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과학은 정치에 중립적일 수 없다
과학은
정치에 중립적이지 않다.
과학이 정치에 중립적이지 않으며
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는 과학이라는 지식 생산 제도가
여타 다른 지식 생산 제도들보다 가치 중립적이라는
딜레마로부터 시작된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논제는 이미
파괴된 허울이다.
19세기로부터 시작된 논리경험주의의
유령이 여전히 대한민국 지식인들에게 배회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과학의 가치중립적 지위는 이미
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박탈된 지 오래다.
따라서 19세기의
유령을 등에 업고 사는 이 땅의 과학적 지식인들은
과학을 하나의 권력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지켜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구제해야 한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제도가 가진
특성에서 가치중립성을 철저히 획득하고,
과학이 문화와 상호작용할 때
그것을 버리는 방식이다.
진화윤리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는
이 시기에 이제 더 이상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과학이 가치에 중립적이라면 과학과
관련된 그 어떤 사상도 불가능함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문화다.
과학은 지식 생산 제도로만 발전해
온 학문이 아니다.
자세한 논증은 피하겠지만 (현재
이와 관련된 글들을 따로 준비중이다)
따라서 ‘과학문화’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문학문화가 없고,
미학문화가 없고,
철학문화가 존재하지 않듯이
과학문화도 없다.
그것은 문학도,
미학도,
철학도 그리고 과학도 그 자체로
문화적 성격을 지닌 학문들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탄생한 19세기의
유럽에서 과학과 연관을 맺지 않은 채 발전한 그 어떤
철학사조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과학은 인류가 획득한 모든
지식체계 혹은 문화의 일부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을
다룬다는 정량적 특성을 제외한,
과학과 다른 분야와의 모든 상호작용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과학이
정치에 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가능하다.
그것은 과학자도 인간임을 인정하는
소박한 태도로부터 나온다.
즉 그것은 과학자가 과학적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논변을 펼칠 때 나타나는 가치편향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편향은 과학이
지닌 가치중립성과 중첩되어 이해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이다.
과학자도 사람이다.
따라서 과학자도 정치적이다”라는
소박한 삼단 논법으로 충분하다.
이 논증을 인정할 때 비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과학의 불모지에서 진정한 과학이
문화로 꽃피울 수 있다.
그래야 과학자들이 가치중립성이라는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지식인들의 그라운드로 뛰쳐
나올 수 있다.
우생학이 비록 암울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되 당시 우생학을 주장하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소극적 우생학자 즉,
양성 우생학자(positive
eugenics)였음을 되새기는 사람은
드물다.
우생학이라는 테두리에서 자유로운
19세기의
생물학자는 없다.
오히려 적극적 우생학,
즉 음성 우생학(negative
eugenics)을 주장한 학자들 중엔
사회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많았다.
우생학과
과학자의 정치참여
예를
들어 우리는 골턴을 우생학자라고 무조건 비난할 수
없다.
언젠가 박노자 교수가
쓴 서슬 시퍼런 우생학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글에서 주장하듯이 골턴을 둘러싼 우생학 논쟁이
그의 말처럼 간단히 해체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내에는
골턴을 깊게 연구한 학자도
없을 뿐더러
우생학에 관한 연구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주로 미국이민사와
관련된 미국의
이야기들 뿐이다.
이들은
골턴이 생각했던 우생학이라는 사상을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채 골턴이라는 사조를 그 원흉으로 몰고 간다.
국내의
우생학 관련 논문들의 구조는 대충
골턴에 관해 기술하고
그가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파헤친
후, 미국의
이민법 이야기를
펼친다.
그리고 갑자기
나치가 등장하고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이 나오고,
생명공학을
들먹이다가
유전자조작식품을
역는가 하면 맞춤아기와
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까지
모두 우생학의 틀로 포섭한다.
이게 제대로된
연구일까?
생물학과
과학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이처럼 칼로 썬 듯 간단한
구조로 포섭되는 단선적 형태였을까?
아니다.
골턴이
<Natural
Inheritance>를
저술한
시점은
1889년이고
이
책은 칼 피어슨에
의해 읽히게 된다.
