를 사탄숭배로 몰아갔던 사건으로부터 최근의 구국기도까지 기독교는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힌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소박한 상식을 지닌 이들을 반기독교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시민의 죄가 아닌 한국 기독교계의 죄다. 어떻게 스스로가 이단으로 선포한
통일교보다도 사회에 봉사하는 바가 적을 수 있을까.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사회통합에 있을터인데,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가
통합의 상징으로 공인된 역사가 있을터인데, 작금의 한국기독교는 민폐다. 그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있다 해도 필요 없는
것들일 뿐이다. “신의 길, 인간의 길”을 제대로 본
기독교인이라면 생각해봐야 한다. 신의 축복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자신들 유대인들이라는 닫힌 집단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들의
역사적 말로가 어떠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웃”이란 “기독교인”이요 사랑이란 “비기독교인에 대한
증오”다. 그런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는 현재의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새로운 버젼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대한민국엔 새로운 예수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종교의 이름일지라도 나는 그 새로운 혁명가와는 대화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SBS가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특집다큐를 방송하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그 첫회를 보았는데
나레이션은 문성근이었고 (잘 알다시피 그는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다) 내용은 예수가 신화 속의 인물인지 실존 인물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소박하다. 예수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 혼란에 빠진 유대의 가난한 자들을 대변했던
혁명가였고, 그의 메시지는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져 존재하던 “천국”을 “땅”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구약을 세속화하고자
했고, 그것은 그가 처한 시대에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로마는 천국을 세속화함으로서 군중에게 혁명의 희망을 심어주는 예수를
죽였다. 당연히 죽여야 했다. 그는 로마에겐 위험인물이었을게다. 내
가 공부하고 아는 바론 방금 끝난 저 다큐의 내용은 매우 소박한 진실이고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저
내용보다 더 극단적인 내용들도 많다. 요즘 도올이 Q복음서를 들고 나와 한바탕 논란을 일으켰었으니 어찌보면 저 다큐는 상당한
뒷북인 셈이다. 문제는 도대체 왜 SBS가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우는가라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
째, 의병을 조직 중인 이문열과 같은 보수논객에게도 작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이미 그닥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은 웃기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사람의 아들”만이라도 제대로 읽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다큐 안봐도 착한 사람들이다. 둘째, 작금의 상황에서 광신화되어가는 기독교만큼 섹시한 주제는 별로 없다. 이들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통통 튀어오르는 통통볼 같아서 건드릴 수록 재미있기 때문이다. ‘신의 길’ SBS와 한기총 간의 입장 ‘전문’을
보면 참으로 웃기다. 기독교 폄하와 언론의 자유가 충돌하고 있다. 지랄하고 자빠졌다. 기독교 폄하도 아니고 이런 걸 내보낼 수
있는 게 언론의 자유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대한민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못박아 놓은 멋진 나라
아니었던가? 다큐의 내용 중 한 목사의 인터뷰가 참
매력적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는 마태복음 13장 44절을 인용해서 천국의 세속적 성격을 참으로 잘 논파한다. 그렇다. 실상
천국(天國)은 전국(田國)이다. 예수가 설파한 메시지는 농부가 항상 마주치는 그 밭이야말로 천국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 천국은
숨어 있다. 그 은닉성의 해체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박한 실천에 의해 획득된다. 기
실 붉은악마를 사탄숭배로 몰아갔던 사건으로부터 최근의 구국기도까지 기독교는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힌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소박한 상식을 지닌 이들을 반기독교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시민의 죄가 아닌 한국 기독교계의 죄다. 어떻게 스스로가 이단으로 선포한
통일교보다도 사회에 봉사하는 바가 적을 수 있을까.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사회통합에 있을터인데,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가
통합의 상징으로 공인된 역사가 있을터인데, 작금의 한국기독교는 민폐다. 그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있다 해도 필요 없는
것들일 뿐이다. “신의 길, 인간의 길”을 제대로 본
기독교인이라면 생각해봐야 한다. 신의 축복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자신들 유대인들이라는 닫힌 집단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들의
역사적 말로가 어떠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웃”이란 “기독교인”이요 사랑이란 “비기독교인에 대한
증오”다. 그런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는 현재의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새로운 버젼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대한민국엔 새로운 예수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종교의 이름일지라도 나는 그 새로운 혁명가와는 대화를 할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