칼
피어슨은
좌파에 평등주의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피어슨이
골턴의 제자로 들어가다시피 해서 골턴연구소를 맡게
된다.
게다가 골턴과
우생학을 연관시키는 글들은 모조리 1865년과
69년
<유전적
천재>라는
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우생학이라는
용어는 이때 등장
한 것이 아니라
1883년에
등장한다.
그리고
1907년에는
골턴
스스로 우생학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또한
우생학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는 것은 골턴의
시기가 아니라
멘델의 이론이 재발견되는
시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때
홀데인(JBS
Haldane), 헉슬리(Julian
Huxley)등
근대종합의 기수들은 우생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찌
보면 우생학의
책임은 골턴보다 근대종합의 기수들에게 더 크다.
골턴의 학풍이
이어진 곳은 피어슨이며 피어슨에게서부터 우생학의
기치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글을 다시 보자.
골턴이 정말
유전적 요인만으로 우생학을 주장했을까?
<Natural Inheritance>를
보면 답은 “아니오”다.
역사에
밝았던 굴드가
우생학자들의 글을 보면서 가끔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굴드가 정말
혐오했던 것은 미국의 우생학자들이었다.
게다가
국내에서 사회과학자랍시고 우생학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의 논문은 죄다 조선에 수입된 사회진화론에
한정되어 있다.
사회진화론의 원흉은 허버트
스펜서지 다윈이나 골턴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적 사실에 기대 조심스럽게
논의를 전개한 축은 과학자들이었고 과학적 지식을
제한 없이 펼쳐 놓은 이들은 사회과학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과 헉슬리와
골턴이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목맨 과학자들도 아니었다.
우생학이라는 화두만 해도 과학의
정치중립성,
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가치편향문제에 대해 던지는 주제가 너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복잡한 지형을 히틀러와
우생학을 하나로 묶어 폄하해 버리는 것이 이 나라
지식인들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과학적 지식인들과 사회과학자들로
분류되는 두 문화의 축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무식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할 때가 온것이다.
그래도 박노자의 글은 positive와
negative의
뜻을 완전히 뒤바꿔 이해한 복거일의
글보다는 품격이 높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나의 정치편향이
반영되어 있음도 부정하지 않겠다.
통섭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
골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의도적이었다.
정말 많은 지식인들이 과학자들이
논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상아탑에서 플라스크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의 과학자들은 이중고를 겪는다.
그것은 그들이 과학이라는 문화가
배양되지 못한 토양에서 자란 탓에 책과 글쓰기에
무식하다는 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의
사회참여라는 짐이 합쳐진 결과다.
감히 단언하건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과학자의 사회참여는 불가능하다.
이 땅의 과학사회학자들이 외치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과학자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
먼저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는 것이 과학자들보다 먼저 과학의 문화적
속성을 파악한 이 땅의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사회학자들의
자세다.
하지만 그들은 과학자들에게
홈그라운드를 마련해주는 작업보다 먼저 과학자들을
공격하며 등장했다.
이건 정말 엉뚱한 공격이다.
이 땅의 과학자들은 다윈이나
골턴, 하다
못해 도킨스나 굴드와 같은 인물들을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이
땅엔 그런 인물들이 등장할 토양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경제부강책으로 수입되었고
과학이 가진 문화적 속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따라서 지금 아무리 과학자들에게
사회참여를 독려해 봤자 소귀에 경읽기다.
그들은 준비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부족하나마
황우석 사태를 통해 우스운 방향으로 이러한 준비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젊은 과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고 내 눈엔 곧 그들의 등장이 보인다.
앞으로 5년
쯤 후엔 과학적 지식으로 중무장한 지식인들이 조중동과
한겨례와 오마이뉴스를 누비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통섭
혹은 융합이라는 화두가 유행이다.
좋은 말이다.
그것이 내게는 과학자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는 말로 들린다.
통섭이라는 화두가 유행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과학자들과 과학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지닌 이중적 잣대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사회참여를
요구하면서 과학자들의 정치적 의사를 막는 태도다.
이러한 이중적 잣대가 사라져야
비로서 통섭이라는 화두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터 내가
시작하려는 이야기의 기반이 된다.
과학을
둘러싼 이 땅의 정치지형도
골턴의
우생학과 같은 사상이 가능하고 그것을 용인할 수
있어야 이 땅에 과학문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학과 관련한 정치지형을 먼저 개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과학철학자,
과학사회학자,
과학사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좌파에
속한다. 최종덕,
장회익 교수를 위시하여 김환석,
김동광 등 쟁쟁한 과학지식인들의 정치적
편향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이 좌파다.
물론 신중섭 교수와 같은 보수의 논리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주류는 좌파다.
둘째,
과학자로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우파다.
오세정 교수나 최재천 교수가 대표적이다.
솔직히 정재승 교수의 정치적 편향성은
잘 모르겠다. 전자의
인물들은 한겨례를 위시한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후자의 인물들은 조중동에 글을 기고한다.
물론 최재천 교수는 오세정 교수에 비해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다.
정치적 입장을 내보이는 데 매우 조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대체적으로 많은 과학자 출신의 논객들이 매우 보수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과총이라는 단체의 행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대립각은 과학전쟁이 수입되었을 당시 김환석–오세정
논쟁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과학자로서 당시의 논쟁에서 나는
오세정 교수의 편에 서 있다.
김환석 교수는 위에서 내가 언급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분리하지 않고 사용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당시 과학전쟁에 관한
격렬한 토론의 와중에 진중권 교수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리고
과학과 관련된 그의 당시 태도에 대해 대부분 반대입장을
취했음을 인정해야 겠다.
문제는 과학전쟁에서 드러난 이들의
가치지향성이 정치적으로 여과없이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로 흘러가버린다는 것이다.
김환석 교수는 시민참여의 과학이라는
조금은 웃기는 화두로 한겨례를 수 놓았고,
오세정 교수는 과학에 관한 화두가
떠오를 때마다 조선일보를 수 놓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과학에 관한 대립각이 도대체 왜
정치적 대립각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과학지식인들에 대하여
최재천
교수를 빼놓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이 과학자의
행보를 우리는 반드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내가 제대하고 복학하던 당시 최재천
교수가 입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과학대중화라는 화두를 독점하고
동아일보를 본거지로 삼으며 정말이지 많은 글들을
쏟아냈던 것으로 기억한다(나는
그가 이후 과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적합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미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전북대학교 이병훈 교수에 의해 번역된 상태였지만
최재천 교수의 등장 이후 이병훈 교수는 설 땅을 잃은
느낌이었다. 실상
최재천 교수가 등장하기 전 당시 SK에서
발행하던 <지성과
패기>라는
사외보를 통해 나는 이병훈 교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재 최재천 교수가 보여주는
보수신문에 글을 싣는 행보는 동아일보와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도
당시 그의 글에는(지금도
대부분은 그러하려니와)
정치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생태적이고 아름다운
에세이였지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글들이 아니었다.
그가 비록 동아일보라는 보수언론을
통해 대중적 과학자의 이미지를 굳히기는 했으나 그는
여성이라는 진보적 화두를 점거하며 많은 이들에게
진보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최근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철새들을
위한 변호“에서도 그는 자연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줄
뿐, 정치적인
편향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정치성을 드러낸 적이 있다.
노무현에 대한 매우 직설적인 공격이 감행된
것이다. 그동안 그에게서
전혀 정치색을 읽을 수 없던 내게 이 글은 진정
충격적이었다. “우린
이런 리더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게재된 이 글은 “작심하고 쏟아낸 대통령의
발언에 또 한 번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인터넷 검색순위로만 본다면 그는 결코 인기 없는
대통령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끌어 모으는
그의 인기관리 능력은 가히 연예인 수준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 노무현은 나라를 잘 통치한
대통령이 아니라 시대의 통념을 뒤엎은 혁명가 또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유유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희대의 풍운아로 남고 싶어하는 영락없는 낭만주의자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결국 이 글의 결론은 우리에겐
여왕개미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로 끝난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는 동아일보로부터 시작된 그의 대부분의
글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한 철학적
분석이 요구됨으로 인터넷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나의 단편적인 비판들로 대신하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이상적인 리더쉽을 여왕개미에
비유하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우생학보다 위험한
발상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를 믿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여왕개미형
리더쉽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나같은 사람에겐 “여왕개미의
페로몬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복종 당하는 일개미”가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글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실었다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 내용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일보에 글을
싣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있어 이미 많은 논객들과
다양한 정치적 지형도를 형성한 이 땅의 인문사회과학자들과는
다르게 과학자들에게 들이대야 하는 중요한 잣대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과학적 지식인들의 등장을 위하여
실상
나는 더욱 많은 과학자들이 조선일보에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글을 실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글을 싣는
과학자들만큼 한겨례와 오마이뉴스에 글을 싣는
과학자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아니 거꾸로 말해야겠다.
나는 조중동과 한겨례와 오마이뉴스가
과학섹션을 IT/과학(아마
한겨례는 아닌 것으로 아닌데 자세한 것은 직접 찾아
보시길)이라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부터 탈피시켜 더욱 많은 과학자들에게
칼럼의 기회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최재천 교수와 같이
대중과학계에서는 알아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쓴
이런 정치적 편향의 글이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곧 최재천 교수가 지난 십년간 노력해온 과학대중화의
꿈이 아직 요원함을 반증하는 것 밖에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사회, 시사에 관한
각계의 목소리들에서 과학자들은 제외되어 있다.
우리는 조갑제, 이문열,
주성영, 변희재,
공희준, 진중권,
고종석, 강준만,
강유원, 이진경,
김규항 등등의 논객들과 그들이 벌이는 정치논쟁에는
익숙해도 오세정과 김환석이 벌이는 정치논쟁에는
익숙하지 않다. 아니
그들은 정치로 논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정치적으로 갈려 있으면서도 굳이
과학으로만 논쟁하려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세정과 김환석 교수가 정치에
관해 논쟁하는 모습이다.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그들만의 리그에
과학적 지식인들이 참여하길 바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뚜웨이밍은 지식인의 조건 중 하나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들었다.
과학자들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싶다면 당연히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자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자유로워지는
것 외에도 나는 과학자들의 정치적 다양성을 바란다.
현재의 지형도는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있다. 과학사회학을
전공한 이들은 좌파가 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과학자에 가까운 이들은
우파가 되어야 한다는 우스운 논리가 퍼져 있다.
최재천 교수의 제자뻘이라 할 수
있는 장대익은 최근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도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다.
그도 스승인 최재천 교수처럼
한겨례와 조선일보를 오가는 지식인이다.
아마 이러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가능한 지식인들은 과학자들 뿐일지도 모른겠다.
인간의 뇌는 참으로
신비하다. 가끔은
우리의 뇌가 그리는 궤적에 일종의 끌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과학적 지식의 가치중립성을 차가운
이성으로 강조하는 리쳐드 도킨스와 매트 리들리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에 가깝고,
과학적 지식의 가치중립성에 대하여
느슨한 대신 역사에 밝은 굴드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에
가깝다. 도킨스와
윌슨의 충실한 후계자인 최재천 교수의 정치적 성향은
그들에 가깝고, 굴드의
추종자인 김동광 교수는 정치적으로 그에 가깝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이념이란 결국 뇌세포들과
개체의 경험이 만들어낸 상호작용일테고,
그것은 하나의 점으로 환원되는건
아닐까 하는. 그래도
이런 운명의 필연성을 떨쳐내기 위해선 도대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고민까지도.
나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과학자들이 소심하게 과학의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정치를 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현재 프레시안에서는 장대익
교수가 과학과
종교라는 화두로 신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실상 세상에서
가장 쉬운 비판이 종교비판이다.
그리고 종교비판을 하기엔
이 땅의 과학자들이 지닌 종교적 성향은 진정한 무종교인의
그것은 아니다.
나의 글 “일그러진
우리들의 과학자“는 이런 토대에서 작성된 글이었다.
나는 과학자들이 종교를
넘어 정치를 논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국은 초딩 수준의
과학대중화를 이룬 지난 30년
간의 실패한 과학대중화 정책을 만회하는 지름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 스스로의 정치적 성향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점점 스티븐 제이
굴드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소박한
상식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고 과학자도 인간이다.
따라서 과학자도 정치에 관한 견해를
표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과학대중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과학의대중화가 아니라 과학이 진정으로 과학으로
태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토대가 완성되면 그 때
진중권과 강준만이 논쟁하듯 누군가와 토론하고 싶다.
그리고 그 때 “과학은 발견하고,
정치는 오용하고,
인문학은 부정하며 따라서 나는 과학을 긍정할
것”이라는 가치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것이다.
추신:
이 글은 민노씨의 글 “조선일보
기고자들”에서 필 받아 쓴 글이다.
원래는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과학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글을 써내려가다보니
왠지 아이에게 총쏘지 말라고 혼내는 것 같아서 논조가
평소의 내 생각으로 돌아와 버렸다.
몇 년을 묵혀두고 있던 생각을 한 호흡에 써내려
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준 그에게 감사한다.
통섭의 전통적 용례를 최재천 선생의 언급과 조선실록과 승정원일기 검색으로 검토해 보면 이건 그냥 지배 질서(가치평가 없이 현상명사로서)와 비슷한 의미를 띈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 21년 10월 8일 김종서에게 내려진 교지의 용례가 가장 적당한 거 같군요. “생각하건대, 저 무지한 놈[여진족]들이 본래부터 통섭(統攝)함이 없이 각각 제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국경통제가 어려우니 좀 잘 검문하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결국 통섭은 원효니 뭐니보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용법 때문에 윌슨의 의도가 대충 드러나는 번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충 한데 모으는게 아니라 최고 책임자의 명령권 하에 서로간의 질서 있는 직분 나누기가 이뤄져 있는 상태가 지칭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최교수는 스승 윌슨처럼 뭔가 거대한 개념만 던지고 실속이 없는 깡통 같습니다. 둘이 똑같습니다. 그래도 윌슨이 좀 나으려나..
아 물론이죠. 자연 ‘현상’이 가치중립적이지 과학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나요? 우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에선 이미 상식인 얘기인데…. 농담입니다만… 그런데, 그래서 잘 살펴보면 어떤 분야든 추상화된 이름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참여해서 일을 하고 있다면 죄다 정치적이라 할 수 있겠죠. 세상 모든 일이 정치적인 국면을 가지고 있다보니 과학을 다른 단어, 예컨대 음악같은 것으로 바꿔도 뭐 전혀 문제없이 읽힐 것 같습니다.
다만 현 시대는 과학이라는 이 시대의 시녀(?)가 잠자코 시키는대로 일을 하기를 원할테니 시녀가 시키는 것 외의 어떤 것이든 하게 되면 매우 정치적으로 해석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과학계 내에서도 매우 특정한 관점만을 지지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엿보이는데, 그것에 저항하거나 다른 관점을 가지면 그 순간 매장되거나 혼자 사막에서 타임머신 연구해야죠. 상황 자체가 매우 정치적입니다.
그나마 음악이 나으려나요?………… 그치만 저도 먹어야 사는 인간이라….. 과학의 힘으로 얼른 피부 광합성만 성공시키면 인류는 절반 이상 해방입니다.
오오 피부광합성!! 대박입니다
과학은 가치 중립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진화중립적이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가치에 옳고그름을 말하는것은 문제가 없지만 유전자 조작이나 여타의 기술적 도구로 인간을 변형시키는데에는 동의할수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더 튼튼하고 더 똑똑한 인간이 개발? 될수는 있지만 그건 인간이 아니라고 보기때문입니다.
아. 아마 그걸 제일먼저 시도하고 있는 이들은 부자들이니까, 역시 전략적 파멸의 대상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는데 아직 완전하지 않으므로 패스.
글 잘 읽었습니다. 저희 그룹에 퍼가도 될까요? 오늘 모임에서 잠깐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었거든요.. 종종 와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네 퍼가셔요 ^^